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크로키 모델 알바... 성폭력에도 항의 못한 이유
[이것이 알바인생⑫] 1년 동안 겪은 불합리한 일들
지난 1년 동안 나의 아르바이트는 그 이름도 생소한 '누드 크로키 모델'이었다. 시간도 돈도 부족했기에, 다소 생소한 이 알바를 그냥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의 소개로 시작한 이 알바는 2013년 말부터 2014년 11월까지 지속되었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음악과 타이머를 준비하고, 음악이 나오면 옷을 벗고 무대 위에서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의자를 이용해 2~3분에 한 번씩 포즈를 바꾸면 됐다. 시급은 첫 회에 2만 원 수수료 제외하면 1만8천 원, 다음 회부터는 2만5000원~3만5000원(수수료 포함)으로 다른 알바보다 비교적 많았다.
다만 시작 30분 전에 도착해 대기해야 하고, 늦으면 벌금을 제하고 임금이 지급되었다. 대기시간은 임금에 포함되지 않았다. 음악을 준비하기 위해 매월 내야 하는 1만7000원 정도의 유료음악제공 사이트 이용료도 내가 부담해야 했다.
누드 크로키 모델, 시급은 높지만 조건 불합리해
일은 정기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내 전속모델 계약서의 갑(甲)은 ○◯모델협회 회장(주로 선생님이라 불렀다)이었는데, 선생님이 일을 주면 내가 시간을 선택해서 일터로 가는 아웃소싱 형태였다. 가능한 스케줄을 선택해서 일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반면, 일을 하기 위해 대기하느라 다른 일정을 잡을 수 없었고 소득이 불안정했다. 때문에 알바노동을 통해 생계유지를 해야 하는 내 상황에선 알바를 지속할 수 없었다.
누드 크로키 모델 알바의 교육은 일주일에 1~2회 정도로 편성되어 있었다. 교육에 불참할 시 불이익을 주겠다고 직접 얘기하진 않았지만, 교육에 참여해야 보다 많은 일자리를 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월 2회 이상은 참여하려고 했다. 당시 거주하던 지역에서 교육을 받는 장소까지 왕복 4~5시간이 걸렸는데, 교육비는 물론 식대와 교통비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었던 것은 또 아니었다. 타인이 그리는 '나'는 꽤 흥미로웠다. 전문 작가들이 그린 내 모습이 때로는 거울 속 나보다 훨씬 예뻐 왠지 자존감이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나 좋기만 했던 건 아니다. 보기 좋은 피사체가 되기 위한 꾸미기 노동을 강요받거나, 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성적 대상화를 당하기도 해 기분이 상했다.
앞서 말한 꾸미기 노동 강요는 화장과 제모였다. 선생님은 마르든 날씬하든, 어떤 몸도 아름답다고 했지만 얼굴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또 제모는 '매너'라고 했다. 때문에 일하기 전에는 항상 풀 메이크업과 제모를 해야 했다.
성폭력인 줄 알아도 대처하지 못했다, 잘릴까봐
여성노동자에 대한 성적대상화와 성폭력은 어느 노동현장에서나 흔히 발생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경험은 강남 한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겪었다. 수강생들은 중년의 여성들이었고 크로키 선생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30분 크로키 후 10분 정도 휴식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크로키 선생은 나에게 "남자친구 있냐, 없으면 난 어떠냐"고 얘기하며 내 무릎을 손으로 스치듯 만졌다. 그러면서 다른 수강생들에게 "모델 참 예쁘죠? 내 애인하기로 했어요"라고 얘기했다. 압권은 일이 끝나고 나서였다. 그는 내게 "바로 집에 가요?"라고 물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기에 밥이라도 사 주려나 생각하며 "왜요?"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압권이었다.
"아니, 멀리서 왔으니까 쉬다가라고."
나는 당황했지만 아무런 대처도 못하고 그대로 나와 버렸다. 문제제기를 못 한 이유는 간단했다. 잘릴까봐. 우습게도 황당함 이후의 감정은 분노보다도 해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가장 높고 돋보이는 무대에서 조명을 받고 있지만 을(乙)임을, 또 노동현장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직장 내에서 성폭력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대학이나 노동조합에서 열린 반성폭력 교육도 수차례 들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대로 문제제기를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대다수 여성노동자는 노동현장에서 성폭력을 당한다 해도 직접 문제제기와 제재를 하기 어렵다. 의사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당장의 생계유지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동현장에서 발생한 성폭력사건을 공론화하거나 문제제기한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도리어 징계나 직장 내 왕따 등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다. 법정으로 사건을 가져가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재판은 가해자에게 미미한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거나 화해를 권하는 정도에서 끝난다. 그마저도 기각되는 경우도 많다.
성폭력과 성차별에 쉽게 노출되는 알바노동자
한국 사회의 노동구조 최하위층인 저임금 불안정 알바노동자의 경우, 노동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폭력과 차별에 노출되지만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더욱 어렵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발생한 성폭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게 후회된다. 하지만 앞으로 똑같은 일을 당했을 때 제대로 문제제기 할 수 있을까 자문해봤을 때, 그럴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하기 어렵다.
3월 8일 여성의 날이다. 1908년 미국의 여성 섬유노동자들의 투쟁 이후 107년이 지났지만, 여성에 대한 노동현장에서의 차별과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씁쓸한 마음으로 지난 나의 알바 경험을 되돌아보며, 다음 알바에서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음악과 타이머를 준비하고, 음악이 나오면 옷을 벗고 무대 위에서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의자를 이용해 2~3분에 한 번씩 포즈를 바꾸면 됐다. 시급은 첫 회에 2만 원 수수료 제외하면 1만8천 원, 다음 회부터는 2만5000원~3만5000원(수수료 포함)으로 다른 알바보다 비교적 많았다.
다만 시작 30분 전에 도착해 대기해야 하고, 늦으면 벌금을 제하고 임금이 지급되었다. 대기시간은 임금에 포함되지 않았다. 음악을 준비하기 위해 매월 내야 하는 1만7000원 정도의 유료음악제공 사이트 이용료도 내가 부담해야 했다.
누드 크로키 모델, 시급은 높지만 조건 불합리해
▲ 성폭력 없는 일터는 없는 것인가. ⓒ pixabay
일은 정기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내 전속모델 계약서의 갑(甲)은 ○◯모델협회 회장(주로 선생님이라 불렀다)이었는데, 선생님이 일을 주면 내가 시간을 선택해서 일터로 가는 아웃소싱 형태였다. 가능한 스케줄을 선택해서 일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반면, 일을 하기 위해 대기하느라 다른 일정을 잡을 수 없었고 소득이 불안정했다. 때문에 알바노동을 통해 생계유지를 해야 하는 내 상황에선 알바를 지속할 수 없었다.
누드 크로키 모델 알바의 교육은 일주일에 1~2회 정도로 편성되어 있었다. 교육에 불참할 시 불이익을 주겠다고 직접 얘기하진 않았지만, 교육에 참여해야 보다 많은 일자리를 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월 2회 이상은 참여하려고 했다. 당시 거주하던 지역에서 교육을 받는 장소까지 왕복 4~5시간이 걸렸는데, 교육비는 물론 식대와 교통비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었던 것은 또 아니었다. 타인이 그리는 '나'는 꽤 흥미로웠다. 전문 작가들이 그린 내 모습이 때로는 거울 속 나보다 훨씬 예뻐 왠지 자존감이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나 좋기만 했던 건 아니다. 보기 좋은 피사체가 되기 위한 꾸미기 노동을 강요받거나, 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성적 대상화를 당하기도 해 기분이 상했다.
앞서 말한 꾸미기 노동 강요는 화장과 제모였다. 선생님은 마르든 날씬하든, 어떤 몸도 아름답다고 했지만 얼굴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또 제모는 '매너'라고 했다. 때문에 일하기 전에는 항상 풀 메이크업과 제모를 해야 했다.
성폭력인 줄 알아도 대처하지 못했다, 잘릴까봐
여성노동자에 대한 성적대상화와 성폭력은 어느 노동현장에서나 흔히 발생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경험은 강남 한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겪었다. 수강생들은 중년의 여성들이었고 크로키 선생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30분 크로키 후 10분 정도 휴식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크로키 선생은 나에게 "남자친구 있냐, 없으면 난 어떠냐"고 얘기하며 내 무릎을 손으로 스치듯 만졌다. 그러면서 다른 수강생들에게 "모델 참 예쁘죠? 내 애인하기로 했어요"라고 얘기했다. 압권은 일이 끝나고 나서였다. 그는 내게 "바로 집에 가요?"라고 물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기에 밥이라도 사 주려나 생각하며 "왜요?"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압권이었다.
"아니, 멀리서 왔으니까 쉬다가라고."
나는 당황했지만 아무런 대처도 못하고 그대로 나와 버렸다. 문제제기를 못 한 이유는 간단했다. 잘릴까봐. 우습게도 황당함 이후의 감정은 분노보다도 해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가장 높고 돋보이는 무대에서 조명을 받고 있지만 을(乙)임을, 또 노동현장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직장 내에서 성폭력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대학이나 노동조합에서 열린 반성폭력 교육도 수차례 들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대로 문제제기를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대다수 여성노동자는 노동현장에서 성폭력을 당한다 해도 직접 문제제기와 제재를 하기 어렵다. 의사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당장의 생계유지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동현장에서 발생한 성폭력사건을 공론화하거나 문제제기한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도리어 징계나 직장 내 왕따 등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다. 법정으로 사건을 가져가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재판은 가해자에게 미미한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거나 화해를 권하는 정도에서 끝난다. 그마저도 기각되는 경우도 많다.
성폭력과 성차별에 쉽게 노출되는 알바노동자
한국 사회의 노동구조 최하위층인 저임금 불안정 알바노동자의 경우, 노동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폭력과 차별에 노출되지만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더욱 어렵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발생한 성폭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게 후회된다. 하지만 앞으로 똑같은 일을 당했을 때 제대로 문제제기 할 수 있을까 자문해봤을 때, 그럴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하기 어렵다.
3월 8일 여성의 날이다. 1908년 미국의 여성 섬유노동자들의 투쟁 이후 107년이 지났지만, 여성에 대한 노동현장에서의 차별과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씁쓸한 마음으로 지난 나의 알바 경험을 되돌아보며, 다음 알바에서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물감(활동명)은 알바노조 조합원입니다. (알바노조 http://www.alba.or.kr 02-3144-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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