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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금 천만원! '고양이 잡아먹은 오리' 찾아라

[서평] 김근우 장편소설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등록|2015.03.23 15:08 수정|2015.03.24 09:36

▲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표지 ⓒ 나무옆의자

가끔 기르던 고양이나 개에게 유산을 물려주었다는 외국의 소식을 접한다. 자식이 있어도 일 년에 두어 번 얼굴을 보고, 외국에 나가 있으면 부모의 부고를 접하고 나서야 장례를 위해 고국을 찾는 경우도 흔한 현대니, 늘 곁에 있어주는 개나 고양이가 자식보다 더 애틋할 수도 있겠다. 만일 고양이가 서로 파탄 난 인간관계를 회복하게 만들었다면 고양이에게 유산을 물려줘도 아깝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김근우 장편소설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는 세계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수상자 김근우의 이력이 좀 남다르다. 하반신 신경계 이상으로 서울 근교를 벗어난 적이 없으며 아홉 번의 수술을 받았고, 하이텔, 나누우리 등 PC통신을 통해 소설을 연재하고 출간을 해 판타지 소설의 효시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는 불광천 변 아파트에 홀로 사는 노인이 호순이라는 고양이를 잃어버리고,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찾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할 사람을 구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삼류 소설가로 방세마저 밀려 있는 '나'는 불광천 변에 붙어 있는 전단지를 보고 노인에게 전화를 건다. 일당 오만 원을 제시한 노인의 요구는 불광천 변의 오리들을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담아 오라는 것이다.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 호순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찾아 잡아오면 천만 원의 포상금을 주겠다는 약속도 덧붙인다.

수중에 있는 단돈 4264원이 전 재산인 나는 불광천 변을 따라 오리 사진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담는 일을 시작한다. 먼저 일을 시작한 여자를 만나 함께 일을 한다. 나와 여자는 치매 걸린 노인의 돈을 받아 챙긴다는 양심의 불편함을 감지하지만 서로 묵인한다. 얼마 뒤 노인을 찾아온 손자 꼬마도 오리를 찾는 일에 동참한다.

소설 속에는 사람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나, 여자, 노인, 노인의 손자 꼬마, 노인의 아들은 모두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익명의 존재들이다. 이들은 모두 가짜와 진짜의 경계에 선 사람들이며 관계의 단절 속에 가면을 쓰고 가상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을 오가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표상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는 도시 변방에서 경계인으로 사는 이들의 고달픈 삶, 가족 관계의 벽이 허물어지고 돈으로만 가느다란 관계의 끈을 이어놓은 채 사는 고독한 노인의 삶이 씁쓸하게 그려져 있다.

노인이 찾고 싶어 한 것은 오리도 고양이도 아니었다

삼류 소설가인 나는 끝까지 글쓰는 작업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식을 하다 파산한 여자는 중형 아파트 주인이 되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돈을 모두 탕진한 아버지가 여전히 할아버지의 돈을 탐내는 것을 아는 꼬마는 영악하지만 순진한 구석도 있다.

노인은 자신이 평생에 걸쳐 모은 돈을 모두 탕진한 아들 며느리와 관계를 단절한 채, 고양이를 가족 삼아 외로운 여생을 살아간다. 노인의 아들은 노인의 돈에만 관심이 있다. 노인의 아들은 노인에게 남아 있는 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지만 노인과 관계를 회복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로 시작한 노인과 나와 여자와 꼬마는 어느덧 청소를 해주고 함께 밥을 먹기도 하는 기묘한 가족 비슷한 관계를 맺어간다.

사실은 노인도, 노인의 아들과 손자도, 나와 여자도,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와 여자와 꼬마는 노인을 위해, 노인의 아들은 노인이 건 포상금을 위해 가짜를 만들어내기로 한다. 나와 여자와 꼬마는 수소문을 해 노인이 기르던 고양이와 닮은 고양이를 찾아 노인에게 가져다준다. 노인의 아들은 천만 원의 포상금을 위해 고양이를 잡아먹었다는 가짜 오리를 구해 노인에게 가져다준다. 노인은 오리와 고양이와 새로운 동거를 시작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노인에게 일당을 받던 기묘한 아르바이트는 끝이 난다.

익명으로 시작한 가짜와 진짜의 경계에서 만난 노인과 나와 여자와 꼬마는 익명이 아닌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새로운 관계의 끈을 이어간다. 그것은 아직은 사람을 대신할 수 없는 관계의 중요성, 아직은 사람들에게 물질의 유혹을 넘어서는 사람을 연민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희망의 증거가 아닐까.

어쩌면 노인은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를 찾고 싶던 것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같이 밥을 먹을 친구 같은 사람을 원한 것인지도 모른다. 익명이 아닌 그들은 서로 이름을 불러주며 꽃이 되고 의미가 되어 빛나는 존재가 될 테니 말이다.

"우리는 아직 이름도 모르는데."
"그러게요."
"그게 뭐가 문제예요? 이름을 밝히면 되지. 그럼 저부터. 제 이름은…."

꼬마가 가슴에 손을 척 얹고 무슨 선언이라도 하듯 이름을 댔다. 그 다음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여자가 무슨 기밀문서라도 펼치듯 자신의 이름을 댔다. 노인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노인은 얼마 전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와 오리 사진을 찍다가 불쑥 자기의 이름을 발설했다. 자기 이름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노인은 우스꽝스러운 이유를 갖다 댔다.

"난 이름이 있는데 저놈들은 아직 없잖나. 자네들이 쟤들 이름 짓는 걸 도와주었으면 해서."

여기에 우리의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겠다. 고양이와 오리가 결국 어떤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도. 우리가. 고양이와 오리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제 이름을 갖고 있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중
덧붙이는 글 <고양이를 잡아먹은 오리> 김근우 씀, 나무옆의자 펴냄, 2015년 3월, 272쪽,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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