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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되거든 산업재해 신청하라고..."

삼성반도체 협력업체 고 손경주, 아들 손성배씨 피해자증언대회에서 증언

등록|2015.03.05 10:18 수정|2015.03.05 11:58

고 손경주 님 아들 손성배 증언 중반도체,전자산업 피해노동자 증언대회 목소리에서 삼성반도체 협력업체에서 일하던 손경주 님을 증언하는 손성배 님 ⓒ 반올림


"오늘은 누가 누가 잘하나 실력을 겨루는 것도 아닌데, 대회라는 이름이 붙은 피해자 증언대회에 와서 불효막심한 제가 아버지 이야기를 합니다."

눈시울이 빨갛게 달아오른 손성배(27)씨가 준비한 원고를 담담히 읽어내려갔다. 지난 4일 오후 2시 서울 정동의 경향신문 별관에서 열린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노동자 증언대회' 자리였다.

손성배씨는 삼성반도체 협력업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2012년 사망한 고 손경주씨의 아들이다. 손경주씨(사망 당시 53살)는 2003년 3월부터 삼성반도체 화성·기흥 공장의 생산설비 유지·보수 업무(PM)를 맡은 협력업체에서 일한 노동자다.

2009년 12월부터 숨지기 전까지 온라인 카페에 일기 써

손씨는 2009년 5월 16일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을 진단받고 항암치료 후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지만 2012년 1월 재발해 7개월 뒤 숨졌다. 그는 2009년 12월부터 숨지기 전까지 온라인 카페에 일기를 썼다.

손씨는 일기에 당시 작업 환경을 상세히 적었다. 화성·기흥 공장에서 새로운 라인을 설치할 때 자신이 유해화학물질에 그대로 노출됐음을 보여주는 글도 있다. 그는 "라인 초기 셋업시에는 FAB 내에 환경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설비가 메이커로부터 도입되어 설치과정에서는 환경안전이 거의 무방비 상태"라고 썼다.

반도체 신규라인을 설치한 직후, 초기 안정화 단계에서는 화학물질이 누출되는 긴급상황이 잦다. 환기시설 같은 클린룸 내부 환경설비도 완전히 갖춰져 있지 않아 현장에서 매일 8시간 이상씩 상주하며 유지보수 업무를 관리·감독하는 손씨에게 악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손씨는 이런 점을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지만, 정작 자신이 살아있을 때는 산업재해를 신청하지 않았다.

"회사와의 의리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챙겨야 한다는 가장의 무게 때문에 반올림에도 연락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내가 잘못되거든 산업재해를 신청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결국 잘못되셨네요."

손성배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관련 유해물질 노출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다. 손경주씨가 남긴 일기도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손경주씨와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어찌된 일인지 다른 증언을 했기 때문이다. 손성배씨는 현재 산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아버지는 저에게 짐입니다. 덮어두고 가기엔 너무나 상세한 기록을 남겨놓고 가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랬습니다. 나는 글로 남긴다. 거짓이 아니기에. 나중에 그런 적 없다고 하는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위해."

손경주씨 일기 '덮어두고 가기엔 너무나 중요한' 기록

고 황유미 8주기 및 반도체 전자산업 산재사망 노동자 합동추모주간반도체,전자산업 피해노동자 증언대회에 증언 중인 김미선(삼성 LCD 근무, 다발성경화증 투병 중) ⓒ 반올림


손경주씨의 일기에는 '덮어두고 가기엔 너무나 중요한' 기록이 있다. 협력업체 직원들이 원청인 삼성반도체로부터 작업지시·명령을 받으며 삼성직원들과 함께 일했다는 점이다.

"실질적인 PM시에는 삼성 현업직원과 협력사직원간에 같이 업무를 수행함, 12라인 초기 SET UP시에는 PM품질 향상을 위하며 협력사 대표는 물론 관리소장도 현장에서 8시간 이상씩 매일 상주하면서 관리 … 관리소장은 인사, 노무, 현장관리와 현장 안전관리 규정도 삼성의 룰을 전적으로 통제받으며"라고 일기에 적혀있다. 

지난 1월 16일 열린 삼성직업병 2차 조정위원회에서, 삼성전자는 협력업체 노동자가 보상대상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보상 자체가 회사에 기여한 것에 대한 보답차원의 위로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협력사 직원은 이직이 잦아 인사나 근태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손경주씨가 남긴 일기를 보면 삼성전자의 주장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삼성반도체 협력업체 노동자가 반올림에 제보한 수는 16명뿐이다. 삼성전자 등 원청에서 근무하다 병을 얻은 사람이 300여 명인 걸 감안하면 매우 작은 숫자다.

공유정옥 반올림 활동가는 "협력업체 노동자에서 직업병이 적은 건 피해가 경미해서가 아니"라며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과정이 원청 직원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점점 더 어려운 일들을 떠맡고 있는 실정"이라고 우려했다.

손성배씨는 아버지가 남긴 기록이 '증거'라고 말했다.

"(삼성이 노동자를) 편하게 쓰려고 하청해 놓고, 이제 와선 책임이 없다고…, 삼성반도체 신규라인을 관리하는 일을 하셨는데 '기여한 게 없다'니 말이 되나요. 게다가 아버지가 남긴 기록도 거짓이라고 하고…, 가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떠들고 다닐 겁니다."

손씨는 아버지가 투병 중일 때 껴안고 울었던 일을 기억했다. 그의 아버지는 "엄마와 동생 앞에서는 울지 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89년 제가 태어나던 날 담배를 끊으셨어요. 산부인과에서 마지막 담배를 태우고 끊었대요. 멋있는 사람이에요. 10km 마라톤도 하시고, 겨울 되면 스키도 타고. 강골이었어요. 요즘에 할아버지들이 유모차 끌고 지나가는 걸 보면 마음이 짠해요. 우리 아버지는 그럴 수가 없잖아요. 제가 손자를 낳았으면 아버지가 많이 좋아하셨을 텐데."

이번 증언대회는 고 황유미 8주기 및 반도체·전자산업 산재사망 노동자 합동추모주간 행사 중 하나로, 2일(월) 삼성뇌종양 피해자 집단 산재신청에 이어 마련되었다. 반올림은 6일(금) 저녁 7시에는 삼성본관 앞에서 추모문화제를 열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아난 님은 반올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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