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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악역, 20kg 아령 든 것처럼 무겁다"

[박정환의 뮤지컬 파라다이스] '로빈훗'에서 길버트 연기하는 박진우

등록|2015.03.03 11:28 수정|2015.03.03 11:28

▲ <로빈훗>에서 길버트를 연기하는 박진우 ⓒ 엠뮤지컬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은 뮤지컬 <로빈훗>의 리처드 왕에게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길버트는 로빈훗이 없는 사이에 바로 앞에 있는 리처드 왕의 등을 칼로 벤다. 리처드 왕을 베는 것도 모자라, 적군의 활을 리처드 왕의 가슴에 꽂고는 왕이 화살을 맞은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기까지 하는 교활한 신하가 박진우가 연기하는 길버트다.

이런 길버트의 교활함에 리처드 왕은 서거하고, 로빈훗은 역모를 꾸몄다는 음모를 뒤집어쓰고 셔우드 숲으로 도망친다. 그동안 달타냥처럼 착한 주인공만 연기해오던 박진우가 첫 악역으로 무대에 올랐는데, 그의 악역 도전이 뮤지컬 팬들에게는 꽤 인상적이다. 주인공을 할 때보다 비중 있는 악역 덕택이었다.

▲ 뮤지컬 <로빈훗>의 한 장면 ⓒ 엠뮤지컬


- 길버트는 왜 로빈훗을 배신할까.
"대본에는 길버트가 왜 로빈훗을 배신하는가에 대한 뚜렷한 이유가 없다. 그래서 연기를 위해서라도 길버트가 로빈훗을 배신하는 이유를 만들어야만 했다. 복잡하게 생각하니 배신하는 이유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간단하게 생각해 보았다. 길버트는 좀 더 높은 위치로 올라서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욕심이 탐욕을 낳았다. 욕심이 욕심을 낳다가 사람도 죽이고 왕의 자리까지 탐내게 된다."

- 길버트에게 존은 어떤 존재인가.
"존은 길버트의 방패막이다. 길버트가 욕심을 챙기기 위해 뜻을 펼치면 주위로부터 길버트가 얻어맞을 확률이 높다. 주위의 비난을 들을 만할 때 길버트는 존을 앞에 내세운다. 바지사장이라고 이해하면 쉬울 듯하다. 겁 많고, 무능할 것 같고, 길버트의 말 한 마디면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 존이다."

- 길버트는 로빈훗이 셔우드 숲에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로빈훗을 공격하기 위해 길버트가 셔우드 숲으로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길버트는 자신의 손으로 적의 피를 묻히기보다는, 적의 피가 포도주처럼 아름답게 여겨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만일 무력으로 셔우드 숲을 쳐들어가 로빈훗의 세력과 맞서면 왕궁의 여론에 길버트가 두들겨 맞을 게 뻔하다. 로빈훗이 셔우드 숲에 숨어 들어간 걸 아는 수준이 아니라, 숲에서 무엇을 하는가를 모두 알고 있음에도 내버려 둔다."

- 길버트는 권력의 최고점에 오른다. 하지만 주위 모든 사람들과 맞서야 해서 외롭다는 느낌도 드는 캐릭터다.
"맨 처음에 든 생각이 외롭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존과 군대, 시녀는 길버트 편이라는 걸 깨달았다. 군대와 시녀는 길버트의 말 한마디면 움직이니까. 길버트에게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알고 난 다음부터는 외롭지 않았다.(웃음)"

▲ 뮤지컬 <로빈훗>의 한 장면 ⓒ 엠뮤지컬


- 2막에서는 주인공인 로빈훗보다 악당인 길버트의 역할이 커 보인다.
"한편으로는 비중이 너무 큰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나중에는 길버트가 존까지 배신한 걸 대놓고 이야기할 정도로 세력이 커진다. 비중이 크다는 건 무거운 옷을 입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중이 큰 옷을 입고 무대에 잘 서는 게 중요하다.

길버트의 비중을 높이기 위해 파고 들어가 보았지만 뚫리지 않는 벽이 있었다. 그 벽이란 첫 악역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삼총사>의 달타냥처럼 착한 역할만 해오다가 악역은 너무나도 생소했다. 마치 비키니를 입는 느낌이었다. 길버트의 어두운 부분을 뮤지컬에 맞춰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동물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호랑이와 사자가 함께 있는 우리에서 하이에나 한 마리가 싸우는 영상이었다. 사자와 호랑이에 비해 하이에나는 엄청난 공격을 당한다. 사자와 호랑이는 하이에나를 물지도 않고 장난감처럼 앞발로만 공격한다. 심한 상처를 입은 하이에나는 마지막 선택을 한다. 자기 배를 물어뜯고는 배에서 나온 창자를 씹기 시작한다.

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길버트라면 저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길버트는 자기가 로빈훗에게 패할 걸 예상하지 못했다. 실패는 있을 수 없다는 완벽한 계산을 했지만 지고 만다. 그러면서도 길버트는 자기 창자를 뜯어먹는 하이에나처럼 자기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비열하게 사는 게 내가 사는 방식이다. 차라리 욕을 하라'는 거다.

마지막에 로빈훗이 길버트를 찌르려고 할 때 마리안이 가로막는다. 막는다고 해서 길버트를 못 찌르겠는가. 하지만 로빈훗은 길버트를 찌르지 못한다. 이런 로빈훗을 보고 길버트는 '거봐, 네 삶은 이런 삶이야. 네가 내 뜻을 따랐다면 함께 영국을 다스렸을 텐데'하고 비웃는다.

길버트라는 캐릭터에 접근할 때, 선배 뮤지컬 배우들과 동료들에게 매달렸다. 상대 배우의 대사를 듣고 내 연기를 맞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버트를 연기하는 데 있어서 잘 듣고 잘 반응하는 게 중요했다. 무대에서 내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반대로 연기가 좋았다는 평을 들었을 때 감사했다."

- 첫 악역이 그렇게나 어려웠나.
"착한 역할이면 예쁘고 아기자기한 연기에 중점을 두면 된다. 하지만 악역은 20kg의 아령을 양손에 들고 있는 느낌만큼 무거웠다. 그 정도의 무게감이 없다면 가볍게 느낄 만한 대사도 많다. 길버트가 어둡다 보니 저만의 유쾌함을 보일 수도 없었다. 우울하게 무대를 올라가서 우울하게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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