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똑같은 곳에서 자꾸 넘어질까
[독서에세이] 법상 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 <날마다 해피엔딩>(법상 스님 지음 / 김영사 펴냄 / 2011.05 /1만2000원) ⓒ 김영사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실 변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계속 변하고 있다.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외모에서부터,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는 태도, 말투, 제스처 그리고 사랑하는 방법까지. 사람뿐일까. 모든 것은 변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며, 이와 비슷한 말로는 고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의 제법무아(諸法無我)가 있다.
한참 우쭐했다. 오랜 친구들은 나의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나 역시 기뻤다. 변하고 있는 나를 생각하면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사는 것 같아 뿌듯했고, (친구들 말에 따르면) 아주 좋은 쪽으로 변하고 있다 하니 그저 흡족할 따름이었다.
어릴 적 사진엔 유독 부루퉁한 표정의 내가 많다. 뭔가 불만스러운 게 많았고, 그런 상황이 닥치면 나는 그걸 어떻게든 표현했다고 한다. 주로 얼굴 표정으로.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던지, 나이가 들어서도 불만스러운 상황은 쉽게 감지됐다. 어린 시절처럼 표정을 내세울 순 없었지만, 대신 친구들 앞에서는 실컷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이랬던 내가 변했다는 거다. 더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 친구가 됐다는 거다. 여기다가 긍정의 화신으로의 변신. 몇 년간 친구들은 나를 통해 긍정의 힘을 전수받았다.
친구의 말에 귀가 '번쩍'... 우리는 왜 자꾸 넘어질까
이대로만 가면 되는 거야, 라고 생각하던 어는 날,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친구에게 들었다. 친구는 말했다.
"너 다시 돌아왔다."
나는 깜짝 놀라 친구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1시간째 세상의 모든 불만을 떠안은 사람처럼 친구에게 불만을 털어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날 하루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몇 개월 계속 그랬다. 정말 나 다시 돌아왔다. 예전의 불만 가득한 나로.
어찌된 일일까. 그 동안의 변화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성장하지 못했고,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자 어깨가 축 처졌다. 그간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버린 것만 같았다.
그때, 법상 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을 펴 들었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다행히 책에는 꾸지람과 나무람이 없었다. 대신, 우주와 인간, 인간의 삶과 개인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모든 만물을 향한 토닥거림이 있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자연스레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단지, 나는 똑같은 곳에서 또 넘어진 것뿐이다.
사람은 넘어진 그 장소에서 또 넘어지곤 한다. 나를 잃은 상황을 만나게 되면 또 나를 잃게 되고, 나를 절망하게 한 상황을 만나면 또 절망하게 되고, 화나게 한 상황을 만나면 또 화를 내게 되며,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만나면 또 불만을 토로하게 되는 것이다. 즉, 같은 상황에선 매번 똑같이 반응하게 된다는 말이다. 삶이 나아지는 듯하다가도 매번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삶 앞에서 자꾸만 지치고 좌절하게 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삶을 변화시키고 싶지만, 결국엔 이처럼 똑같은 삶을 반복하게 되는 이유. 같은 상황에서 매번 같은 반응을 하는 이유. 그 이유는 무엇일까. 스님은 말한다. 분별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우리의 뇌는 초당 4000억 비트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중 우리가 인식하는 정보의 양은 겨우 2000비트.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정보를 인식할까. 우리의 분별이 기준이 된다. 우리는 판단한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그리고 좋은 것만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이로써 "매번 똑같은 2000여 가지의 가능성만이 현실에서 지루하게 반복될 뿐 나머지 3999억9999만8000비트의 무한한 가능성은 습관적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고 스님은 말한다.
매번 좋아하는 것만을 취하며 살아가는 삶. 단순히 생각해도 이런 삶은 결코 만족스러운 변화를 맞이하지 못할 것 같다. 매번 초콜릿을 선택하는 삶, 매번 같은 타입의 사람을 선호하는 삶, 매번 같은 길을 걷고, 같은 기준으로 사람을 보며, 같은 가치관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삶. 이런 삶은 언제나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넘어진 곳에서 또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기 좋은 것만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상이다. 좋아하는 것만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상이다. 아상은 언제나 자기 기준을 정해 놓고 좋아하는 것은 삼키고, 싫어하는 것은 뱉어버릴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아상에게 놀아난다. 백전백패, 아상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만다. 아상은 언제나 나를 위하는 척, 돕는 척하면서 나타나 나를 집어삼키는 재주꾼이다. - 본문 중에서
아상이 바로 분별하는 마음이다. 바로 이 아상 때문에 우리는 매번 같은 상황에서 같은 판단을 내리고 같은 선택을 하게 된다. 무한한 가능성과 변화를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짓인가 싶지만, 우리는 매번 이런다. 그래서 우리 삶은 쉽게 도약하지 못하고, 인생 변혁 또한 쉽지 않다. 과거와 다를 바 없는 현재를 살게 되는 것이다.
아상에 의해 싫다고 판명된 것이 얼마나 많을 텐가. 싫은 것 앞에서 얼마나 자주 화를 내고, 절망하며, 불만을 터트려야 할 텐가. 나는 불만을 토로할 때마다 왜 남들은 아무렇지 않은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야 알겠다. 절대적으로 싫은 상황이란 없는 거였다. 내 기준에만 싫은 것일 뿐. 그래서 나만 넘어지는 것일 뿐.
불교 이론 몰라도 가슴에 와 닿는 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하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아상이 아닌 '공'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상에 갇힌 분별로써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아상이 타파된 무분별로써 돌아가야 한다.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 원하고 원치 않는 것, 보고 싶고 보기 싫은 것을 나누어 놓고 습관적으로 좋은 것, 옳은 것, 원하는 것, 보고 싶은 것만을 보던 습관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좋고 나쁜 것을 나누지 말고 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가끔 큰 변화를 맞은 사람들을 본다. 변화에 앞서 깨달음이 있었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이 말하는 깨달음이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예전엔 죽을 만큼 싫던 것이 지금은 싫지 않아졌다는 것. 너무 좋아 집착하던 것에서 지금은 벗어났다는 것. 세상엔 좋고 싫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는 것. 그래서 많은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 이런 깨달음을 얻으니 마음이 매우 편안해지고 평온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젠 모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졌다고 말한다. 불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아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불교 이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지만 나는 스님이 말하는 아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아상이 아주 강하게 느껴졌다. 확고한 기준을 세워놓고, 그 기준 안에서 나만의 세상을 만들려던 내 아상! 나를 힘들게 하던 내 아상!
조금 더 착한 기준을 만들면 될까. 더 많은 것을 좋아하면 될까. 처음엔 이렇게라도 노력해볼까 싶었다. 하지만 결국엔 스님말씀대로 좋고 싫은 것을 분별하지 않는 쪽으로 노력해봐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노력하면 될까. 스님은 말한다.
"경계가 올 때는 '경계구나'하고 지켜본 뒤 이 경계를 생각으로 분별하지 말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라."
여기에 불만스런 상황이 있다. 나는 내가 왜 불만을 느끼고 있는지 그 원인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한다. 원인 속에는 싫은 것들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얘네들을 싫어하면 안 되는 거랬지. 나는 속으로 외친다. '경계구나'. 싫어하지 말아보자. 싫어하지 말아보자. 우선은 이렇게라도 주문을 외우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내 마음에서 분별심을 없애진 못할 것이다. 수행자에게도 이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러니 어쩌겠나. 계속 노력해보는 수밖에. 넘어지긴 싫으니까.
이것도 싫어하면 안 되나?
덧붙이는 글
<날마다 해피엔딩>(법상 스님 지음 / 김영사 펴냄 / 2011.05 /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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