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전날, 아내는 환히 웃었다
[대구 촌놈과 아내 제니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②]
갑상샘은 두 개의 조직이 목에 있는데, 암의 종류와 전이 여부에 따라 두 개를 전 절제(모두 제거)를 해야 하는 경우와 부분 절제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조직을 제거하는 것을 결정하는 부분은 초음파와 세침 검사를 통해 조직의 양성, 악성 여부를 판단한 후 절제 시점에 판단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관련 기사 : 내 삶이 무너져 내린 날).
매쓰(칼)로 하는 수술과 로봇으로 하는 수술 모두 장·단점이 존재했습니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저희는 제법 빠른 시일 내로 수술 날짜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빠듯한 수술 스케줄의 사이의 빈틈을 주치의이신 김 교수님께서 잘 조절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술 전날, 밤을 지새웠습니다
처음 병원에 간 날을 기억합니다. 아내는 힘겨운 그 모든 과정에서 한 번도 눈물을 보이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며 격려해줬습니다. 아내에게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습니다. 2달 동안 각종 검사와 수술 전 필요한 일들을 하는 중에 저는 그해 여름 옥스퍼드 대학에서 열리는 영어 교수법 세미나 유학행을 아내에게 제의받았습니다.
본인의 수술 날짜가 4월이니 "토니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해. 예정된 4월의 앤서니라빈스 시드니 세미나와 6월의 런던의 인생 학교, 7월의 옥스퍼드 대학 영어 교수법 학회 모두 차질 없이 다녀와"라고 제게 말해줬습니다.
저는 아내가 가장 소중했기에 아내의 경과를 지켜보고 그 일들을 추진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병원에서 보내는 하루 하루는 저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내를 응원하러 병문안을 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아픔 속에서 대구의 대학생들이 모여 자신의 꿈과 삶을 나누는 학생들의 미니 TED(미국의 유명한 공개강연)을 기획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병상 옆에서 저는 그 모든 순간들을 기록하며 힘든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긍정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는 제 자신의 이야기를 실천하려 노력했습니다. 수술을 앞둔 전날 간호사가 와서 몇 번이나 링거 놓기를 실패 했습니다. 피부가 너무 하얘 혈관이 보이지 않아 몇 번이나 바늘을 잘 못 꽂은 것입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습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게 웃어 보이는 아내의 모습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라식 수술을 하고 싶다고 몇 차례 제게 이야기했지만 아내의 몸에 어떤 칼도 대는 것이 싫었습니다. 제 스스로가 라식 수술을 하고 눈의 피로감이 심한 편이어서 라식 수술조차 하는 걸 반대했는데 그 소중한 몸에 간호사가 바늘 자국을 내고 있으니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갑상샘 조직을 떼는 수술 전날 저는 6인실 병실의 아내의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밤새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조금 더 편히 쉬게 하기 위해 1인실을 쓰라고 아무리 말해도 아내는 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한 푼이라도 더 아껴야 한다고 6인실을 선택했습니다.
같은 병실에는 위암, 유방암, 신장암 환자가 함께 입원했고 위암 환자 분은 수술을 앞두고 새벽까지 계속해서 가래를 뱉어냈습니다.
고요한 밤과 새벽 잊을만 하면 들리는 다른 환자의 가래 뱉는 소리는 적막감을 깨고 제 고막을 때렸습니다. 다인실에 지내다 보면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두 명의 자녀를 둔 40대 중반의 아주머니는 식당에서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는데 남편은 화물 자동차를 운전하셨습니다. 두 아이는 대학생이었는데 아주머니의 자랑이셨는지 줄곧 그 아픈 몸으로도 자녀 이야기만 나오면 밝게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제게 가장 두려웠던 아내의 수술 전날은 밤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새근히 잠들었고 저는 온 밤을 지새웠습니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며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 수술이었습니다. 아내가 수술실에 들어가고 저는 수술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약 4시간의 수술 시간동안 저는 살면서 느낄 오만 감정을 다 느꼈습니다. 수술 대기실에 있던 전광판에는 있어서는 안 되는 아내의 이름이 있었고, 수술 진행 중이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습니다.
매쓰(칼)로 하는 수술과 로봇으로 하는 수술 모두 장·단점이 존재했습니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저희는 제법 빠른 시일 내로 수술 날짜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빠듯한 수술 스케줄의 사이의 빈틈을 주치의이신 김 교수님께서 잘 조절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술 전날, 밤을 지새웠습니다
▲ 수술을 앞두고 다시 찾은 바닷가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드 넓고 깊은 바다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아픔과 걱정은 자신에게 던져두고 떠나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앞에서 우리는 희망을 마음속에 그렸습니다. ⓒ 추현호
처음 병원에 간 날을 기억합니다. 아내는 힘겨운 그 모든 과정에서 한 번도 눈물을 보이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며 격려해줬습니다. 아내에게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습니다. 2달 동안 각종 검사와 수술 전 필요한 일들을 하는 중에 저는 그해 여름 옥스퍼드 대학에서 열리는 영어 교수법 세미나 유학행을 아내에게 제의받았습니다.
본인의 수술 날짜가 4월이니 "토니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해. 예정된 4월의 앤서니라빈스 시드니 세미나와 6월의 런던의 인생 학교, 7월의 옥스퍼드 대학 영어 교수법 학회 모두 차질 없이 다녀와"라고 제게 말해줬습니다.
저는 아내가 가장 소중했기에 아내의 경과를 지켜보고 그 일들을 추진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병원에서 보내는 하루 하루는 저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내를 응원하러 병문안을 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아픔 속에서 대구의 대학생들이 모여 자신의 꿈과 삶을 나누는 학생들의 미니 TED(미국의 유명한 공개강연)을 기획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병상 옆에서 저는 그 모든 순간들을 기록하며 힘든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긍정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는 제 자신의 이야기를 실천하려 노력했습니다. 수술을 앞둔 전날 간호사가 와서 몇 번이나 링거 놓기를 실패 했습니다. 피부가 너무 하얘 혈관이 보이지 않아 몇 번이나 바늘을 잘 못 꽂은 것입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습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게 웃어 보이는 아내의 모습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라식 수술을 하고 싶다고 몇 차례 제게 이야기했지만 아내의 몸에 어떤 칼도 대는 것이 싫었습니다. 제 스스로가 라식 수술을 하고 눈의 피로감이 심한 편이어서 라식 수술조차 하는 걸 반대했는데 그 소중한 몸에 간호사가 바늘 자국을 내고 있으니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갑상샘 조직을 떼는 수술 전날 저는 6인실 병실의 아내의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밤새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조금 더 편히 쉬게 하기 위해 1인실을 쓰라고 아무리 말해도 아내는 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한 푼이라도 더 아껴야 한다고 6인실을 선택했습니다.
같은 병실에는 위암, 유방암, 신장암 환자가 함께 입원했고 위암 환자 분은 수술을 앞두고 새벽까지 계속해서 가래를 뱉어냈습니다.
고요한 밤과 새벽 잊을만 하면 들리는 다른 환자의 가래 뱉는 소리는 적막감을 깨고 제 고막을 때렸습니다. 다인실에 지내다 보면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두 명의 자녀를 둔 40대 중반의 아주머니는 식당에서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는데 남편은 화물 자동차를 운전하셨습니다. 두 아이는 대학생이었는데 아주머니의 자랑이셨는지 줄곧 그 아픈 몸으로도 자녀 이야기만 나오면 밝게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제게 가장 두려웠던 아내의 수술 전날은 밤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새근히 잠들었고 저는 온 밤을 지새웠습니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며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 수술이었습니다. 아내가 수술실에 들어가고 저는 수술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약 4시간의 수술 시간동안 저는 살면서 느낄 오만 감정을 다 느꼈습니다. 수술 대기실에 있던 전광판에는 있어서는 안 되는 아내의 이름이 있었고, 수술 진행 중이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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