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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스타킹 한번 신어봤다가... 이 만족감은 뭐지?

[서평] '여성으로 산 남자'의 실험 보고서 <지구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등록|2015.03.07 10:46 수정|2015.03.07 10:46
우리는 태어나면서 의지와 무관하게 성별이 결정된다. 그리고 각각의 성별에 따른 역할과 행동양식을 부여받는다. 자라면서 보고 듣고 배우는 모든 것들이, '남자(혹은 여자)니까 이래야만 한다'는 가치관으로 탈바꿈하여 삶에 녹아든다.

흔히 남자아이에게 파란색, 여자아이는 분홍색 물건을 쥐어주곤 한다. 옷을 입는 방식, 말을 하거나 취미생활도 남녀 구별이 선명한 경우가 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이런 의문을 떠올려 본다.

'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거지?'

1년 넘게 여자로 살아본 남자

▲ <지구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의 표지사진. ⓒ 지식너머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다가 직접 다른 삶을 살아보기로 결정한 사람이 있다. 독일인 크리스티안 자이델이 그 주인공이다. 지독하게도 추운 겨울, 후줄근한 내복을 입는 일에 지친 자이델은 여성용품 코너에서 스타킹으로 눈길을 돌린다. 디자인이 촌스럽고 답답한 내복 말고, 예쁘면서 착용감도 가벼운 스타킹을 신는다면 어떨까 싶었던 것이다.

밴드 스타킹을 구매해서 신어본 자이델은 큰 만족감을 느낀다. 보온성도 더 좋고, 디자인도 깔끔하고, 화장실에서 벗는 일도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 과감한 실행을 통해 고민을 날려버린 그는 '왜 이런 좋은 물건을 여성만 쓸 수 있는 걸까' 하고 스스로 묻게 된다.

그렇게 사소한 의문이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평생 남성으로 살아온 저자는 이를 계기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호기심을 점점 키워간다. 그리고 아내가 멀리 출장을 간 시기에 그는 결심한다. 스타킹 착용 뿐만 아니라 제대로 여장을 하고서 여성의 삶을 체험하기로.

2012년 초부터 2013년까지 자이델은 여성으로 살아보는 '실험'에 뛰어든다. <지구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그가 얻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책이다. '여장'으로 시작된 크리스티안 자이델의 프로젝트는, 화장술과 제모법을 배우고 옷과 구두를 쇼핑하는 것으로 영역을 넓힌다. 여성들만의 모임에 나가서 다양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색다른 일에 뛰어들면서 다른 성별의 삶을 한껏 즐긴다.

1년 넘는 시간 동안 여자로 산 남자. 상상만으로도 이미 짜릿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달라지는 경험을 글로 풀어낸 이 책은 읽는 내내 독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새로운 지식과 감정을 쌓아가는 저자의 모습을 읽다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얻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기발한 실험을 통해 들려주는 자이델의 이야기가 결코 유희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여성의 삶

두근거림으로 시작된 '여성의 삶'은 힘겨운 사건을 겪으면서 위기를 맞는다. 지하철에서 자신의 가슴(비록 탈부착 실리콘이지만)을 훔쳐보는 타인의 시선, 엉덩이를 스쳐가는 술취한 남자의 손, 모욕스러운 발언이 담긴 성희롱까지. 자이델은 남자로 살아갈 때는 거의 겪을 일이 없었던 상황에 자주 놓인다.

"어떤 경우든 내 가슴이 누군가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했다. 지하철이 너무 비좁았다. 특히 남성 트리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급하게 시계를 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고 계속해서 뭔가를 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에 계속해서 나를 곁눈질했다. 나의 신체 일부를, 내 얼굴을. 이따금씩 지하철 안의 다른 여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본문 124쪽 중에서)

충격적인 일화는 어느날 밤으로 이어진다. 늦은밤 귀가길에, 공원 근처를 지나던 자이델은 만취한 남자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느낀다. '설마' 하는 걱정은 '역시나' 싶은 탄식으로 변해가고, 야밤에 힘을 앞세워 자신을 덮치려는 남자의 공격을 받는다. 다행히 여성으로 살아가던 자이델은 곧 당황에서 벗어나, 잊었던 남성성을 다시 되찾고서 '주먹'을 힘껏 날려 상황을 모면한다.

외출할 때마다 마주치는 남자들이 위협으로 다가오는 순간. 일상이 송두리째 공포로 변하는 일을 겪은 자이델은 오늘날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일이 어떤 것인지 실감한다. 상대적 약자라는 이유로 폭력에 노출되고, 편견으로 인한 혐오에도 큰 상처를 받는 일을 겪으면서 말이다. 산부인과에 직접 들러보고, 낯설고 두려운 진료 과정이 주는 느낌도 실감나게 적었다. 이 정도면 여성의 삶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셈이다.

금기를 깬 실험으로 얻은 '인식의 전환'

이렇게 크리스티안 자이델은 '크리스티아네'라는 여성으로 1년이 넘는 시간을 살았다. 잘나가는 작가, 저널리스트로서는 상당히 무모한 도전이었다. '여장'이라는 방법으로 많은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지만, 덕분에 그는 트렌스젠더 등 소수자가 겪는 폭력도 경험했다고 적었다. 그는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것도 아니었고, 그랬다고 해도 잘못된 것이 아니며, 단지 여성성을 더 확장하는 시도일 뿐이었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금기를 깬 실험'으로 저자는 '인식의 전환'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기존의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의식 중에 학습한 성관념의 경계를 벗어나, 사회가 강요하는 역할이 때로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돌아본다.

"나는 평범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습관에서 나오고 순전히 주관적으로 정의된다. 평범과 비범의 경계는 세기, 질, 빈도에 따라 맘대로 이동했다. (중략) 게다가 평범함은 굳는 성질이 있다. 평범함은 극단적이다. 일단 평범한 것으로 인정되면 바로 굳어버린다. (중략) 그러므로 평범함이 바로 차별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본문 238쪽 중에서)

'강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는 남성의 삶, 쉽게 배제되는 차별을 겪는 여성의 삶이 동시에 해방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그러자면 우선 남자와 여자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쩌면 우리가 '차이'만 부각하다보니 서로 멀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여성 안의 남성성과 남성 안의 여성성을 모두 인정하고 공존하는 법을 일깨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자로 살아보니 남자로 살기가 더 싫어졌다. 전통적인 성 역할에 갇혀 신선한 바람을 쐬지 못한 채 작은 우물에서 물장구만 치는 것 같았다. 반면 여자들은 오래전에 벽을 허물고 한계를 넘기 시작했다. 여자로 살아보고 나서야 진짜 남자가 됐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각자의 정체성은 제한된 것만을 허락하는 폐쇄적인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구든지 성별이 주는 사회적 역할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면, 이 책으로 여성의 삶 혹은 남성의 생각을 간접적으로나마 알아보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지구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크리스티안 자이델 씀/ 배명자 옮김/ 지식너머/ 2015.2/ 1만 3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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