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은정리, 이 사람들이 나무를 기억하는 방식

[디카詩로 여는 세상 47] <나무에 대한 기억>

등록|2015.02.23 17:11 수정|2015.02.23 21:10

▲ 은정자 돌탑 ⓒ 이상옥


은정리(銀亭里) 사람들
그들이 신성시 여기는 노거수 은정자(銀亭子)가
고사하자
뿌리 둘레를 따라 돌탑을 쌓아
매해 정월 동제를 지낸다

거의 삼백년 세월이다
- 이상옥의 디카시 <나무에 대한 기억>

지난 20일, 음력 정월 초이튿날 오전 고성 은정리(銀亭里)에는 수백년 이어온 동신제가 열렸다. 실상, 은정리는 옛날 지명이다. 오늘에는 월치, 정촌, 산촌, 신은 네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이 네 마을의 중앙에는 은정자(銀亭子)라는 거목이 있었는데, 은정리라는 마을 지명도 이 나무에서 비롯됐다.

은정리 사람들은 이 나무 밑에서 액을 막고, 살을 푸는 치성을 드리기도 하고, 복을 비는 정성을 바치기도 한다. 이들은 은정자를 우주목으로 받아 들였다고 했다.

신목이라고도 하는 우주목(cosmic tree)은 엘리아데(Mircea Eliade)에 의하면 천상의 세계, 중간(혹은 지상)의 세계, 지하의 세계를 이어주는 세계축(axis mundi: 일명 우주축)과 관련된다. 인간이 거주하는 곳이 중간계로 인간에게 우주목은 신적 존재가 지상으로 하강하는 교통로가 되기 때문에 신성성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져, 민간신앙의 대상이 된다.

30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은정자 동신제

▲ 은정리 동신제가 열리는 현장. '은정자 동신제'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고, 돌탑과 노거수가 보인다. ⓒ 이상옥


은정리 사람들이 은정자에 동제를 모시게 된 것은 서기 1720년부터다. 구상덕의 일기 <승총명록>에 전하는 바로는 조선 숙종 때 우역(牛疫 )이 크게 발생하자 동민들이 은정신(銀亭神)에 제사를 드리니 크게 효험이 있어, 이를 계기로 동제가 매해 정월 시작되었는바, 그 역사가 300년에 가깝다.

그러나 은정자도 세월을 이지기는 못했던지 고사하고야 말았다. 초월적 존재를 만나는 통로 역할을 했던 은정자가 죽고 나니, 사람들의 상심은 얼마나 컸겠는가. 은정리 사람들은 고사된 은정자 뿌리 둘레를 따라 돌을 쌓아 탑을 만들어 은정자를 기념하며, 변함없이 은정자를 표상하는 돌탑에 동제를 계속 드린다.

민간신앙적 의미 보다 감사하고 추억하는 의미

그 정성이 참으로 놀랍다. 마을 사람들의 지극한 정성 때문인지, 돌탑 옆에는 은정자의 재생처럼 또 다른 거목이 자라고 있다. 지금 은정리 사람들이 동제를 올리는 것은 민간 신앙적 의미보다는 나무가 베풀어주었던 큰 그늘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그 은혜를 감사하고 추억하는 의미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동제를 지내고 마을회관 모여서 떡국과 음식을 나눠먹으며 마을의 장래를 논의하고, 새해 인사를 나누며 덕담을 주고받는 것이 참으로, 우리 시대에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미풍양식이 아닌가 한다.
덧붙이는 글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이제는 채호석 교수가 쓴 <청소년을 위한 한국현대문학사>(두리미디어, 2009)에 새로운 시문학의 한 장르로 소개되어 있을 만큼 대중화되었다. 디카시는 스마트폰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날시)을 순간 포착(영상+문자)하여, SNS 등으로 실시간 순간 소통을 지향한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