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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 라면에 다시마가 2개 들어간 이유

[독서에세이] 소설가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등록|2015.02.21 13:11 수정|2015.02.21 13:12
초등학생이던 언니와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생애 처음으로 콘서트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콘서트 장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던 그 짧고도 긴 시간. 내 귓가엔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쾅쾅 들려오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라면 서태지와 아이들을 빼놓고 할 수 없다. 매일을 그들 음악으로 시작했고, 그들 음악으로 끝을 맺었다.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이 노래만 있으면 평생 지루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가슴 벅차하곤 했다. 이후, 누구나 다 아는 그들의 은퇴가 있었고, 평범한 학생이던 나는 평범한 일상에 시달리느라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서태지 홀로 컴백했다. 갑작스런 그의 컴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주 살짝 고민하기는 했지만 나는 컴백 당일 날 언니와 함께 콘서트 장으로 향했다. 콘서트 장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어도 크게 실망스럽지 않았다. 이미 나는 꽤 신이 나 있었던 것이다. 그곳으로 향하던 내내 이미 많은 걸 느끼고 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컷 기대하고, 실컷 실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로 다가왔다. 

서태지는 '울트라맨이야'를 외치며 소규모 무료 콘서트를 계속 열어갔고, 팬들 역시 노련한 태도로 생활의 질서를 깨트리지 않으면서 함께 무대를 달궈나갔다. 같은 대학에 다녔던 언니와 나는 시험 기간에도 함께 새벽 전철을 타고 콘서트 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두꺼운 전공 서적을 펼치고 공부하다가, 공연을 즐긴 후 집으로 돌아와 마저 공부한 뒤 다음날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하나도 고생스럽지 않았다. 계속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일. 그것을 눈으로 보고, 손에 쥐고, 귀로 듣고, 입으로 음미하는 일. 좋아하는 대상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좋아하는 대상을 향해 눈을 번뜩이는 순간 모든 감각은 깨어나고, 더 없이 열정적인 상태로 돌입하게 되며, 웬만해선 지치지 않을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찾아왔던 서태지와 그의 음악. 나는 충분히 그 시간을 만끽했고 이를 통해 열정의 힘을 알게 되었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도. 이후 나는 다른 것들에도 열정을 쏟을 수 있었고, 반면, 열정의 공백기간에는 한없이 축 처지고, 모든 것이 지루하다 여기며, 아무 것에도 감응하지 못하기도 했다. 이럴 때면 생각하곤 했다. 좋아하고 싶다. 그게 무엇이든.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건 참 행복한 겁니다

좋아하는 감정이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이 열정이 다시 삶을 신 나게 만들어 준다는 걸 알았기에 소설가 김중혁이 시외 버스를 타고 공장으로 향하는 길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이 됐다. 종이, 콘돔, 브래지어, 엘피, 도자기, 악기, 화장품, 간장, 가방, 초콜릿, 지구본 등을 생각하며 그는 '삶이 참 신 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좋아하는 물건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벨트 위에서는 제품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소음과 냄새와 움직임이 내게는 생산의 교향곡처럼 들렸다. 어찌나 일목요연하고 일사분란해 보이던지... 공장에서는 만들어지고,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지고 있었다. 소음이 리드미컬하게 들렸고, 화학약품은 향기롭게 느껴졌다. 원료를 넣으면 어찌 되었든 제품이 만들어졌다. 나는 공장이 무척 부러웠다. 

▲ <메이드 인 공장> 표지 ⓒ 한겨례출판

공장에서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소설가인 본인은 아무것도 만들고 있지 못하는 듯 해 공장이 부럽다고 말한 김중혁은 <메이드 인 공장>에서 본격적인 공장 탐방을 시작하기로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도 컸고, 공장 그 자체를 보고 싶은 마음 또한 있었다.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서로를 조립하고 있는 셈"일지도 모르므로, 공장은 어떻게 보면 서로 연결된 우리 인간을 이해하기에 최적의 장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중혁은 15군데의 공장을 찾아 다녔다. 나는 그 중 두 곳의 공장을 향해 먼저 달려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고 있던 맥주 공장과 라면 공장이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많이, 더더더 많이 알고 싶은 법. 그래서 나는 김중혁의 글이 성에 차지 않았다. 맥주에 대해서 더 많이 알려달라! 라면에 대해서도 더! 그렇지만 역시나 좋아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웬만해선 미소를 짓게 되는 법, 별 얘기가 아님에도 호들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법인 것 같다. 이 책은 내게 딱 그만큼이었다.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일 만큼.

맥주 공장에서 시음도 하고 공정도 지켜보던 김중혁은 '왜 우리 나라 맥주는 맛이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는 앞으로는 더 맛있어 질 거라는 기대를 안고 글을 끝마친다.(조금 싱겁게...) 라면 공장에서는 조금 더 세밀한 관찰이 이루어졌다. 라면은 왜 꼬불꼬불한가에 대한 풀리지 않던 의문이 비로소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면을 꼬불꼬불하게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면이 부서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직선으로 면을 뽑아내면 부서졌을 때 상품 가치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둘째 부피를 줄이기 위해서다. 더 좁은 곳에 더 많은 양의 면을 압축시키기 위해서는 꼬불꼬불한 면이 필수적이다.

흐음, 그랬었군. 너구리 라면에 대해서 알게 된 사실도 하나 있었다. 너구리 라면에 들어가는 다시마는 하나하나 사람이 넣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해도 기계는 너구리 라면에 다시마를 넣지 못한다는 사실, 왠지 조금 통쾌하지 않은가! 혹 앞으로 너구리 라면에서 두 개의 다시마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수작업으로 인해 발생한 실수였다는 점을 생각한 뒤 맛있게 라면을 먹으면 되겠다.

김중혁과 함께 다른 공장들도 구경했다. 김중혁은 공장에서 본 모든 물건들에 큰 관심을 지니고 있었고, 공평하게 그 관심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두 공장에서만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머뭇머뭇. 우물쭈물. 벌게진 얼굴로 공장 안을 휙 둘러보고 있을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혼자 흐흐흐 웃었다. 그 곳에서는 콘돔과 브래지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콘돔공장에서 전수 조사를 하는 이유

두 공장에 관한 글을 읽은 뒤 내 머릿속에 남은 정보는 각각 이렇다. 콘돔은 제조보다 검사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전수 검사를 한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 콘돔을 일일이 다 검사하는 것이다. 이유는 이렇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불량품 하나에 아이 한 명이다."

브래지어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정보를 알았다. 경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사이즈는 80A라는 것. 그리고 A컵을 만들기가 가장 쉽고, 뒤로 갈수록 작업 과정이 더 까다로워진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E컵이나 F컵은 너무 커서 한 손으로 쥐고 작업하기가 힘들어요."

팟캐스트를 통해 들었던 소설가 김중혁의 유쾌한 목소리가 책에서도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의 글은 사려 깊으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진지한 듯 하면서도 가볍게 통통 튀어 오르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향해 걸음을 옮겨본 지가 언제던가. 아니 먼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소파에 가만히 누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바이젠 맥주가 떠올랐고, 어제 사다 놓은 한 묶음의 라면도 떠올랐다. 책 읽고, 글 쓰는 것도 좋고, 마룬 파이브도 좋고,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나의 마음도 좋다. 저녁의 어스름한 분위기가 좋고, 혼자 앉아 청승을 떠는 것도 좋고,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좋다. 걷고 싶고, 수영하고 싶고, 얘기하고 싶고, 눈을 마주보고 싶다. 이 모든 좋은 것들을 떠올리자 이 중 많은 것을 지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행복해졌다. 좋아할 대상이 있다는 것, 그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메이드 인 공장>(김중혁/한겨례출판/2014년 09월 15일/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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