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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로 뜨려고 환장' 이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10만인리포트-아름다운 만남②] <콩나물신문> 한효석 이사

등록|2015.03.30 19:23 수정|2015.03.31 10:40
- 1편에서 이어집니다.

"아이쿠……."

유쾌했던 <콩나물신문> 한효석 이사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목이 메여 아무 말도 못했다. 그의 젖은 눈을 보니 흰자위가 벌겋게 충혈 됐다. 충격적인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뜻이다.

그는 지난해 8월 자신이 운영하는 음식점에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면 그 날과 그 다음날 부대찌개를 공짜로 제공하겠다'는 대형 현수막을 내걸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는 당시 그를 인터뷰했다. 지난 17일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아름다운 만남>에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말문이 막힌 것이다.

▲ <담쟁이문화원> 한효석 원장. ⓒ 권우성



"내가 교사였기에……. 아마도 평교사들도 그래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교사로서의 아픔, 자식 키우는 부모로서의 아픔 때문에 힘들었다. 어떤 식으로든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 '당신들을 지지한다', '힘들어도 함께 갑시다'라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되면 공짜, "이번엔 진실을 인양하라"

- 실제로 현수막을 보고 찾아온 손님들이 있었나?
"기사는 엄청 많이 본 것 같은데, 실제로 오신 분은 3, 4가족뿐이었다. '뜨려고 환장 했구나', '이런 식으로 가게 홍보하는 구나'라는 반응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90%가 내 뜻을 알아주는 것을 보면서 네티즌들이 그래도 건강하구나라고 느꼈다."

- 1주기를 앞두고 있다. 현수막을 내걸 예정인가?
"지난번 걸었던 현수막이 열흘 뒤에 태풍에 찢겨 나갔다.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는데 다시 만든다면 '진실을 인양하라'는 문구가 좋을 것 같다."

▲ 부천 담쟁이문화원 한효석 대표가 운영하고 있는 식당 외벽에 '수사권, 기소권이 있는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면 그 날, 그 다음날 부대찌개 공짜!'현수막이 걸려있다 ⓒ 양주승


그가 <오마이뉴스>에 등장한 일은 그 전에도 있었다. 변창기 시민기자가 쓴 "기사만 보고 후원금을... 천사가 나타났습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다. 그가 변 기자에게 1년 동안 매월 50만 원의 후원금을 전달한 주인공이다.

"<오마이뉴스> 기사로 오르기도 했지만 다음 카페에서 변 기자의 글을 오랫동안 읽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으로 있다가 해고당한 그 분이 어떻게 애를 키우고 있는지를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교과서 살 돈이 없다는 글을 읽다가 부천의 지성수 목사가 운영하는 카페에 글을 올렸다. '그동안 읽었던 글 값이라고 생각하고 1년 동안 매달 만 원씩 30만 원만 도와주자'고.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내가 매달 50만 원씩 도와줬다."   

지역 언론을 만들려고 <콩나물신문>을 창간한 그는 자기 건물도 사실상 지역공동체의 공간으로 내줬다. 이유가 궁금했다.

- 지역신문을 운영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왜 만들었나?
"행복이 키워드다. 20년 동안 교사를 지낸 뒤에 보리밥집을 운영했고 운이 좋아서 돈을 벌었다. 돈을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했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떠올렸다. 양평 지평종합고등학교에서 학생신문을 만들 때와 부천 시민신문에 글을 쓰면서 시민사회단체들과 만났을 때였다. 행복을 다시 찾고 싶었다."

- 어떻게 학생신문을 만들었나?
"1면에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 다른 면에는 백일장에서 상을 탄 뛰어난 글, 맨 끝에도 일반 학생들의 말이 실릴까 말까 하는 신문은 아니었다. 신문을 만들기 전에 교장선생님께 찾아갔다. 학생이 주인인 신문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당신 이름도, 육성회장, 학부모 회장 이름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오케이 했다. 좋은 교장을 만난 거다."

- 학생들의 반응은?         
"주민들도 돈을 댔다. 학교 앞 문방구도 협찬했다. 우표 10장을 후원하신 분도 있고 선생님들도 십시일반 했다. A4용지 8면으로 매월 발행하다가 면수가 늘어났다. 신문이 나온 다음날에는 수업이 안 됐다. 학생들이 서로 '네 이름 나왔다'면서 자기 이름을 찾으면서 좋아했다.

- 어떤 신문이었나?
"신문을 만들면 글을 잘 쓰는 학생들의 잔치가 될 것 같아서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는 그림 기사를 쓰게 했다. 책을 읽고 친구들과 나누고 싶은 좋은 말이 있으면 한 줄 따서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 마디'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신문을 만드는 친구들은 자기 신문이라고 좋아했고 신문에 이름이 난 친구들도 자기 이름을 찾으면서 행복해 했다. 삶에서 주인공이 된 거다. 그때처럼 많은 주민들이 행복할 수 있는 신문을 만들고 싶었다."
       
- 부천시민신문에는 어떻게 참여했나?
"부천에서 퇴임을 했는데, 고정 코너를 연재했다. 그때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을 만났다. 한 건물에 많은 단체가 들어가 있었는데, 함께 점심을 먹으면 그게 연대회의 테이블이었다. 한 단체가 강좌를 열면 다른 단체 회원들이 참가했기에 사람을 모으는 게 어렵지 않았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이 건물 공간을 열었다."

다섯 가게에만 통용되는 '오거리 화폐'

- 공간 운영은 어떻게 하나?
"서민 강좌를 열려고 했다. 동네 사람도 강사로 초빙했다. 부동산을 오래한 사람, 세무사, 노무사 등 생활 강좌를 많이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음악회도 열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그만 뒀다. 수강생들에게 돈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막상 서민들은 먹고 살기 바빠서 안 왔다. 실패한 뒤에 생각해 보니 문제는 나의 허영이었다. 이 공간을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채우려고 했던 거다. 그나마 성공한 것은 협동조합 강좌였다."

- 그럼 요즘은 공간 활용이 달라졌나?
"담쟁이 북카페는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이다. 문화원에 와서 '나, 이렇게 쓸게요'라고 말하면 끝이다. 나도 돈 안 들이고 그 사람들이 채우니 공간이 풍성해졌다. 옥상에 와서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북카페에서 성경공부를 하기도 한다. 웃음치료사가 강좌를 연다. 매주 일정 시간에 사용하겠다는 사람은 1시간에 5천원 독점료를 내야 한다."

- 식당에서는 무슨 일을 하나?
"카운터도 보고 서빙도 한다. 요즘은 장사가 잘 안돼서 애 엄마도 서빙을 돕고 있다."

그의 식당 주변에는 다섯 가게에서만 통용되는 '오거리 화폐'가 있다. 이 역시 한 이사가 제안해서 운영하고 있다. 그의 담쟁이 추억 식당과 2층 담쟁이 북카페 그리고 담배와 복권을 파는 오거리 약대매점, 소담약국, 아주 자동차공업사이다. 이 가게들은 각자 정한 할인 폭을 포인트 형식으로 정해서 오거리 화폐로 돌려준다. 이 화폐는 다섯 가게에서만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요즘 가게에서 쿠폰을 많이 발행한다. 10%를 깎아줄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북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쿠폰을 받아서 담배 가게에 주면 400~500원을 깎아준다. 2년 정도 실험을 하고 있는데 아직 가맹점은 많지 않다. 월 50만 원 규모다. 그런데 협동조합 밥집에서 밥을 먹고 협동조합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동네, 홈플러스와 이마트가 협동조합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상상을 한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니까, 이제 51걸음 뗀 것이다."

공주사대를 졸업한 뒤 경기도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부천에서 10년 동안 교편을 잡다가 퇴직을 했다. 그 기간을 합치면 부천에 머문 지도 23년 됐다는 그는 지역 언론과 금융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 스페인 몬드라곤 마을에서 시작해서 세계 최대의 노동자 협동조합 그룹을 만들어 금융위기를 헤쳐나간 '몬드라곤의 기적'을 부천에서 이뤄 보겠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만남>을 마친 뒤에 1층 그의 식당에서 드러머 윤씨와 함께 5000원짜리 주꾸미 덮밥을 먹었다. 싱싱한 주꾸미가 푸짐하게 나왔다. 참기름을 넣어 비벼 먹으니 그리 맵지도 않은 것이 고소하기까지 했다. 거기에 콩나물 무침을 넣어 먹으니 시원했다. 투박하지만 아삭아삭 씹히는 부천 장삼이사들의 이야기가 듬뿍 담긴 <콩나물신문>처럼. 

그가 헤어지면서 한 말은 이랬다.

"부천이 변하면 대한민국이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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