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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차도 위 시위, 당황한 경찰들 '우왕좌왕'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97]16. 합법성 쟁취를 위하여

등록|2015.04.16 17:29 수정|2015.04.16 17:29

위대한 어머니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추모 그림 ⓒ 김봉준


제 1차 합법성 쟁취투쟁

청계노조는 합법성에 관한 공개 토론회를 통해서 노조의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청계노조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청계노조는 보다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알리고 합법성을 쟁취하기로 했다.

그 방법으로 노·학 연대 투쟁을 통해서 요구를 관철시키기로 했다. 물론 노동자의 강력한 투쟁의 무기는 파업을 통해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있다. 그러나 현재 탄압 받는 청계노조의 역량으로는 파업투쟁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자체 역량만으로는 시위 농성 등의 투쟁을 할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노조 지도부에서는 노동자와 학생이 연대해서 싸우는 방법을 선택했다.

청계피복노조는 전통적으로 학생운동과 연대해서 투쟁해왔다.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이후 노조 결성도 당시 학생들의 지원을 받아 투쟁했고, 1984년 노조 복구도 야학연합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이번에도 대학생들과 연대해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해 나가기로 결정을 했다.

청계노조 지도부는 형제교회 야학팀인 시정의 집 김환기, 류도경, 이영동 등을 통해 각 대학 학생회와 연결을 갖고 각 대학 총학생회 민중지원 책임자와 전술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청계노조 지도부에서는 노동조합 합법성 쟁취투쟁의 전략 전술을 수립했다. 우선 전두환정권이 청계노조를 비롯 민주노조를 불법적이고 폭력적으로 파괴한 것은 부당한 조치임을 폭로하고 노조를 복구한 것은 정당하다. 따라서 불법노조라는 명분으로 탄압하는 것을 중단하고 합법성을 쟁취하기 위한 목표를 설정했다.

그 투쟁은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합법성이 쟁취될 때까지 할 것이며, 투쟁 장소는 상징적으로 평화시장 구름다리 아래 전태일 분신자리에서 하되 그 자리가 봉쇄될 경우 그 자리를 향해 진격하기로 했다. 따라서 합법성 쟁취투쟁을 기습적인 시위가 아니라 공개적이고 공공연한 홍보를 통해서 대중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 방향으로 나가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연행 구류, 구속을 각오하고 특히 대학생의 시위 참여 숫자가 월등히 많은 점을 감안할 때 자칫 대학생 시위로 비칠 가능성에 대비해서 매번 청계 조합원의 연행자 숫자를 일정하게 배치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투쟁을 논의할 때 집행부 주요 간부들은 사무실에서 논의하는 것도 모자라서 밤 늦게 쌍문동 이소선의 집에 모여서 계속 논의를 했다. 이럴 때마다 이소선은 이들이 먹고 자는 것을 신경 써야 했다. 70년대만 해도 청계 노동자들이 집으로 몰려오면 이소선 자신이 직접 밥을 해서 먹이기도 했지만, 딸 순옥이가 도맡아서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80년대가 되어 그 일을 며느리 윤매실이 도맡아서 하게 되었다. 이소선은 노조 지도부들의 열정적인 투쟁 논의에 뿌듯하기만 했다.

구체적인 투쟁전술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각 대학 투쟁 담당자들과 은밀하고 심도 있는 논의들이 계속 진행되었다. 각 대학 학생회 측 투쟁 지도부들이 이소선을 방문하였을 때, 이 자리에서 이소선은 이들을 격려하며 당부했다.

"우리 태일이가 대학생들을 부러워했다고요.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데모를 잘 할 수 있는가, 우리 노동자도 그런 것 배워서 학생들처럼 하면 근로기준법도 지키게 할 수 있을 것이고, 권리도 지킬 것인데 하면서 말이에요. 태일이가 죽으면서 어머니는 노동자와 학생이 하나가 되어 함께 싸우라고 했어요."

이렇게 청계노조 합법성 쟁취투쟁을 하기 위해 준비를 마친 노조는 '제 1차 청계노조 합법성 쟁취대회'를 알리는 격문을 청계천 전체 공장에 대대적으로 배포했다.

"모이자! 9월 19일 오후 1시, 평화시장 앞길, 전태일 동지의 외침이 살아 있는 구름다리 아래로, 모여서 싸워 청계노조 합법성을 쟁취하자!"

이 격문이 배포되자 경찰, 정보당국에서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소선은 가택 연금이 되고, 위원장은 수배되었다. 지도부는 당국의 이런 조치에 대비해서 미리 정보 당국의 시야에서 벗어난 상태다.

1984년 9월 19일 오후 1시, 청계피복노조 '제1차 합법성 쟁취투쟁'의 바로 그날 그 시간이다. 청계천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청계천 5가에서 7가, 을지로 5가에서 신당동, 장충동에서 동대문 이대병원 앞까지 헬멧, 방패, 최루탄 등으로 무장한 경찰이 이중 삼중으로 둘러싸고 경비를 하고 있었다. 전투경찰은 페퍼포그 등의 장비를 앞세우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대비하고 있었다.

이렇듯 물 샐 틈 없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노동자 학생들은 대열을 형성하고 진격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초동 대오 형성이 중요하다. 초동 대오가 형성이 되면 주변에 흩어져 있던 시위대가 그 대오를 중심으로 합세해서 경찰과 대치해서 싸울 수 있는 전선이 형성된다.
 
피아(彼我)간에 피를 말리는 긴장감 속에 드디어 오후 1시가 되었다. 그러자 청계천 6가 동대문상가 신발가게들(신평화시장 건너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노동자 학생들이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해서 튀어 나오면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청계노조 인정하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순식간에 대오가 형성되었다. 130명의 대오는 스크럼을 짜고 청계천 고가차도로 올라가면서 노래를 부르며 유인물을 뿌렸다.

이들 130명은 연행되어 구속도 불사한 130명이다. 서울대 40명, 고려대 30명, 연세대 30명, 청계노조 조합원 3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1차 투쟁 주동을 담당한 청계노조 황만호 부위원장은 건장한 학생들의 무등을 타고 고가차도에 올라갔다. 이들은 고가차도를 점거하고 동대문운동장 로터리 위쪽에 당도했다.

허를 찔린 경찰은 당황하여 급히 방어선을 옮기기 시작했다. 경찰로서는 고가차도를 점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때 고가차도 아래에 흩어져서 대기하고 있던 1000여 명의 노동자와 학생이 로터리 사방에서 물밀듯이 쏟아져 나와 도로를 점거해 버렸다.

순식간에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시위가 벌어지는 것에 당황한 경찰은 우왕좌왕했다. 경찰 병력이 급히 증강되었다. 최루탄, 사과탄, 지랄탄, 페퍼포그에 시위대는 밀렸다가도 다시 대오를 정비해서 고가차도 위에서 점거한 시위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를 거듭했다.

고가차도 위에서 하는 시위를 처음 당해본 경찰은 고가차도가 어느 경찰서의 관할이냐는 문제로 자기들끼리 우왕좌왕 하다가 결국 서울시경 테러진압 전문 무술부대를 투입했다. 시경 무술경찰과 맞선 시위대는 양쪽에서 조여 오는 포위망을 피할 수 없다. 경찰의 포위에 흥분해 자칫 고가차도 아래로 떨어지거나 뛰어 내릴 수도 있다. 이에 황만호 부위원장은 시위농성을 최대한 오래 버티면서도 시위대의 안전에 최선을 다 했다. 고가차도 시위대열은 40분 가량 고가차도 위에서 버티다 전원 연행되었다.
 
고가차도 아래에서의 시위는 3시간 가량 계속 되었다. 경찰은 엄청난 최루가스를 퍼부으면서  시위대를 이대 부속병원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시위대는 혜화동 로터리까지 퇴각하면서 이날의 시위를 끝냈다.

이날 시위로 경찰에 연행된 숫자는 122명이었다. 이 가운데 청계 조합원은 17명이었다. 이소선은 시위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가택연금이 풀렸다. 이소선은 곧바로 경찰서로 달려갔다. 연행된 노동자와 학생들을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연행된 노동자나 학생들은 최루가스로 범벅이 되어 눈물 콧물 흘리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씩씩하고 당당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소선은 안심이 되었다.

연행된 조합원과 학생들은 즉결로 넘어가 구류 29일을 받았다. 그러나 모두 다 정식재판을 청구해서 연행 이틀 만에 석방이 되었다.

청계노조 조합원들은 1차 합법성 쟁취 투쟁 가두시위가 끝나자 곧바로 기독교회관 5층에 있는 사회선교협의회 사무실에서 "청계노조 인정하라"고 요구하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이 농성은 1차 시위를 끝내고 조합원을 점검하고 앞으로의 투쟁을 정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청계노조의 합법성쟁취 투쟁 시위는 광주 민중항쟁 이후 규모 있는 노·학 연대 가두시위였다.
덧붙이는 글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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