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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이런 교장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

등록|2015.03.22 18:23 수정|2015.03.22 18:23
1988년 5월 어느 날. 피아노 학원에 다니며 화려한 선율에 몸을 맡기길 바랐던 어머니의 기대를 과감히 떨쳐 버리고 주산 학원에 열심히 다닌 덕에 한·일 주산·암산 교류전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그 어느 날. '가문의 영광'일 줄만 알았던 내 삶에 '가문의 개망신'이라는 딱지가 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내 고향 대구에서는 2명, 전국에서는 총 8명만 국가대표로 선발되기에 주산 학원의 원장 선생님은 나를 두고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했고, 그 자부심을 학원 광고용 현수막으로 표출했다.

'祝 효목초등학교 6학년 김태완 한·일 주산·암산 교류전 국가대표 선발'

산수(수학) 시험을 치른 후의 동그라미 개수보다 딱지를 보유한 숫자가 더 많았으며 자연(과학) 수업 시간에 머리를 굴린 횟수보다 팽이를 잘 굴릴 묘안을 찾고 있었던 횟수가 더욱 잦았던 나로서는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모범생이 아니라고 해서 다른 공간이나 다른 상황에서 우수한 역량과 자질을 지닌 소년으로 거듭나지 말란 법이 없을 테니 주산 4단, 암산 1단의 빛나는 성적으로 국가대표 명단에 승선했던 것이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생각하면 '태완이는 공부는 못 하지만 주산은 끝내 줘'가 됐을 텐데 학교의 눈으로, 교장의 눈으로 보면 '저렇게 공부 못 하는 아이가 주산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는 것은 말이 안 돼. 아마도 학원 측이 수강생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광고 차원에서 현수막을 걸어 놓은 거 같아'라는 결론으로 다다르는 모양이다. 나의 자질을 의심한, 학원의 의도를 불순하게 파악한 당시의 교장은 전후 상황을 묻지도 않고 급히 학원장을 호출했고 몇몇 교사들을 불러 앉혔으며 나를 암산 시험대에 올렸다.

  '2,559+3,526'
  '6,085'
  '56,992+78,154'
  '135,146'
  '356*889'
  '316,484'

초등학교 6학년생으로서 의기양양하게 '6,085', '135,146', '316,484'라고 말했을 법도 하지만 어른들의 뚫어지는 시선 속에 눈물과 자괴로 점철된 숫자를 읊어댔던 기억이 난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주산 국가대표로 선발될 수는 없을 거라는 교장의 무지몽매함이 한 소년의 자존감을 무너뜨린 것이다. 학교 공부와는 다소 뜻이 맞지 않았지만 내가 흥미를 가지는 곳에서 마음껏 끼를 발산하면 나름의 신세계가 열리리라는 꿈을 산산조각 내었는지 모른다.

유년기에 있어 아픔을 논하자면 그것의 팔할은 당시 초등학교 교장이 선물(?)했다. 성장하여 교사가 된 나로서는 어린 시절의 아픔을 치유할 정신력까지 갖추었고 교장의 판단력 부재가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고 자위도 해보지만 '소년의 상처'는 팩트였다.

안타까운 것은 26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학생들이 '상처'를 받았거나 '상처'를 받을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좁은 땅덩이에서 학연이 중시되고 간판의 논리가 지배하며 수능의 줄세우기가 만연해 있기에 성적지상주의가 당연한 결과물일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교장 역시 성적 향상을 중심축으로 한 학교경영이 불가피하다고 할 것이다. 과연 이 시대가 학교 성적이 뛰어난 학생을 많이 양산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 여부와 관련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교과 성적 향상을 중심축에 두는 것과 교과 성적 이외의 발군의 능력을 존중하는 것과는 별개일 것이다. 또한 성적지상주의의 블랙홀에 함몰되어 있으면 삶에 있어서 소중하게 여겨야 할 낱낱의 가치를 간과하게 되고 그에 따라 다양성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교장들이 많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교장들이 더욱 많이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사실 너머의 진실을 바라보면 왜 훌륭하지 않은 교장들이 더욱 많이 있는지 알게 된다. 교육공무원 승진 규정이나 평정업무 처리 요령 등을 보면 교원들이 어떻게 관리직으로 승진하는지 알 수 있다. 엄청나게 세부적인 항목을 바탕으로 수많은 소수점들의 향연에서 근근히 살아남은 자가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언뜻 보면 연수 성적이 뛰어난 자에게, 연구 실적이 뛰어난 자에게, 도서벽지에 근무한 자에게 점수를 주고 그들을 승진시키는 것이 온당해 보일 것이다. 여기에서 세세하게 나열할 수는 없지만 교육활동과 직·간접적으로 유관한 항목을 바탕으로 각각 점수화하고 취한 점수에 따라 승진 여부가 갈리는데 중요한 것은 이 점수를 얻기 위한 과정 자체가 학생들에게 순수하게 열려 있어야 할 방향과 시간에 배치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승진 프레임에 갇혀 있으면 학생들을 대하는 패턴이 단순화되고 학생들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후 상관관계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도서벽지에 근무하는 교사를 한 예로 들어보자. 교사의 승진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이 보면 사회적 배려 대상자가 많을 법한 공간이나 교육수혜자로서의 권리를 찾기 힘든 외딴 곳에서 가족들과 생이별하며 교육활동에 전념하는 이를 두고 페스탈로치 그 이상의 열정과 혼을 지녔다며 극찬할지 모른다. 하지만 승진 여부 결정에 있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서벽지 지역 근무'에 자신을 맞춘 이들도 적지 않다. 어쨌든 힘든 곳에서 고생스럽게 살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하겠지만 바로 여기서 지적할 부분이 '전후 상관관계'라는 것이다.

교육의 혜택으로부터 요원한 거리에 있는 학생들에게 가진 것 모두 바치리라는 열정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 나름의 제도적·물질적·심리적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단위 학교의 수장이 되어 학생과 학교에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할 사람들이 교육철학과 소신을 갖추려 노력하지 않고 무언가의 보상이 전제로 깔린 상황에서 교육활동이 후행되는 구조가 악순환되고 있다는 것이다. 몇 해 전 학교폭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학교폭력 대비책을 위해 복수담임제가 추진되었는데 학교폭력 예방이라는 본질에 충실한 경우보다 승진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담임 점수를 챙겨가는 수단으로 전락된 경우가 많았으니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교육의 본질적 목표를 잘 수행한 사람들이 관리자로 승진할 것이라는 믿음과는 달리 기계적 잣대에 자신을 최적화한 사람이 승진하기 유리한 구조라는 점. 또한 그 승진 과정에서 학교장이나 교육청의 평가 점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YES맨'으로서의 덕목은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 비합리적인 잣대에 근거한 소수점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정당하지 못한 경쟁 구도가 펼쳐진다는 점 등이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교장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러한 어둠의 터널에 갇혀 있었고 아직도 갇혀 있다. 다만 그들은 터널을 나와 밝은 빛을 마주대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개똥철학이라도 있는 교장이라면 찬반 양론을 바탕삼아 교육 현안을 논해 볼 것인데 교육적 소신은 없이 자기가 살아온 방식대로 학생들에게 '경쟁'을 강요하고 '성적'에 적응하기 쉬운 방법을 찾게 만든다. 미래 사회의 변화 방향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없고 이 시대가, 다음 시대가 요구할 인재상에 대한 치열한 논의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학교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교직원 회의를 개최한다. 거의 모든 시간을 선생님들이 해야 할 일들의 '전달'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학교 다닐 적에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지겹게 들었던 '실내 정숙', '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않기' 등은 모두 교직원 회의를 통해 전달된다. 교사가 해야 할 일이나 학생들이 전해 들어야 할 일 등이 오가는 유의미한 시간이기는 하나 'WHY(왜)' 나 'HOW(어떻게)'가 없다.

우리가 취하고 있는 교육활동이 과연 본질에 부합하는 일인지,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떳떳하게 밝힐 수 있는 일인지, 구시대의 폐습에 얽매여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하면 경쟁에만 익숙해 있고 철학이 없는 그 교장들이 일방향식 전횡 가도를 이미 점령하고 있다. 원칙과 절차, 민주주의를 솔선해야 하고 그 가치를 지켜야 할 학교에서 교직원 모임만 있고 교직원 회의가 있은 지 오래 되었다.

'모임'이 아니라 '회의'로 진화시키기 위해,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드높여야 한다고 강변했던 나 자신에게 쪽팔리지 않기 위해, 손을 번쩍 들고 논거를 대며 상황과 본질에 맞게 떳떳한 교사로서의 장을 더욱 확보하자는 주장을 펼치면 그날부터 싸가지 없는 놈이 된다. 내가 세상을 바꿀 것인지, 내가 세상에 적응할 것인지까지 거창하게 갈 것 없이 학교 사회의 잘못된 부분이나 토론이 필요한 부분에 손을 들지 못하는 것이 과연 교육자로서 옳은 일인지 회의(懷疑)할 때가 많다. 철학 있는 교장이 보인다면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충성을 맹세하고 싶은 까닭이기도 하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자금을 유용하려 신규 교사에게 교장실·행정실의 현황판을 직접 만들라고 지시를 했던 교장. 도서관 리모델링 업체와 유착하여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교장. 교재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신규 교사에게 교무실 전기세가 많이 지출되니 집에 가라는 교장. 본인이 결재를 한 내용임에도 그 사실을 망각한 채 왜 그렇게 일 처리했냐고 교무실에서, 교사와 학생이 있음에도 10원짜리 해학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교장. 오직 SKY의, SKY에 의한, SKY를 위한 열정으로만 가득한 교장. 아! 이런 교장들을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

말이 나왔으니 SKY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군계일학에 대한 인정과 예우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논리가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그들을 위해 다수가 희생당하는 구조를 만들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여 학습력을 제고하는 가운데 상아탑에서 마음껏 자기의 능력을 뽐내려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 기타를 치면서 꿈을 찾는 학생도 있고 그림을 그리면서 꿈을 찾는 학생도 있을 것이며 아직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야간자율학습'이라는 틀에만 가두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들에게 그들의 선택과 권리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지방의 대부분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최선'이라는 이름으로 '최악'의 선택을 강요한다. 최근에만 고3 수업과 진학지도를 4년 내리 맡았던 나로서는, 지방의 어지간한 학교에 갈 학생들은 학교교육과정에만 충실히 하도록 하고 방과 후에는 자기의 다른 모습을 찾아주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학업에 남다른 역량이 있거나 관심을 가진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다른 학생들은 학교의 틀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교육과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적, 가파르게 상승 곡선을 그리며 폭풍 질주하는 일은 거의 없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한데 학업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남다르고 목표의식을 공고히 한 경우에 한해서이다. 나를 두고 나쁜 교사라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막연하게 공수표를 띄우며 희망 고문을 하는 사람이 더 나쁜 선생이라 생각한다.

'나쁜 선생'을 양산하고 조장하는 것이 철학 없는 교장들이다. 오직 SKY만 생각하는 교장들은 말 그대로 오직 SKY다. 모든 학생들을 다 끌고 가야 옳은 교육이려니 포장을 하고 있지만 막상 입시 결과가 나오면 중위권·하위권 학생들의 성적의 향상 폭을 신경 쓰는 교장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마치 공장의 생산실적보고서를 접하는 사장과도 같이 '실적' 같은 실적에만 신경 쓴다. 이러한 교장들은 국민인권위에서 명문대 합격 관련 현수막 게시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을 했음에도 당당하게 정문에 부착하는 것이 엄청난 소신인 양 SKY 숫자와 본인의 능력치를 동일시한다.

학창 시절, 유쾌하면서도 비판의 칼날을 겨누길 소홀히 하지 않았던 영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너거, 교장, 학교장이 영어로 뭔 줄 아나?"
"모르겠는데예."
"문디 자슥들, 프린시팔(principal) 아이가!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교장샘들은 별론가보다 그자?"

교실은 웃음의 도가니탕. '서플'[səpl]로 발음하는 것이 옳은 일일 테지만, 우리의 영어 선생님은 '시팔'[sipal]로 발음하는 용맹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지금껏 학교장들의 행태를 보면 내 학창 시절의 영어 선생님처럼 인위적 발음 교정을 해야 마땅할 것이나 나는 'principal'의 'princ(prince)'에 주목하고 싶다. 이제는 '18'과 이별하고 싶다. 너무나 자주 만나 싫증나는 애인이다. 이제는 prince, 왕자를 만나고 싶다. 우리 교육의 백마 탄 왕자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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