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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하면 사기꾼·신용불량자? 누가 창업하겠나"

[현장] 성년 맞은 벤처기업협회 '잃어버린 10년'... "자긍심 높여달라"

등록|2015.03.18 13:37 수정|2015.03.18 13:37
'창조경제'도 중소·벤처기업인들을 모듬지 못했다. 벤처창업 활성화 대책은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데다 벤처기업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여전히 따가운 탓이다.

3만 개에 이르는 중소·벤처기업들을 대표하는 벤처기업협회(회장 정준)는 17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올해 중점 사업과 20주년 행사 계획을 발표했다.

"중소기업하면 사기꾼 취급... 10여 년간 창업 막아"

지난달 25일 11대 벤처기업협회장으로 취임한 정준 쏠리드 대표와 기자들의 질의응답이 오갈 즈음, 길문종 메디아나 대표가 발언을 자청했다.

23년 전부터 전자의료기기 업체를 경영하고 있는 길 대표는 "10여 년 전부터 중소기업 제조업체에 관한 사회적 인식이 왜곡돼 벤처나 중소기업 창업이 극히 저조했다"면서 "20여 년 전 벤처붐 당시 건실한 기업이 있는 데도 언론이나 정부가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나 잘못된 기업을 지나치게 부각해 중소기업 하는 사람들을 사기꾼처럼 취급하고 각종 규제로 중소기업을 하려는 의욕을 없앴다"고 밝혔다.

길 대표는 "대기업 고용은 5%에 불과하고 매년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는데 지난 10년 (중소·벤처) 창업이 계속됐다면 이런 사태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라면서 "성공한 중소기업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하고 정부에서도 중기인 자긍심을 높여주는 시책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 정준 벤처기업협회 회장이 17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중점 사업과 20주년 행사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 벤처기업협회


실패한 벤처기업인의 재기가 창업보다 더 어렵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준 회장은 "우리나라에서 재기가 어려운 건 융자와 연대보증으로 사업자금을 조달하다 보니 회사가 어려워지면 창업자 개인이 신용불량자가 되기 때문"이라면서 "엔젤 투자와 크라우드 펀딩을 활성화시켜 융자보다 투자를 받아 도전하게 만드는 게 궁극적인 방법"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정 회장은 "사업이 뜻대로 안됐을 때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도 중요하다"면서 "미국 실리콘밸리 창업가들은 평균 2.7회 창업하고 많게는 7번까지도 하는데 실패도 좋은 경험이고, 우리나라가 혁신 역량을 높이고 창조경제로 가는 데 필요한 과정으로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실제 이날 기자간담회에 앞서 사업설명회를 진행한 벤처기업들 가운데는 장흥순 전 터보테크 회장이 창업한 회사도 포함돼 있었다. 장 전 회장은 지난 1998년 보안솔루션업체인 터보테크를 창업한 벤처 1세대로 2000년대 초반 벤처기업협회장을 맡기도 했다.

터보테크는 90년대 IT 벤처 붐 속에 연 매출이 700억 원대에 달하며 승승장구했지만 2000년대 들어 사세가 급격히 기울어 최근 상장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장 전 회장도 지난 2005년 700억 원대 분식회계로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지난해 4월 서강대와 손잡고 LED 조명 업체인 블루카이트로 '재도전'에 나섰다. 

벤처 붐, 도덕적 해이로 내리막... "자긍심 되찾아야"

벤처기업협회가 처음 만들어진 1990년대 후반만 해도 벤처기업 창업 열기는 대단했다. 사업성을 갖춘 신기술이나 인터넷 서비스를 앞세운 신생 업체가 엔젤투자자나 벤처캐피탈에서 창업 자금을 유치한 뒤 코스닥시장에 등록해 수십억 원에서 수백억 원대에 이르는 투자금을 확보하는 '대박 신화'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이른바 '인터넷 거품'이 꺼지면서 창업 열기도 급격히 식었다. 여기에 '사업'보다 '돈'에 매달린 일부 벤처기업인의 도덕적 해이도 한몫했다.

요즘 벤처기업이라고 모두 '벤처(모험)' 사업은 아니다. 벤처기업들 가운데 연간 매출이 1천억 원을 넘는 이른바 '벤처천억기업' 숫자도 2013년 기준 454개에 이르고 매년 40~50개씩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 가운데는 네이버, 넥슨처럼 연매출 1조 원이 넘는 '대기업'도 포함돼 있다.

문제는 이제 막 창업을 시작한 '스타트업'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벤처 생태계 활성화 대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지만 '실적'이 없는 창업 기업들 피부에 와 닿지 않고 있다. 창업기업인들은 신기술을 담보로 사업자금을 대출해주는 신용보증기금(신보)이나 기술보증기금(기보)만이라도 창업자 연대보증을 면제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그 대상자를 엄격히 제한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벤처기업인들도 창업 과정에서 '신용불량자' 신세였음을 스스로 털어놓을 정도였다.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러 온 벤처기업의 글로벌화도 숙제다. 세계 시장에서 알리바바, 샤오미 같은 중국 '벤처'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반면 국내 벤처들은 대부분 국내 시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 회장은 "경제 규모에 비해 세계 시장에서 활약이 미흡하다"면서도 "10여 년 전과 달리 지금 창업하는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고 활약할 수 있게 됐고 젊은이들도 글로벌 시각을 갖고 있는 건 긍정적"이라고 밝혔다.

외국으로 눈돌린 창업 기업들 "국내에선 찬밥"

실제 이날 소개된 벤처기업들 가운데도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린 사례가 많았다. 제이디솔루션은 소리를 원하는 방향으로만 전달하는 '지향성 스피커'가 소말리아 해적 퇴치용으로 사용돼 유명세를 타면서 결국 해외 투자 유치에도 성공했다. 지문, 얼굴 등 바이오 인식 출입 장치를 만드는 슈프리마는 연간 500억 원대 매출 가운데 수출 비중이 70%가 넘는다.

온폐수를 재활용하는 폐수 열회수 설비를 개발한 SNS에너지는 중국 대형 호텔 체인과 대규모 계약을 앞두고 있고, 레저 전문 모바일 커머스인 '할리 팩토리'를 운영하는 레저큐는 지난해 8월 소프트뱅크벤처스에서 투자를 유치했다.

이 가운데는 국내 사업을 발판으로 해외에 진출한 경우도 있지만, 국내 투자자나 기업들이 거들떠 보지 않아 부득이 외국으로 눈을 돌린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날 한 벤처기업인은 "중국은 실리콘밸리처럼 민간 자금이 벤처 기업에 많이 투자되고 있는 반면 정부 자금 융자 비중이 높은 국내에선 창업 기업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면서 "벤처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지 않는 한 국내 창업자들은 대부분 신용불량자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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