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발전소 사고' 우리는 수습할 능력이 없다
[주장] 나는 왜 '탈핵희망 국토도보순례'에 나섰나
지금 한반도에 수십 기의 핵발전소가 가동되고 있지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고 있다. 하지만 일단 핵발전소 사고가 나면,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된다. 결코 '지금'의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 절박함이 나를 밖으로 내몰았다.
돈과 힘, 풍요와 편리 향한 탐욕의 정점에 핵발전소가 있다
지난해 4월 16일, 우리는 침묵의 참극을 눈으로 생생히 지켜봐야만 했다. 세월호 참사! 의혹과 의문투성이 세월호 참사로 우리의 민낯이 훤히 드러났다. 돈! 우리의 지상 목표였다. 탐욕! 우리 삶의 동력이었다. 참담하지만,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 외면해선 안 된다. 세월호는 바다에 떠다니던 거대한 탐욕 덩어리 그 자체였다.
우리 사회의 모순과 비리의 결집체였다. 탐욕의 정점에 핵발전소가 있다. 돈과 힘, 풍요와 편리에 대한 탐욕 말고는 그토록 위험하고 문제 투성이인 핵발전에 집착하는 이유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 그러니 우리 자신의 변화가 없는 탈핵이라는 세상의 변화는 구호에 불과할 것이다.
탈핵을 위한 기도의 걸음, 자기 성찰의 걸음인 순례가 절실했다. 그렇게, 지난해 6월 30일~7월 15일, 8월 8일~15일 부산 고리에서 대전 유성까지, 올해 2월 1일~11일, 2월 24일~3월 1일 대전 유성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탈핵 희망 국토 도보 순례에 나섰다. 총 41일, 650여km의 여정이었다.
순례는 기도하며 핵발전의 본질을 성찰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핵발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과 정의와 평화에 반하는 기술로 이뤄진다. 핵에너지를 얻기 위한 핵분열로 200여 종의 방사성 물질이 생성된다. 모두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치명적인 물질들이다. 죽음의 재. 방사성 물질들의 반감기는 길게는 수만 년이다. 꺼지지 않는 불. 원래는 자연에 없던 물질들이다. 자연 질서의 훼손. 핵분열로 삶의 토대인 일상 세계의 기본 조건이 파괴돼 버린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선악과를 건드린 것이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죽는다"(창세 1,17) 선악과 이야기는 우리의 근본적인 한계를 알려준다. 우리는 이 한계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결과는 죽음이다.
생태계 근본 원리 정면으로 거스르는 핵발전
핵발전은 거듭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듯, 인간이 만든 모든 것 또한 불완전하다. 모든 기계는 고장나며, 인간은 실수를 한다. 우리는 사고가 나도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만들고 사용해야 한다.
안전하게 살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한계다. 헌데, 핵발전은 인간의 근본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핵발전소 사고를 수습할 능력이 없다. 그 뿐만 아니다. 우리는 죽음의 재, 꺼지지 않는 불을 낳는 핵발전의 일상도 감당할 수 없다.
냉각수로 사용된 후의 온배수, 희석해 배출되는 액체·기체 상태의 방사성 물질, 적어도 10만 년의 보관을 요구한다는 '사용 후 핵연료', 어느 하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핵발전 자체가 이미 치명적인 사고다. 안전한 핵발전소는 없다.
핵발전소는 물리적으로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 차폐돼야 한다. 핵분열로 생성되는 방사성 물질의 치명적 위험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요구는 생태계의 근본 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완전한 단절과 차폐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동시에, 핵발전의 심각한 문제들이 바로 이 단절과 차폐의 요구에서 생겨난다. 핵발전소의 구조적 폐쇄성은 철저한 중앙 통제의 폐쇄적 운영, 비밀 주의의 성행과 같은 핵발전소의 비민주성을 이미 잉태하고 있다. 운용의 투명성과 접근성의 결여로 핵발전소에 대한 신뢰 확보는 불가능해진다.
전기를 원할지언정, 핵발전소 자체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핵발전은 사회적 약자의 희생을 요구한다. 핵발전소는 언제나 바닷가 외진 곳, 힘 없는 주민의 지역에 들어선다. 핵발전으로 주변 생태계는 파괴되고 방사성 물질은 계속 유출된다. 지역 주민은 자립적 생계 수단을 잃고 각종 보조금에 의존하게 되며, 암을 비롯한 각종 질병으로 시달린다.
핵발전소의 전기를 대도시로 보내기 위한 송전탑 건설로 주민들의 삶과 자연 생태계가 파괴된다. 핵발전에는 피폭을 감수하는 노동이 요구되고, 이를 떠맡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핵발전소의 전기는 누군가의 피폭의 대가로 생산된다. 핵발전은 시종일관 폭력적이고 불의하다.
"안전한 핵발전소는 없다", "탈핵만이 희망이다". 탈핵 순례 중 사람들에게 전한 메시지다. 구체적으로는 탈핵을 위한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반복해 말했다. 첫째, 신규 핵발전소 건설(계획)을 전면 중지한다. 둘째, 노후 핵발전소 수명연장을 포기한다. 셋째, 재생 가능 에너지를 확충한다.
이것은 이미 탈핵을 선언한 국가에서 정책으로 채택한 지극히 현실적인 요구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순례 중이던 지난 2월 27일 새벽,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월성1호기 계속 운전을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설계 수명을 마치는 핵발전소의 수명 연장을 계속 밀어붙일 것이라는 끔찍한 전망도 나온다.
당장 내년의 고리1호기 수명 재연장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삼척은 포기하고 영덕에 몰아서라도 신규 핵발전소를 계획대로 짓겠다는 정부의 속내도 보도됐다. 저들은 강하고 집요하다. 핵발전소를 추진하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낙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에선 필요한 변화는 당시의 승리나 성공보다는 패배와 실패를 통해서 이뤄졌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그렇게 필요한 변화를 일궈왔다. 그러니 저들의 힘 앞에서 주눅이 들 이유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할 바를 해나가면 된다. 그러는 사이에, 필요한 변화가 생겨날 것이다.
노후 핵발전소 수명 연장 포기하라
핵 없는 세상을 위한 탈핵, 세상을 바꾸는 운동이다. 세상의 변혁 없이 핵발전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탈핵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뜻한다. 가능할까?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형편 되는대로 자신의 시간을 쪼개 순례의 걸음을 보태준 많은 순례자에게서 세상의 변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읽었고, 거기서 탈핵의 희망을 건져 올렸다. 사회의 불의와 기업의 횡포로 오랜 기간 큰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탈핵 행보에 기꺼이 함께 해준 쌍용차와 기륭전자의 해고 노동자들,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심기 위해 순례의 길에 나선 수녀님들, 수사님들, 신부님들, 학교에서 일군 인연으로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즐겁게 함께 해준 아름다운 학생들, 각 지역에서 소중한 마중물이 되어준 많은 시민들. 이 모든 분이 함께 길을 걸으며 탈핵의 희망을 쏘아 올렸다.
아무리 거대해도, 탐욕을 향한 세상의 질주에 우리의 삶을 그저 내맡겨버릴 순 없다. 그러기엔, 우리 하나 하나의 삶이 너무나 소중하다. 자기 성찰이 따르는 탈핵 행보는 세상의 흐름에서 한 번뿐인 소중한 내 삶을 반듯하게 지켜줄 것이다. 탈핵! 소유와 탐욕의 삶에서 검약과 절제의 삶으로 옮기는 것이다. 나만을 생각하는 무분별한 소유와 탐욕의 삶, 갈등과 대립을 피할 수 없다.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상대를 배려하는 검약과 절제의 삶, 평화가 깃든다.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 탈핵. 생명과 평화의 길이다.
돈과 힘, 풍요와 편리 향한 탐욕의 정점에 핵발전소가 있다
▲ 탈핵희망 국토도보순례 ⓒ 삼척평화
지난해 4월 16일, 우리는 침묵의 참극을 눈으로 생생히 지켜봐야만 했다. 세월호 참사! 의혹과 의문투성이 세월호 참사로 우리의 민낯이 훤히 드러났다. 돈! 우리의 지상 목표였다. 탐욕! 우리 삶의 동력이었다. 참담하지만,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 외면해선 안 된다. 세월호는 바다에 떠다니던 거대한 탐욕 덩어리 그 자체였다.
우리 사회의 모순과 비리의 결집체였다. 탐욕의 정점에 핵발전소가 있다. 돈과 힘, 풍요와 편리에 대한 탐욕 말고는 그토록 위험하고 문제 투성이인 핵발전에 집착하는 이유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 그러니 우리 자신의 변화가 없는 탈핵이라는 세상의 변화는 구호에 불과할 것이다.
탈핵을 위한 기도의 걸음, 자기 성찰의 걸음인 순례가 절실했다. 그렇게, 지난해 6월 30일~7월 15일, 8월 8일~15일 부산 고리에서 대전 유성까지, 올해 2월 1일~11일, 2월 24일~3월 1일 대전 유성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탈핵 희망 국토 도보 순례에 나섰다. 총 41일, 650여km의 여정이었다.
순례는 기도하며 핵발전의 본질을 성찰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핵발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과 정의와 평화에 반하는 기술로 이뤄진다. 핵에너지를 얻기 위한 핵분열로 200여 종의 방사성 물질이 생성된다. 모두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치명적인 물질들이다. 죽음의 재. 방사성 물질들의 반감기는 길게는 수만 년이다. 꺼지지 않는 불. 원래는 자연에 없던 물질들이다. 자연 질서의 훼손. 핵분열로 삶의 토대인 일상 세계의 기본 조건이 파괴돼 버린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선악과를 건드린 것이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죽는다"(창세 1,17) 선악과 이야기는 우리의 근본적인 한계를 알려준다. 우리는 이 한계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결과는 죽음이다.
생태계 근본 원리 정면으로 거스르는 핵발전
핵발전은 거듭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듯, 인간이 만든 모든 것 또한 불완전하다. 모든 기계는 고장나며, 인간은 실수를 한다. 우리는 사고가 나도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만들고 사용해야 한다.
안전하게 살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한계다. 헌데, 핵발전은 인간의 근본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핵발전소 사고를 수습할 능력이 없다. 그 뿐만 아니다. 우리는 죽음의 재, 꺼지지 않는 불을 낳는 핵발전의 일상도 감당할 수 없다.
냉각수로 사용된 후의 온배수, 희석해 배출되는 액체·기체 상태의 방사성 물질, 적어도 10만 년의 보관을 요구한다는 '사용 후 핵연료', 어느 하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핵발전 자체가 이미 치명적인 사고다. 안전한 핵발전소는 없다.
핵발전소는 물리적으로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 차폐돼야 한다. 핵분열로 생성되는 방사성 물질의 치명적 위험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요구는 생태계의 근본 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완전한 단절과 차폐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동시에, 핵발전의 심각한 문제들이 바로 이 단절과 차폐의 요구에서 생겨난다. 핵발전소의 구조적 폐쇄성은 철저한 중앙 통제의 폐쇄적 운영, 비밀 주의의 성행과 같은 핵발전소의 비민주성을 이미 잉태하고 있다. 운용의 투명성과 접근성의 결여로 핵발전소에 대한 신뢰 확보는 불가능해진다.
전기를 원할지언정, 핵발전소 자체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핵발전은 사회적 약자의 희생을 요구한다. 핵발전소는 언제나 바닷가 외진 곳, 힘 없는 주민의 지역에 들어선다. 핵발전으로 주변 생태계는 파괴되고 방사성 물질은 계속 유출된다. 지역 주민은 자립적 생계 수단을 잃고 각종 보조금에 의존하게 되며, 암을 비롯한 각종 질병으로 시달린다.
핵발전소의 전기를 대도시로 보내기 위한 송전탑 건설로 주민들의 삶과 자연 생태계가 파괴된다. 핵발전에는 피폭을 감수하는 노동이 요구되고, 이를 떠맡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핵발전소의 전기는 누군가의 피폭의 대가로 생산된다. 핵발전은 시종일관 폭력적이고 불의하다.
"안전한 핵발전소는 없다", "탈핵만이 희망이다". 탈핵 순례 중 사람들에게 전한 메시지다. 구체적으로는 탈핵을 위한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반복해 말했다. 첫째, 신규 핵발전소 건설(계획)을 전면 중지한다. 둘째, 노후 핵발전소 수명연장을 포기한다. 셋째, 재생 가능 에너지를 확충한다.
이것은 이미 탈핵을 선언한 국가에서 정책으로 채택한 지극히 현실적인 요구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순례 중이던 지난 2월 27일 새벽,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월성1호기 계속 운전을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설계 수명을 마치는 핵발전소의 수명 연장을 계속 밀어붙일 것이라는 끔찍한 전망도 나온다.
당장 내년의 고리1호기 수명 재연장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삼척은 포기하고 영덕에 몰아서라도 신규 핵발전소를 계획대로 짓겠다는 정부의 속내도 보도됐다. 저들은 강하고 집요하다. 핵발전소를 추진하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낙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에선 필요한 변화는 당시의 승리나 성공보다는 패배와 실패를 통해서 이뤄졌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그렇게 필요한 변화를 일궈왔다. 그러니 저들의 힘 앞에서 주눅이 들 이유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할 바를 해나가면 된다. 그러는 사이에, 필요한 변화가 생겨날 것이다.
노후 핵발전소 수명 연장 포기하라
▲ 후쿠시마 원전사고 4주기를 맞아 지난 3월 14일 오후 경북 영덕군에서 열린 탈핵행진에서 시민들이 탈을 쓰고 행진하고 있다. ⓒ 조정훈
핵 없는 세상을 위한 탈핵, 세상을 바꾸는 운동이다. 세상의 변혁 없이 핵발전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탈핵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뜻한다. 가능할까?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형편 되는대로 자신의 시간을 쪼개 순례의 걸음을 보태준 많은 순례자에게서 세상의 변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읽었고, 거기서 탈핵의 희망을 건져 올렸다. 사회의 불의와 기업의 횡포로 오랜 기간 큰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탈핵 행보에 기꺼이 함께 해준 쌍용차와 기륭전자의 해고 노동자들,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심기 위해 순례의 길에 나선 수녀님들, 수사님들, 신부님들, 학교에서 일군 인연으로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즐겁게 함께 해준 아름다운 학생들, 각 지역에서 소중한 마중물이 되어준 많은 시민들. 이 모든 분이 함께 길을 걸으며 탈핵의 희망을 쏘아 올렸다.
아무리 거대해도, 탐욕을 향한 세상의 질주에 우리의 삶을 그저 내맡겨버릴 순 없다. 그러기엔, 우리 하나 하나의 삶이 너무나 소중하다. 자기 성찰이 따르는 탈핵 행보는 세상의 흐름에서 한 번뿐인 소중한 내 삶을 반듯하게 지켜줄 것이다. 탈핵! 소유와 탐욕의 삶에서 검약과 절제의 삶으로 옮기는 것이다. 나만을 생각하는 무분별한 소유와 탐욕의 삶, 갈등과 대립을 피할 수 없다.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상대를 배려하는 검약과 절제의 삶, 평화가 깃든다.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 탈핵. 생명과 평화의 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조현철 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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