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모든 차가 바로 '스톱'... 이 나라가 무서워졌다

[행복사회 유럽③] 차와 돈보다 '사람'이 먼저

등록|2015.04.07 21:25 수정|2015.06.04 14:59

▲ 튜브(Tube)처럼 생긴 런던의 지하철(Undergrond) ⓒ 정기석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리는 순간, 졸지에 항공사 고객에서 일개 배낭여행자 신세로 전락했다.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은 온통 두려운 미지의 세계다. 자칫 차를 잘못 타서 엉뚱한 곳에 내리기라도 하면 국제미아 신세가 될 수도 있다. 현대는 도처에 사고나 사건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사회다. 하지만 런던 현지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다. 철저한 이방인으로서 마치 적진에 뛰어든 듯한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온갖 국적과 인종이 뒤섞인 혼잡한 공항 로비로 들어서자 걱정과 불안은 증폭했다.

"뭘 타는 게 좋지? 몇 번 터미널로 가야 차를 탈 수 있지? 차표는 얼마 짜리를, 어디서 사야 하지? 자동판매기에서 차표를 사야 하나, 이런 젠장, 어떻게. 현금으로 사야 하나, 카드로 사나? 카드로 산다면 비밀번호는 몇 자리나 눌러야 하나?"

심장박동과 말과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점점 빨라졌다. 아내도 상태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사전 정보 조사나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먼저 다녀온 여행 선배들이 직접 제작한 각 도시의 여행지도롤 따로 구했다. 지도를 방바닥에 펴놓고 전시 적진침투 작전을 구상하듯 도상훈련도 수시로 했다. 예정행로 또는 희망동선을 몇 가지 경우의 수로 설계해 머리에도 입력해두었다. 구글지도 검색으로 최적의 지름길을 찾아가는 기술도 익혔다. 하루에 9900원이나 지불해야 하는 무제한 데이터 사용 인터넷로밍 서비스까지 신청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근심, 걱정, 불안, 초조는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아무리 지도를 쳐다보고 인터넷 지도를 검색해봐도 별 소용이 없었다. 지도가, 인터넷이 아무리 열심히 지명을 알려주고 가는 길을 설명해도 마찬가지였다. 지도의 동서남북과 현지의 동서남북은 느낌이 다르다. 동이 서 같고 남이 북 같다. 설사 동네 이름을 숙지한다 해도 그게 어디쯤 붙어 있는 땅인지 분간이 돼야 제 발로 찾아갈 것 아닌가.

지명마다 금시초문인 이국의 낮선 장소를 가리키는 지도, 한국처럼 '빨리, 빨리' 연결되지 않는 인터넷, 무엇보다 나의 철저하지 않은 방향 감각과 공간지각 능력을 좀처럼 신뢰할 수없었다. 믿을 만한 방법, 최후의 비빌 언덕은 단 하나였다. 공항 인포메이션 센터.

런던 지하철역에는 '서브웨이'도 '튜브'도 없다

소용 없는 지도를 그만 가방에 접어넣고 히드로공항 인포메이션 센터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안내원 아주머니에게 숙소 약도를 들이밀며 이렇게 매달렸다.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여기, 켄싱턴 클로즈 호텔을 찾아가려는데, 최선의 길을 좀 가르쳐 주세요.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런던을 잘 모르는 한국인인 나를 좀 구원해주세요. 플리즈, 헬프 미, 플리즈."

안내원 아줌마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한국인을 자주 접해본 표정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주저없이 지하철을 타고 갈 것을 권했다. 택시는 비싸고 버스는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믿음이 갔다.

"일단 파란색 피카딜리 라인을 타고 얼코트 역에 내려서 녹색 디스트릭트 라인으로 갈아타라. 한 정거장 더 가서 하이스트릿 켄싱턴 역에 내리면 된다. 역에서 10분쯤 걸어가면 호텔이 보일 것이다. 이게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이다."

다시 인터넷을 뒤져보니 구글지도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같은 방법이었다. 체온이 있는 사람의 말은 믿음이 가도, 차가운 인터넷 기계어는 선뜻 믿지 못했을 뿐이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티켓구매의 고민까지 단번에 해결했다. 티켓 자동발매기를 상대로 고된 시험에 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자동발매기라는 기계에서 카드를 충전할 자신도, 기술도 없었기 때문이다.

런던에 여행 오면 으레 선불제 오이스터(Oyster) 교통카드부터 구입한다고 하던데, 일단 편도 티켓을 끊었다. 첫날은 숙소 밖에 더 돌아다닐 일도 없을 테니.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그것도 하루종일 돌아다닐 다음 날 1인당 9파운드짜리 1일권을 끊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사방을 둘러봐도 지하철역이 눈에 띄지 않았다. 런던의 지하철은 한국처럼 서브웨이(Subway)가 아니라 '튜브(Tube)'로 불린다는 사실,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라는 정도는 공부하고 온 터. 하지만 공항 로비를 아무리 둘러봐도 '튜브' 안내판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았다.

"안내원 아줌마, 아무리 찾아도 지하철역이 안 보이는데요."

런던 아줌마는 참 딱 하다는듯 손가락으로 바로 눈앞의 안내판을 가리켰다. '언더그라운드(Undergrond)'. 그게 지하보도나 지하층이 아니라 지하철역이란다. 달랑 그렇게만 써있다. '튜브'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써 있지 않다.

'런더너'들은 지하로 2층으로 다닌다

▲ 장애인 휠체어 전용 출입문이 있는 2층 버스 ⓒ 안숙영


유럽은 교통문화도 선진국답다. 지난해 독일에서 열흘 정도 머무는 동안 교통사고는커녕 단 한 건의 교통위반 사례도 목격하지 못했다. 충격적이었다. 보행자든 운전자든 교통법규를 어기지 않았다. 서로 합의해서 정해놓은 생활의 약속과 질서를 당연하다는듯 철저히 준수했다. 그때, 독일 국민들이 무서워졌다.

독일에서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으면 모든 차들이 바로 멈추어 선다. 사람부터 먼저 길을 건너가라는 신호다. 차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는 것이다. 런던의 교통문화도 마찬가지다. 모든 도로에서 보행자에게 우선권이 있다. 인권이 우선이다. 심지어 무단횡단을 하다 사고가 나도 운전자가 더 많이 책임을 진다고 한다. 한국에 50년 넘게 살면서 사람에게 길을 먼저 양보하는 차를 나는 본 기억이 없다.

런던 지하철은 세계 최초로 만들어졌다. 그 자체로 중요한 국가유산이고 문화재이고 관광명소다. 탈거리 이전에 충분한 구경거리다. 1863년 1월 10일에 메트로폴리탄 철도로 개통했으니 150살이 넘었다. 당시는 당연히 전철이 아니라 증기기관차였다. '언더그라운드(the Underground)'가 일반적 명칭이지만, 굴착된 터널 모양에서 비롯된 '튜브(the Tube)'로 흔히 부른다. 일종의 별명이나 애칭인 셈이다.

런던의 지하철은 말그대로 그물망처럼 촘촘하다. 런던 시내 지도를 보고,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내가 지레 겁을 먹은 이유다. 노선이 12개, 역은 268개, 총 길이는 408km에 달한다. '튜브'라는 오늘날 런던 지하철의 별명은 1900년 6월에 개통된 '센트럴 런던 레일웨이(Central London Railway)'에서 유래했다. 바로 원통(Tube) 모양의 터널 때문이었다.

한국 지하철에도 이런 애칭이 붙어 있나. '지옥철'? 최근 들어 한국의 지하철 별명은 점점 '지옥철'로 굳어지는 듯하다. 특히 서울 9호선은 중국 베이징, 일본 도쿄의 그것과 함께 세계적 수준의 '지옥철'로 악명이 높다.

총 연장이 900km가 넘어 세계 최장이고 출근길 혼잡도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0%가 훌쩍 넘어간다. 노선 설계나 교통수요 예측을 잘못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런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교통문화나 시민의식이 더 큰 문제는 아닌지. 사람 보다 차가, 사람보다 돈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반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2층 버스를 안 탔다면, 런던에 간 게 아니다

'튜브'와 함께 런던의 대중교통을 분담하는 교통수단이 2층 버스(Double Decker)다. 런던의 명물이자 상징물이다. 중세의 고건축이 즐비한 런던거리를 세련된 초현대식 '빨간' 2층 버스가 오가는 풍광은 낭만적이거나 동화적이다. 피카딜리 서커스 거리, 소호 거리를 걷다보면 대도시의 도심이 아닌 마치 놀이공원에 놀러온 아이의 기분이 된다.

하루종일 무제한 승차할 수있는 1일권까지 있으니 2층 버스만 보면 자꾸 올라타고 싶어진다. 아마 런던에 가서 2층 버스를 한 번도 타지 않은 여행객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만일 있다면 그이는 런던을 여행하지 않은 셈이다.

그래서 나도 목적지와는 반대 방향임에도 기어이 2층 버스를 한번 타고 말았다. 역시 2층버스에서 내려다보는 런던 거리는 1층에서 본 런던 거리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1층에서 보는 런던은 대도시의 도심이었으나 2층 버스에서 본 런던은 도심이 아닌 놀이공원 같았다. 런던의 2층 버스는 좀 과장하자면, 대중교통이 아닌 어린 날 창경원에서 타 본 '메리 고 라운드'나 '대회전차' 같았다. 

런던에서 2층 버스가 도시의 명물도 자리잡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인건비 과다, 매연 배출, 장애인 안전 등의 문제로 2005년 1층 버스에 밀려 퇴출됐다. 2008년, 런던올림픽 특수를 겨냥해 런던의 명물을 되살리려는 보리스 존슨 시장의 당선공약으로 부활했다. 친환경 하이브리드 엔진으로 매연배출도 절반 가까이 줄이고 장애인을 위해 휠체어 전용 출입문도 단 신차종을 채택했다.

그래서 그런지 2층 버스가 종횡무진 누비는 런던의 도심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복잡하지 않게 만드는 법과 제도 덕분이다. 일단 도심에 진입하려면 고액의 혼잡세(Road Pricing)를 부담해야 한다. 시민들이 대중교통을 애용할 수밖에 없다.

교통 진정기법(traffic coming)도 한몫을 하고 있다. 물리적인 방법으로 차량속도를 조절해 교통량을 감소시키는 방법이다. 도심에서는 시속 30km 이상 주행하지 못한다. 덕분에 영국은 OECD 가입국 중 교통사고 사망률이 가장 낮다. 한국의 절반 이하 수준이다. 모두 '차 보다 사람의 보행권과 인권을 우선하는' 인간적인 제도 때문이다.

한국에도 2층 버스가 잠시 돌아다닌 적이 있다. 지난해 말부터 경기도에서 2층 버스를 몇 달 시범운행 한 적이 있다. 서울로 진입하는 수도권 광역버스 입석금지 조치에 따른 후속 대책으로 대용량 교통수단의 대안으로 시도해본 것이다.

하지만 성과는 부정적이라고 한다. 2층 버스에는 미처 부합하지 않는 현행 도로교통법 등이 일단 문제라는 판단이다. 하지만 법이나 제도보다 시민의식과 교통문화의 장벽이 더 높고 견고하지는 않을까. '사람보다 차나, 돈이 늘 먼저인 이런 나라'에서는.

▲ 현대건축과 전통건축이 마주보는 하이스트릿 켄싱턴 거리를 달리는 런던택시 'Black Cab' ⓒ 정기석


덧붙이는 글 -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