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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죽어 나온다는 병원, 제가 한번 가봤습니다

[행복사회 유럽①] 갑작스러운 통풍 재발, 우여곡절 영국병원 체험기

등록|2015.03.23 14:12 수정|2015.06.04 14:56
인천공항을 떠난 지 하루 만에 영국 런던 히드로공항에 도착했다. 남의 땅인데, 초행 길인데, 낯선 유럽에 들어서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잠시나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숙명을 잊고 싶었다. 한국인으로서의 고단한 일상과 무기력한 처지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설사 유럽에 망명한들 온전한 유럽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설픈 세계시민(Cosmopolitan)이나 사해동포주의자 행세를 하고 싶었다. 솔직히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다. 관광이 목적인 여행이 아니라, 유럽인 일상체험, 그리고 자아치유 목적의 여행이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나는 지난 반 세기 동안 한국에서 태어나 내내 한국에서 살아오면서 지치고 상처받은 현대 한국인의 표준이다. 단 며칠만이라도, 그런 현대 한국인의 자아를 위로받을 수 있다면 이번 여행은 성공이다. 이미 백약이 무효인듯 싶은 '한국 화병'의 말기에 이르렀다는 자가진단을 내린 지도 오래다. 그래서 가난한 귀농인 처지이지만 유럽여행이라는 과소비 상품을 구매하는 용단을 내릴 수 있었다.

설사 그 돈으로 한국에서 무엇을 사거나, 어떤 일을 벌이든 그만한 행복감이나 소득을 얻을 수 없다는 계산도 했다. 더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그만큼 나는 절박했다. 그러니 그 돈의 장부상 계정과목은 여행경비가 아니라 차라리 심신 치료비라고 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한국 화병이 유럽까지 따라오다

▲ 얼코트 메디컬센터 ⓒ 정기석


하지만 마음만큼 몸은 편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9시간의 시차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통증마저 밀려왔다. 익숙한 통증이었다. 1년여 만에 통풍(gout)이 재발한 것이다. 평소 만병의 원인은 화병이라고 믿는 편이다. 통풍도 결국 화병이 근본적 원인일 것이다. 자꾸 화가 나니 술도 마시고, 건강도 따로 챙길 겨를이 없는 것이다. 한국의 일상에서는 용케 벗어났으나 한국의 화병이 유럽까지 따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여비를 아끼느라 두바이공항을 경유하는 에미레이트항공을 이용한 게 화근이지 싶다. 좁은 이코노미석에 18시간 동안 묶여 있으니 짜증도 나고 화도 나면서 몸과 발이 탈이 난 것이다. 더 빠르고 편한 직항을 타지 않은 걸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었다. 가난한 여행객에게 직항보다 편도 40여만 원이 더 싼 항공권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상품이니까.

순간 머리는 복잡해지고 마음은 착잡해졌다. 통풍이 뭔가. 바람만 스쳐도 아프다고 해서 통풍이라 부른다.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다. 그런 발로 15박 16일 동안 유럽을 걸어다니는 건 미친 짓이다. 미련한 짓이다. 터무니없는 '미션 임파서블'이다. 나는 자신에게 단호하게 명령했다.

'어서 병원부터 가야만 한다. 최악의 경우 영국박물관이나 내셔널 갤러리를 못 가는 한이 있더라도 병원은 꼭 가야 한다. 통풍약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 아니면 너는 유럽에서 객사한다.'

하지만 곧 당혹스럽고 난감해졌다. 여기는 한국이 아니라 대영제국의 심장, 산업혁명의 본토, 영국의 수도 런던 시내 한복판 켄싱턴(Kensington)이 아닌가. 그것도 예로부터 귀족들과 부자들이 주로 모여 산다는 부촌. 초행의 한국의 촌사람이 이런 곳에서 어떻게 병원을 찾아간다는 말인가. 요행히 물어물어 찾아간들 영국 의사에게 어떻게 증상과 고충을 설명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영어로.

게다가 평소 영국의 의료 시스템에 대한 끔찍한 괴담을 들은 적이 있어 덜컥 겁이 났다. 영국 병원은 모두 국영이고 의사는 공무원이고 치료비는 무료지만 그래서 더 끔찍하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병원에서 치료 한번 받으려면 6개월에서 2∼3년까지도 대기해야 한다는 해외 토픽을.

이게 1948년 도입된 영국의 국민건강보험(NHS) 때문이라고 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한다며 가입자가 보험료를 내지 않고 100% 세금으로 운영된다. 빈부의 격차 없이 아픈 모든 국민은 누구나 공평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모양인가. 거짓말인가. 문제는 의료의 질이라는 비판이다. 제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사망하는 의료사고도 빈발한다. 캐머런 영국 총리조차 영국 의료제도가 끔찍하게 실패했음을 자인할 정도다.

하지만 통풍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유럽을 둘러보려면 영국 병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 스위스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지인이 떠올랐다. 급히 페이스북 메시지로 "아픈 통풍과 위험한 영국 병원으로부터 나를 좀 살려 달라"며 급전을 보냈다. 순간 페이스북이라는 '한계비용 제로'의 아주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개발한 마크 저커버그에게 감사했다.  

▲ 하이스트릿 켄싱턴 ⓒ 정기석


영국의 병원은 끔찍하지 않다, 아름답다

"런던입니다. 영국 등 유럽에서 통풍약을 구하려면 당연히 병원 처방이 있어야겠지요? 몇년 복용하다 지난 1년 안 먹었는데 장시간 비행 불편 때문인지 왼쪽 엄지발가락에 통증이 왔어요. 붙이는 파스로 약간의 진통효과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 약을 먹어야 하는데 방법이 있을지요."

답신은 복음처럼 바로 날아왔다. 나는 다시 한번 페이스북을 개발한 마크 저커버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번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났다.

"일단 호텔에서 방법을 물어보고 약국을 찾아 사정해 보세요. 여행자이며 약이 필요하다고. 혹시 처방전이 필요하면 한국에 도착하여 메일로 보내주겠다고요. 장기복용약인데 잊고 여행을 떠났다고 말씀해 보세요."

나는 스위스의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했다. 마침 호텔에서 가까운 전철역(High Street Kensington) 상가에 약국(Boots-Beauty&Pharmacy)이 있었다. 가는 동안 통풍 'Gout'이라는 단어를 수십 번도 더 되뇌었다. '고우트, 고우트, 고우트…' 약국 문을 들어서면서 나는 최대한 처량한 표정으로 읍소하기 시작했다. 발은 좀 더 과장되게 쩔뚝거렸다.

"그러니까, 에, 또, 마, 여차저차해서, 나는 보시다시피 한국에서 온 여행자다. 유노, 투어리스트, 그런데 여차저차 해서, '고우트' 때문에, 통풍약을 처방전 없이 좀 얻을 수 없겠느냐, 아시다시피 지나가는 여행객이라 병원에 갈 시간도 안 되고, 뭐, 어쩌고저쩌고..."

물론 지난 50년 동안 수험용 말고는 실생활에서는 별로 사용해본 적이 없는 영어보다는 손짓발짓이 훨씬 더 전달력과 호소력이 있었다. 불편한 표정으로 한참을 듣고 있던 약사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처방전 없이는 약을 단 한톨도 줄 수 없다. 그리고 '고우트'가 아니고 '가우트'가 아닌가."

무정하고 야속한 인도계 약사는 영어 발음이 시원치 않다는듯 면박까지 주는 게 아닌가. 빈정과 자존심이 동시에 상한 나는 혼잣말로, 한국어로 투덜거리며 돌아섰다.

"아시아 시민들끼리 이럴 것까지야. 자기도 어차피 영국 표준 발음은 아니면서…."

그 순간 약사가 나를 돌려세웠다.

"병원은 여기서 멀지 않다. 한 정거장 전이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얼코트(Earl Court) 전철역 옆에 얼코트 메디컬센터가 있다. 당신 같은 여행자들이 가면 바로 진료 받을 수 있을 것다."

▲ 아리안족 미녀 의사에게 처방받은 통풍약 '콜히친' ⓒ 정기석


나는 또 영국의 약사가 시키는 대로 얼코트 메디컬센터를 찾아갔다. 영국에서 최초의 공공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됐다는 명소인 얼코드 전철역 옆이라 찾는 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구글지도 검색이면 충분했다. 나는 구글지도를 발명한 천재에게도 아낌없이 경의를 표했다. 일부러 큰 길을 피하고 골목을 통하는 지름길로 찾아갔다. 런던의 골목 풍광과 주로 빨간 벽돌로 건축한 전통주택을 감상하는 여유까지 부리며.

영국 병원은 끔찍하지 않았다. 최소한 여행자인 내가 직접 체험한 영국 병원은 그렇다. 병원 접수창구의 직원들은 친절했다. 병원 의사도 친절했다. 그리고 모두 인도계 영국인들이다. 그것도 전형적인 아리안족 미녀들이다. '고우트'를 '가우트'로 고쳐 발음하기까지 몇 번이나 다시 귀찮게 물어본 것을 빼면 모든 게 순조로웠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면 환급해 준다는 50파운드의 진료비를 지불하고 무사히, 최선의 처방전을 얻을 수 있었다. 통풍약 '콜히친' 25정을 약국에서 받아들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마음도, 몸도 편해졌다. 그리고 영국이, 런던이, 유럽이 좋아졌다. 친절하고 아름다운 여의사의 조국, 인도는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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