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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는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 그런 시절도 있었지

[독서에세이] 빌 브라이슨의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산책>

등록|2015.02.27 11:50 수정|2015.02.27 11:50

▲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산책> ⓒ 추수밭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은 가난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퇴출된 극빈층 미국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책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일을 하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바버라는 직접 극빈층의 삶으로 뛰어들어 그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면서 이에 대한 답을 찾아냈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도 그들이 계속 가난한 이유는 가난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바버라는 말한다. 너무 낮은 임금과 너무 높은 집세 때문에 초기 자금이 없던 그들은 계속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었던 2012년 즈음, 방영된 다큐멘터리가 있다. 금융 위기 이후 하루아침에 중산층에서 극빈층으로 전락한 미국인의 삶을 그리고 있는 다큐멘터리였다. 방송에서 미국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의지조차 없는 듯 보였다. 가난한 이들에겐 미국의 복지제도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에서는 가난을 개인의 문제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방송은 말했다. 자유주의자 대부분은 아직 가난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자본가들이거나 중산층 사람들이었다.

빌 브라이슨의 신나는 유년시절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은 계속 휘청거리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듯 미국에게도 좋은 시절은 있었다. 1950년대, 전세계의 부가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은 유례없는 호황기를 누렸다. 부자인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큰 차이 없이 행복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산책>에서 빌은 본인의 유쾌했던 유년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모두가 행복하게 지냈다.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것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에게 찾아온 행운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을 행복에 젖게 해주던 물건에는 토스터, 와플 굽는 틀, 냉장고, 세탁기, 전화기, 진공청소기, 가스난로, 전기난로 등이 있었다. 지금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거의 모든 것들이 그 시절 미국에서 탄생한 것이다.

미국의 1950년대를 이야기할 때 특히 (개인적으로) 신이 나는 이유는 자식을 사랑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한 여인이 그의 세 번째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빌 브라이슨이 태어난 것이다. 아이오와 주 디모인에서 태어난 빌의 부모님은 당시에는 흔치 않던 맞벌이 부부였다. 지역 신문 <레지스터>에서 각각 스포츠 기자, 가정 생활 기자를 담당했던 부모님덕에 빌은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이 번개처럼 지나간다는 말은 우리 삶에서 잘못 알려진 신화에 불과하다. 키드의 세계에서 시간은 훨씬 느리게 움직인다. 후텁지근한 오후의 교실에서는 시간이 다섯 배쯤 느리게 흐르고, 어떤 자동차로 여행하든 8킬로미터를 넘는 순간부터는 시간이 여덟 배나 느리게 움직인다. 특히 네브래스카나 펜실베이니아처럼 가로로 길쭉한 주를 횡단할 때는 무려 86배까지 치솟는다. 또 생일, 크리스마스, 여름방학 등을 앞둔 주에는 시간이 굼벵이처럼 흘러간다. 따라서 어른의 기준으로 계산할 때 어린 시절은 족히 수십 년은 된다. 오히려 어른의 삶이 눈 깜짝할 새에 끝난다.

외상으로 후두를 떼어낸 디 삼촌 목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던 치즈 같은 음식물을 바라봐야 했던 일이나, 밤만 되면 아랫도리를 벗고 부엌을 돌아다니던 아빠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일이나, 영화관 화장실에 들어가 바닥을 기어 다니며 모든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후 그 손 그대로 맛있게 팝콘을 먹던 일이나, 옆집 사는 착하지만 멍청한 놈을 6년 동안 골려 먹던 일이나, 금속 맛이 나는 인스턴트 음식을 아무 죄책감 없이 먹으며 텔레비전에 몰두하던 일 등이 엿가락처럼 늘어난 빌 브라이슨의 어린 시절에 속해 있었다. 

당시 미국엔 걱정거리가 없었다.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해도 됐고, 그 모든 것이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또 전 지구적으로나 다 좋을 거라고 인식되었다. 새롭고 신기한 건 무조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거기에 쾌락적 요소가 스며들어 있으면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식사하기 전의 음주? 많이 마실수록 좋다! 흡연? 두말하면 잔소리다. 담배는 우리를 건강하게 해준다!"

걱정이 없긴 미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백악관을 관광하던 한 여인이 백악관 심장부까지 침투해 그곳에서 한나절 동안이나 즐기는 사이 그녀를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만해도 미국 정부는 그 여인에게 차 한 잔을 대접한 뒤 집으로 돌려보내는 등 여유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미국 정부가 순진했다는 건 아니다. 미국은 그때도 지금처럼 끔찍한 짓을 저지르곤 했다. 다만 문제는 국민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순진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원자폭탄이 갖는 무기로서의 지존한 위치와 막강한 위력에 매료되고 홀딱 빠졌다. 군부가 라스베이거스 외곽 네바다 사막 지역의 프렌치맨 플랫이란 말라붙은 호수 바닥에서 원자폭탄의 실험을 시작하자, 그곳은 갑자기 라스베이거스에서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됐다. 사람들은 도박을 하러 라스베이거스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도박만을 하러 가는 것은 아니었다. 사막의 끝자락에 서서 발밑에서 흔들거리는 땅을 느끼고, 그들 앞으로 연기와 먼지가 기둥을 이루며 치솟아 오르는 광경을 보고 싶어했다.

원자 폭탄이 구경거리이던 시절. 낙진을 뒤집어 쓴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지 못했다. '재미있는 일을 당했군' 정도로 자신의 처지를 인식했다. 국민들이 재미있어하는 통에 정부는 더 신나게 원자 폭탄 실험에 열을 올릴 수 있었다. 낙진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그 낙진을 어떻게 털어냈는지, 또는 제대로 목욕이나 했는지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원자력의 위대한 힘과, 신기한 버섯 모양, 그리고 이후의 오색찬란한 빛에만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부유했던 미국, 가난했던 한국. 빌이 풍요 속에서 악동 짓을 하며 코를 파고 있을 때, 우리 아버지들은 미군군용트럭 앞에서 '기브미 쪼꼬렛'을 외쳤다. 많이 다른 두 나라였지만 비슷한 점도 있던 시기였다. 그때만 해도 두 나라 모두에 지금은 없는 것들이 있었다.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정, 인심, 믿음이었다.

밖에서 아무리 시간을 보내도 엄마는 빌을 집안으로 들일 생각이 없다. 대신 돈을 손에 꼬옥 쥐어주고는 제발 저녁 전에는 들어오지 말라며 신신당부한다. 아들 빌은 쿨하게 그러겠다고 엄마의 부탁을 들어준다. 자전거를 끌고 나간 빌 주위에 친구들이 몰려든다. 어디 갈 건데? 우리 그곳으로 가자! 수십 명이 친구들이 함께 그곳을 향해 돌진한다. 도착하면 그곳에는 이미 수백 명의 아이들이 와서 진을 치고 있다. 함께 어우러져 논다. 누군가가 아이를 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빌의 고향 디모인은 빌이 사춘기 시절이 될 즈음부터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엄마와 함께 가곤 하던 영화관도 사라졌고, 공원도 문을 닫았다. 작은 레스토랑들도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고 당시엔 인기 만점이던 신문 <트리뷴>도 폐간됐다. 부모님이 일하던 <레지스터>도 가네트 그룹이라는 곳에 인수됐다. 거의 모든 상점들이 사라졌고 대신 커다란 약국이 혼자 모든 책임을 떠맡게 됐다. 거대해 보이던 긴스버그 백화점과 뉴 올티카 백화점 또한 문을 닫았다. 뛰놀던 아이들은 집안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고, 미국 전역은 유명 브랜드와 체인점들의 브랜치로 전락했다.

가진 것은 언제나 버려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삶은 자리를 옮겨가며 계속된다. 그러나 1950년대에 우리를 특별하고 남다르게 만들어주던 것들을 지키지 못해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과거를 생각하며 추억에 젖는 이유는 단지 우리가 낭만적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 그런데 그 사라진 것이 우리 삶을 매우 풍요롭게 해주던 것이었다면 그것을 다시금 현재에 불러오고 싶다는 바람 때문에도 우리는 과거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뒤의 미래에도 우리는 지키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며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사라지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사람들 사이의 인심, 정, 믿음 일까. 사회 정의, 도덕, 상식일까. 이 모든 것은 정령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워해야 할까.
덧붙이는 글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산책> (빌 브라이슨/추수밭/2011년 06월 27일/1만4천8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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