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왜 이렇게 살았지?'... 쿨하게 사표 썼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알려준 인생의 '행복'
4월 3일. 오늘부로 3108일을 다녀온 직장을 그만둔 지 한 달이 지났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에는 한 달 한 달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기 일쑤였는데 새로운 환경에서 지내온 이번 1개월은 1년을 살아온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월 마감보고를 하고 돌아서면 또 마감 준비를 해야 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계속된 일상에 익숙해져 새로운 도전이나 열정 따위는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모두가 먹고 살기 위해 모여 있는 직장이라는 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보다는 '정치'에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면 으레 서로를 깎아내리기 위해 혈안이 돼 살아왔다.
19세 어린 나이에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또래 친구들이 대학을 다니며 캠퍼스의 낭만을 누릴 때에도, 군대에 가서 힘들게 나라를 지킬 때도, 단 한 순간도 쉴 새 없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어릴 적부터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온 터라 가끔 쉬어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더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게 독하게 살아왔기 때문이었을까. 2013년 가을, 매년 받는 건강검진에서 난 '갑상샘암' 진단을 받았다.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갑상샘'이라는 것이 우리 몸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나였기에 그 충격은 더 크게 다가왔다. 거기에 70세가 훌쩍 넘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터라 자식이 '암'에 걸렸다고 했을 때 받을 어머니의 충격이 두려워 그마저도 오롯이 혼자 견뎌내야만 했다.
혼자 병원을 다니며 검사를 받고 수술받을 준비를 했다. 병원 선택부터 치료 방법까지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해야 했다. 이 순간들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다. 수술 일정을 잡고, 입원을 하기 위해 캐리어에 짐을 챙길 때의 기분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를 게다.
'출장 간다'고 해놓고 수술을 받다
어머니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에 출장을 가게 됐다고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섰다. 그 길로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받고, 퇴원했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는 자식의 병도 모르고 친구들과 놀러 다녔던 자신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얻은 병마저도 어머니께는 불효라는 사실에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와 함께 나도 울어버렸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내 방. 어쩌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던 방에 들어왔을 때의 감동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감동적이었다. 이때였는지 모르겠다. 인생의 행복이란 게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아무 생각 없이 보내고 있는 1분 1초가, 매일을 살고 있는 하루하루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가장 소중한 순간이고 행복이라는 것을.
갑상샘암 종양의 크기가 아주 컸고 주변 림프절로 전이도 돼 있는 상태라 나는 갑상샘 조직 전체를 다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동시에 림프절 청소술을 통해 전이가 의심되는 림프절 24개를 함께 제거했다.
이것으로도 안심을 할 수 없어서 수술을 받은 뒤 3개월이 지나 방사성요오드 치료도 받았다. 그 치료는 수술보다 더 힘들었다. 이렇게 병마와 싸우는 바람에 다니던 직장에 병가를 내게 됐고, 그로 인해 태어나 처음으로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동안은 정말 마음 편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병마와 싸우며 조금은 여유로운 생활을 하던 그 3개월. 멀리 했던 책도 읽고 몸을 생각해서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리고 어느새 부쩍 늙어버린 어머니와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내 인생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난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도 악착같이 살아온 건가.'
복귀한 회사... 나는 다른 사람이 됐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내가 가진 건 별로 없었다. 매달 통장에 꽂히는 몇백만 원의 월급과 '대기업 사원'이라는 타이틀.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그게 뭐라고…. 그 대기업이 내 것도 아닌데, 괜스레 그것 때문에 다른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온 내 자신이 한심했다.
3개월의 시간동안 내 인생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새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동안은 돈을 벌기위해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 내 꿈을 저 깊은 곳에 꾹꾹 숨겨 놓은 채 다른 사람들의 꼭두각시로 살아왔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가슴에 열정을 품고 직장으로 복귀했다.
직장으로 복귀했을 때 내 모습은 그 전과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내 마음은 복귀를 하던 시점부터 회사로부터 이미 떠나버린 것 같았다. 복귀하고 1년 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내 머리와 마음은 계속 새로운 인생에 대한 갈망을 이어갔다. 모든 정신이 그쪽에 집중됐다. 그러다 보니 새 인생을 구상할 나만의 개인 시간이 필요했다. 예전 같으면 퇴근시간이 지나도 상사나 동료들의 눈치를 보며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제시간에 퇴근했지만 내가 맡은 업무와 관련해 단 한 번의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들 담배 피우고 차 마시며 밖에 나가는 시간에 업무에 더 집중했다. 그리고 점심시간, 자투리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책을 보는 데 할애했다. 그렇게 나는 차근 차근 제2의 인생을 준비했다.
내 나름대로 직장과 내 인생의 균형을 맞추고 미래를 설계한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대한민국에서 대기업이라는 조직은 그런 나를 탐탁지 않아 했다. 눈치 안 보고 제시간에 퇴근하는 것도 싫어했다. 나는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노는 이기적인 사원이 돼버렸다. 그렇게 나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점점 와전됐고, 내 의도와는 다르게 나에게 돌아오는 뒷담화들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평점심을 유지하면서 나의 갈 길을 가리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다 무시하고 있기에는 조직 내 자리가 너무 불편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에 반응하는 나를 발견하게 됐고, 그런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내 갈 길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나는 8년간 다녀온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정확히 3108일 다닌 정든 회사. 그만두고 나오는 그 순간까지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분명 내 인생에 있어 많은 영향을 끼친 곳임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직장을 떠나는 나를 보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버티지 못하고 튕겨져 나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퇴사하면서도 그 조직에서 가십거리가 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면 어디든 있는 일이니 이제는 그 가십에서 벗어나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리라 마음 먹었다.
퇴사 한 달 째... 비로소 나를 찾아가고 있다
학창 시절부터 직장 생활을 해오기까지 수십 년.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왔건만 나는 결국 저녁형 인간이었다. 나는 당분간 내 방을 사무실로 쓰기 위해 정리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랍장에서 내가 학창시절 때 받은 상장들을 발견했다. 상장 속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모든 상장이 글짓기 대회에서 받은 상들이었고, 직장에 다닐 때에도 메일이나 보고서를 쓰는 내 역량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스스로 잊고 살았지만, 글을 쓰는 게 좋았다. 또, 나는 그걸 잘하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봤다. 그속에 나는 장기가 많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걸 좋아했다. 맞다. 나는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 음악을 해서 먹고 살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현실에 부딪혀 마음 속 깊은 곳에 꿈을 묻고 살았다. 단지 취미로 컴퓨터로만 깨작되던 나의 음악들. 이제 좀 더 깊이 있게 음악을 해보기 위해 아직 다룰 줄도 모르지만, 미디 악기들을 장만했다. 박진영의 말대로 '나는 딴따라'다. 음악을 만들고 듣고 부르는 게 좋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 누군가 내게 '당신의 꿈이 뭔가요?'라고 물어오면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청년들이 나와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 나도 어릴 때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간절히 갈망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곧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그 꿈을 가슴 속에 묻고 산다.
만약 당신이 이번 주까지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해보시라. 그럼 어떻게 살겠는가? 여느때처럼 금요일까지 출근해서 상사 눈치 보고, 야근하고, 지친 몸으로 퇴근해서 주말 이틀 동안 집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잘 텐가.
내 주변 사람들에게 꿈을 이루기 위해 뭔가를 선택하고 실행하라고 말하면 되돌아오는 대답 중 9할은 "그럼 당장 뭐 먹고 사니?"일 게다. 맞다. 당장 월급이 끊기면 힘들겠지. 하지만 그 월급은 언젠가는 끊긴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간에 '실행'을 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이뤄낼 수 없다. 직장을 떠난 지 한 달밖에 안 됐지만,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난 월급이 끊긴 1개월 동안 '절망'이 아닌 '희망'을 봤다.
나를 꼭두각시 노예로 만드는 월급이 없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고, 그 일을 즐길 수 있다면 분명히 그 일로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 하물며 평생 직장 생활만 해온 내가 이렇게 시민기자가 돼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상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께 감히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이여 꿈을 꿔라! 그리고 나가자. 더 큰 세상으로!
월 마감보고를 하고 돌아서면 또 마감 준비를 해야 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계속된 일상에 익숙해져 새로운 도전이나 열정 따위는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모두가 먹고 살기 위해 모여 있는 직장이라는 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보다는 '정치'에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면 으레 서로를 깎아내리기 위해 혈안이 돼 살아왔다.
19세 어린 나이에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또래 친구들이 대학을 다니며 캠퍼스의 낭만을 누릴 때에도, 군대에 가서 힘들게 나라를 지킬 때도, 단 한 순간도 쉴 새 없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어릴 적부터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온 터라 가끔 쉬어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더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게 독하게 살아왔기 때문이었을까. 2013년 가을, 매년 받는 건강검진에서 난 '갑상샘암' 진단을 받았다.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갑상샘'이라는 것이 우리 몸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나였기에 그 충격은 더 크게 다가왔다. 거기에 70세가 훌쩍 넘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터라 자식이 '암'에 걸렸다고 했을 때 받을 어머니의 충격이 두려워 그마저도 오롯이 혼자 견뎌내야만 했다.
혼자 병원을 다니며 검사를 받고 수술받을 준비를 했다. 병원 선택부터 치료 방법까지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해야 했다. 이 순간들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다. 수술 일정을 잡고, 입원을 하기 위해 캐리어에 짐을 챙길 때의 기분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를 게다.
'출장 간다'고 해놓고 수술을 받다
▲ 링거갑상샘암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옮겨졌을 때 내 팔에는 5가지의 링거가 들어가고 있었다. ⓒ 강상오
어머니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에 출장을 가게 됐다고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섰다. 그 길로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받고, 퇴원했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는 자식의 병도 모르고 친구들과 놀러 다녔던 자신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내가 얻은 병마저도 어머니께는 불효라는 사실에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와 함께 나도 울어버렸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내 방. 어쩌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던 방에 들어왔을 때의 감동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감동적이었다. 이때였는지 모르겠다. 인생의 행복이란 게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아무 생각 없이 보내고 있는 1분 1초가, 매일을 살고 있는 하루하루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가장 소중한 순간이고 행복이라는 것을.
갑상샘암 종양의 크기가 아주 컸고 주변 림프절로 전이도 돼 있는 상태라 나는 갑상샘 조직 전체를 다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동시에 림프절 청소술을 통해 전이가 의심되는 림프절 24개를 함께 제거했다.
이것으로도 안심을 할 수 없어서 수술을 받은 뒤 3개월이 지나 방사성요오드 치료도 받았다. 그 치료는 수술보다 더 힘들었다. 이렇게 병마와 싸우는 바람에 다니던 직장에 병가를 내게 됐고, 그로 인해 태어나 처음으로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동안은 정말 마음 편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병마와 싸우며 조금은 여유로운 생활을 하던 그 3개월. 멀리 했던 책도 읽고 몸을 생각해서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리고 어느새 부쩍 늙어버린 어머니와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내 인생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난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도 악착같이 살아온 건가.'
복귀한 회사... 나는 다른 사람이 됐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내가 가진 건 별로 없었다. 매달 통장에 꽂히는 몇백만 원의 월급과 '대기업 사원'이라는 타이틀.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그게 뭐라고…. 그 대기업이 내 것도 아닌데, 괜스레 그것 때문에 다른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온 내 자신이 한심했다.
3개월의 시간동안 내 인생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새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동안은 돈을 벌기위해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 내 꿈을 저 깊은 곳에 꾹꾹 숨겨 놓은 채 다른 사람들의 꼭두각시로 살아왔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가슴에 열정을 품고 직장으로 복귀했다.
직장으로 복귀했을 때 내 모습은 그 전과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내 마음은 복귀를 하던 시점부터 회사로부터 이미 떠나버린 것 같았다. 복귀하고 1년 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내 머리와 마음은 계속 새로운 인생에 대한 갈망을 이어갔다. 모든 정신이 그쪽에 집중됐다. 그러다 보니 새 인생을 구상할 나만의 개인 시간이 필요했다. 예전 같으면 퇴근시간이 지나도 상사나 동료들의 눈치를 보며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제시간에 퇴근했지만 내가 맡은 업무와 관련해 단 한 번의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들 담배 피우고 차 마시며 밖에 나가는 시간에 업무에 더 집중했다. 그리고 점심시간, 자투리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책을 보는 데 할애했다. 그렇게 나는 차근 차근 제2의 인생을 준비했다.
내 나름대로 직장과 내 인생의 균형을 맞추고 미래를 설계한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대한민국에서 대기업이라는 조직은 그런 나를 탐탁지 않아 했다. 눈치 안 보고 제시간에 퇴근하는 것도 싫어했다. 나는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노는 이기적인 사원이 돼버렸다. 그렇게 나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점점 와전됐고, 내 의도와는 다르게 나에게 돌아오는 뒷담화들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평점심을 유지하면서 나의 갈 길을 가리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다 무시하고 있기에는 조직 내 자리가 너무 불편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에 반응하는 나를 발견하게 됐고, 그런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내 갈 길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나는 8년간 다녀온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정확히 3108일 다닌 정든 회사. 그만두고 나오는 그 순간까지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분명 내 인생에 있어 많은 영향을 끼친 곳임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직장을 떠나는 나를 보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버티지 못하고 튕겨져 나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퇴사하면서도 그 조직에서 가십거리가 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면 어디든 있는 일이니 이제는 그 가십에서 벗어나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리라 마음 먹었다.
퇴사 한 달 째... 비로소 나를 찾아가고 있다
▲ 생활기록부초등학교 생활기록부, 장기가 많은 아이. ⓒ 강상오
학창 시절부터 직장 생활을 해오기까지 수십 년.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왔건만 나는 결국 저녁형 인간이었다. 나는 당분간 내 방을 사무실로 쓰기 위해 정리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랍장에서 내가 학창시절 때 받은 상장들을 발견했다. 상장 속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모든 상장이 글짓기 대회에서 받은 상들이었고, 직장에 다닐 때에도 메일이나 보고서를 쓰는 내 역량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스스로 잊고 살았지만, 글을 쓰는 게 좋았다. 또, 나는 그걸 잘하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봤다. 그속에 나는 장기가 많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걸 좋아했다. 맞다. 나는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 음악을 해서 먹고 살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현실에 부딪혀 마음 속 깊은 곳에 꿈을 묻고 살았다. 단지 취미로 컴퓨터로만 깨작되던 나의 음악들. 이제 좀 더 깊이 있게 음악을 해보기 위해 아직 다룰 줄도 모르지만, 미디 악기들을 장만했다. 박진영의 말대로 '나는 딴따라'다. 음악을 만들고 듣고 부르는 게 좋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 누군가 내게 '당신의 꿈이 뭔가요?'라고 물어오면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청년들이 나와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 나도 어릴 때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간절히 갈망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곧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그 꿈을 가슴 속에 묻고 산다.
만약 당신이 이번 주까지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해보시라. 그럼 어떻게 살겠는가? 여느때처럼 금요일까지 출근해서 상사 눈치 보고, 야근하고, 지친 몸으로 퇴근해서 주말 이틀 동안 집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잘 텐가.
내 주변 사람들에게 꿈을 이루기 위해 뭔가를 선택하고 실행하라고 말하면 되돌아오는 대답 중 9할은 "그럼 당장 뭐 먹고 사니?"일 게다. 맞다. 당장 월급이 끊기면 힘들겠지. 하지만 그 월급은 언젠가는 끊긴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간에 '실행'을 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이뤄낼 수 없다. 직장을 떠난 지 한 달밖에 안 됐지만,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난 월급이 끊긴 1개월 동안 '절망'이 아닌 '희망'을 봤다.
나를 꼭두각시 노예로 만드는 월급이 없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고, 그 일을 즐길 수 있다면 분명히 그 일로 소득을 창출할 수 있다. 하물며 평생 직장 생활만 해온 내가 이렇게 시민기자가 돼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상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께 감히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이여 꿈을 꿔라! 그리고 나가자. 더 큰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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