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누구는 '유상' 누구는 '무상' 제 모교는 싸우고 있습니다

[조선학교에서 배울 권리를⑤] 대를 이어 지켜갈 '조선학교'

등록|2015.03.30 16:21 수정|2015.03.30 16:21
일본 도꾜(도쿄)조선고급학교 졸업생이 쓴 글입니다. 혐한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현지 분위기상 필자를 보호하기 위해 익명으로 글을 싣습니다. 한글 맞춤법과 다른 표기가 있지만 재일동포가 직접 기고한 만큼 그들이 사용하는 표기법을 존중했습니다. [편집자말]
2013년 2월 20일 일본 아베 정부가 고교무상화 제도를 시행하는 성령(省令)을 발표할 때 외국인학교 중 유독 재일조선학교만 배제되자, 일본 교육계와 인권·평화단체들이 이를 '인권차별'로 비판하며 대책기구를 구성하고 항의행동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조선학교에 대한 '무상교육 배제' 처분 취소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에 나섰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되는 날을 맞아 2015년 2월 20~21일, 일본 문부과학성에 직접 의견을 전달하고, 소송에 나선 조선학교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전국통일행동'이 개최됐습니다.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은 이를 계기로 재일조선학교 차별 문제에 대해 돌아보는 기획연재를 시작합니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 속에서 차별받는 동포들의 인권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기자 말

▲ 2014년 6월 도쿄조선고급학교 문화제(학원제) 때 학생들이 제작한 '무상화 T셔츠' ⓒ 도쿄조선고급학교 졸업생 제공


저는 지난 3월 1일, 도꾜(도쿄)조선중고급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저에게 조선사람의 넋을 심어주고 자래워준(자라게 해준) 정든 모교를 떠나면서 지난 3년간의 보람찬 고급학교 학창생활의 나날들이 자꾸만 떠오르군 합니다.

고급학교 시절이라면 누구나 여러 학교들에서 모여온 새로운 동무들과 즐겁게 이야기도 나누고 공부도 하고 축구며 투구(럭비), 조선무용 등 소조활동에서도 청춘의 땀을 흘리는, 그야말로 아름답고 보람찬 추억들로 가슴속에 새겨져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연한 모습일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런 생활을 꿈꾸며 고급학교에 입학한 평범한 녀(여)학생입니다.

사실 저에게 있어서 고급학교에서 누린 3년간의 학창생활은 참으로 보람찬 나날이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희들의 3년간의 학창생활은 바로 '고교무상화' 투쟁과 떼여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생이였던 2010년, 당시 일본 민주당 정권이 내놓은 '고교무상화' 제도가 시행된다는 소식으로 하여 일본 여론이 떠들어댔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민주당 정권이 되면서 일본 사회가 크게 변하는 것이 아닐가.

오늘까지 온갖 차별과 박해 속에 살아온 우리 동포들이 이제야 당당히 배울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는 기쁨과 기대 속에 우리 동포 학부모들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당시 아직은 중학생이여서 구체적인 이야기는 몰라도 우리 학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큰 전진을 이룩하였다는 느낌만은 어린 가슴에도 확실히 싹텄습니다. 그날, 그때 이 무상화 제도의 도입으로 우리 학교와 우리 재일동포들을 겨냥한 새로운 차별의 시작이 되리라고는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직후 어떤 정치가의 한마디(아베 정부의 성령 발표)로 우리의 기쁨은 삽시에 한탄과 실망으로 변하였으며 '고교무상화' 제도에서 조선학교만이 제외되자 우리의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였습니다.즉시 우리 고급학교 선배들은 서명활동에 나섰으며 졸업식 전날에도 가두에 나가 수천 명이나 되는 서명을 모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의원 문부과학위원장이였던 다나까 마끼꼬 의원이 우리 학교를 찾아오셔서 졸업식 련습(연습)을 하는 선배들을 고무하고 격려해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고급부에 입학한 이후 도꾜에서 여러 차례 진행된 전국집회며 시위투쟁,그리고 서명운동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서 진행해온 저희들의 투쟁이였으나, 2013년 2월 20일 일본 정부는 끝내 우리 조선학교만을 무상화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하였습니다.

장기화가 예견되는 일본 정부와의 투쟁, 또한 이에 편승하여 각 지방자치체에서 지급되여 있었던(지급하던) 우리 학교에 대한 보조금의 삭감과 동결 등 우리의 교육권을 옹호하는 이 투쟁에서 더는 답보할 수가 없게 된 지난해 2월, 제가 고급부 2학년 때 드디여 법정투쟁에로 넘어갈 것을 궐기하는 전교집회가 변호단 선생님들을 모시고 우리 학교 체육관에서 진행되였습니다.

일본 정부가 준 권리는 하나도 없다... 모든 권리는 피로써 얻은 것

▲ 조선대학교 학생들의 제안으로 시작된 금요행동 ⓒ 손미희


이 기간 변호단 선생님들은 재판투쟁을 위해 온갖 심혈을 기울여주시였으며, 조선대학교에 다니는 선배들의 발기에 의해 조선대학생과 어머니들이 매주 금요일마다 문부과학성 앞에서 항의투쟁을 벌리셨습니다. 저희들을 위해 시간을 짜아내시여 투쟁을 벌리시는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이 문제의 당사자인 우리 고급학생들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지난 1년 동안 이 투쟁의 당사자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스스로 찾아 정력적으로 활동해왔습니다. 매주 금요일에 진행되는 금요행동에 전교생이 합세하였으며, 작년 6월에 진행된 우리 학교 문화제(학원제)에서는 '승리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재판투쟁의 승리를 기원한 '무상화 T샤쯔(셔츠)'를 만드는 등 다양한 사업을 벌려, 찾아오신 졸업생, 학부모 그리고 일본 손님들에게 우리의 투쟁을 호소하였습니다.

저는 지난 기간에 벌려온 여러 활동을 통하여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였으며 많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무상화 적용을 위하여 정력적으로 활동을 해주시고 따뜻한 성원을 보내주시는 수많은 지지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이 투쟁의 당사자는 바로 우리 조고생(조선고급학교생)들입니다. 저는 이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고 이 투쟁에 더욱 힘차게 떨쳐나서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많은 동포들과 일본 사람들이 저희들을 지지해주시여 함께 투쟁해주십니다.

저희들은 그분들의 마음과, 또한 끝내 무상화 실현을 이루지 못한 채 후배들에게 미안하게 되였다는 말을 남기고 억울하게 졸업해간 선배들의 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러한 마음이 있어 오늘까지 이 투쟁에 적극 나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무상화 적용은 안 되어 있으며 저도 그 아쉬움을 남긴 채 졸업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 시기에 기어이 이 투쟁에 종지부를 찍고야 말 불같은 결심을 안고 달려왔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후배들 앞에서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졸업한 이후에도 계속 이 투쟁의 당사자로서 끝까지 싸울 결심입니다. 그것이 이역 땅에서 오늘까지 우리의 권리를 지키고 떳떳이 살아온 재일동포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1세 분들은 이역 땅 일본에 건너와 우리 학교를 건설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오늘까지 온갖 풍상고초를 헤쳐오시면서 끝내 지켜오셨습니다. 오늘까지 일본 정부가 스스로 우리에게 차례준 권리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권리는 우리 선대들이 투쟁 끝에 피로써 획득해온 것입니다.

우리 재일조선인의 력사(역사)는 바로 투쟁의 력사입니다. 이 투쟁의 력사에 이번에는 저희들이 자욱(자국)을 남겨 기어이 승리를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번 재판투쟁에서도 끝내 이기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으며 승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졸업한 다음에는 후배들이 졸업생들의 뜻을 이어 투쟁에 나서주리라 믿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우리 학교는 민족의 넋을 심어주고 더없이 귀중한 동무들과의 만남을 마련해준 보금자리입니다. 저는 졸업 후 조선대학교에 진학하여 4년 후에는 교원이 되여 우리 학교에 돌아오고 싶습니다. 다음은 제가 귀중한 우리 학교를 지키고 싶습니다. 저는 귀중한 우리 학교를 끝까지 지켜나가겠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