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에서 보낸 첫날 밤... 무서움이 빠져나갔다
[홀로 배낭여행 초보자의 인도 여행기 29] 북인도 코사니 간디 아쉬람
▲ 북인도 코사니에서 바라본 인도인들의 성산, 히말라야 난다데비(해발 7816m) 그 가슴 벅차게 웅장한 자태를 사진으로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 송성영
"거스름돈 주셔야죠?"
콧수염을 기른 버스 차장이 본체만체 딴청을 부린다. 여행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최대한 값싼 숙소와 음식으로 버티고자 했기에 내게 70루피(1400원 정도)면 두 끼 식사,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돈이다.
나 몰라라 하는 인간, 멱살잡이를 할 수도 없고 어쩌랴, 허탈한 웃음과 함께 코사니(Kausani)에 내렸다. 그래도 버스 승객 중에 유일한 외국인인 내게 '코사니에 도착했다며 친절하게 알려 준 것만 해도 고맙지 아니한가' 싶어 내 머리는 금붕어처럼 금세 거스름돈을 잊었다.
코사니는 주차장이 따로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생필품 가게와 몇몇 식당이 늘어선 상가의 총 거리는 대략 100미터도 채 안 돼 보인다. 묵직한 배낭을 메고 얼쩡거리는 낯선 이방인에게 누군가 숙소를 안내하겠다며 접근할 만도 한데 아무도 접근하는 사람이 없다.
▲ 북인도 코사니 중심지. 상가 거리가 100미터도 채 안되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 송성영
도로 한옆으로 몇 대의 지프차가 줄지어 서 있는 승강장 주변의 몇몇 사람이 그 큰 눈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낯선 이방인 보듯 하지 않는다. 한 달 가까이 돌아다닌 여행지 곳곳에서 그랬듯이 이들도 덥수룩한 수염에 추레한 옷차림의 나를 네팔이나 티베트인 아니면 인도 현지인으로 보는 것일까?
나를 주시하는 순박한 표정들이 어딘가 모르게 낯익어 보인다. 내가 손을 들어 '하이'하며 바보처럼 웃자 그들도 손을 들어 답례한다. 이들 중에 나처럼 해죽해죽 웃고 있는 사내에게 접근했다.
"간디 아쉬람은 어디에 있나요?"
"저쪽 길로 올라가세요."
사내가 사람 좋은 웃음으로 언덕길을 가리킨다. 북인도 '쿠마온 알모라'에서 코사니 까지는 2시간 거리, 코사니는 지도 상으로 알모라에서 히말라야 산맥이 자리한 북쪽으로 52킬로미터 정도 들어서 있는 지점이다. 코사니(해발 1890미터)에 도착하자마자 히말라야가 훤히 보이겠지 싶어 열려 있는 언덕길을 숨 가쁘게 올랐다.
파노라마 같은 히말라야 능선이 촥...
▲ 간디 아쉬람에서 바라본 구름이 오락가락 걸쳐 있는 히말라야 난다데비. ⓒ 송성영
"아하! 야~"
숨을 몰아쉬기도 전에 감탄사가 절로 쏟아져 나왔다. 겹겹이 쌓여있는 산들 끄트머리에 흰 구름 오락가락 걸쳐 있는 히말라야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사진기로도 다 잡아낼 수 없을 만큼 넓게 펼쳐져 있다. 인도에 와서 처음 마주대한 다람살라에서의 히말라야 설산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웅장했다.
간디 아쉬람은 숙소를 잡아 놓고 찾아 가기로 작정하고 히말라야 설산을 한 눈에 바라보고 있는 제법 규모가 큰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갔다. 하루에 700루피를 달라고 한다. 너무 비싸다. 그 건물에서 나오는데 작은 구멍가게 앞에 앉아 있는 사내가 나를 불러 세웠다.
▲ 태양열 전지를 설치한 간디 아쉬람. 1929년 마하트마 간디가 머물렀던 건물이라고 한다. ⓒ 송성영
"숙소를 원합니까?"
"예. 아주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도 손님방이 있습니다."
그는 구멍가게 옆에 자리한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한국으로 치자면 시골 민박집이다. 이 방에서도 히말라야 설산이 훤히 보인다. 작고 허름한 방이었지만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하루 묵는데 얼마나 하나요?"
"450루피요."
"너무 비싸요. 열흘 정도 있을 건데 좀 싸게는 안 되나요?"
"하루에 400루피면 되겠습니까?"
"아, 나는 200루피 정도 하는 방을 찾고 있습니다. 목욕 시설이나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해도 상관없어요."
"여기 코사니에서 그렇게 싼 방을 찾을 수 없습니다."
▲ 간디 아쉬람 식당에 딸린 부엌에서 화덕에 불을 지펴 짜파티라는 빵을 굽고 있는 관리인들. ⓒ 송성영
나는 일단 '간디 아쉬람'을 둘러보고 다시 오마 약속했다. 그냥 가기가 미안해 그의 구멍가게에서 물과 바나나 몇 개를 샀다. 간디 아쉬람은 구멍가게에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좀 더 지대가 높은 간디 아쉬람에서 보이는 풍경은 숨 막힐 정도로 웅장했다. 사진은 대체로 실물을 과장해 보다 아름답게 꾸며 놓곤 한다. 하지만 사진이 실물을 하찮게 담아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됐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간디 아쉬람 앞으로 펼쳐져 있는 히말라야 봉우리가 '축복 받은 여신'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난다데비였다. 해발 7816미터의 난다데비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한반도 사람들이 백두산을 신성시하는 것처럼 인도인들이 가장 신성시 하는 히말라야 설산이다. 그런 난다데비를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곳, 마하트마 간디가 처음 여기에 와서 한동안 저 난다데비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는 얘기들이 실감이 난다.
보일 듯 말듯 구름옷을 걸쳐 입고 있는 난다데비 자태에 넋 놓고 있다가 태양열 발전기가 설치돼 있는, 소박한 생활의 흔적들이 곳곳에 베어 있는 간디 아쉬람를 둘러보고 있는데 검은 피부의 중년 사내가 나를 부른다.
"어느 나라에서 왔나요?"
"한국요."
"오! 한국이라고요? 내 친구 중에 한국 사람 있습니다. 여기 오기 전에 델리대학교의 한국 유학생을 만난 적이 있어요."
한국인 유학생에게 전화를 걸어 나와 연결해 주기도 했던 그의 이름은 가텀 바흐마, 나보다 나이가 세 살 더 많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델리가 아니라 독일이라고 한다. 30년 전 독일 여자를 만나 결혼해 독일로 이민을 가서 명상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는데 1~2년에 한 차례 정도 인도에 온다는 그. 그때마다 이곳 코사니에 머문다고 했다. 그는 내가 배낭과 함께 어깨에 둘러멘 붉은 천 가방에 관심을 보였다.
"이것은 티베트 승려들이 메고 다니는 것인데..."
"예, 맞습니다. 내 동생이 티베트 승려인데 그에게 선물 받은 것입니다."
생명없는 사물에도 기운이 깃들어 있다. 보잘 것 없는 붉은색 천가방이었지만, 그와 좀 더 가깝게 인연을 맺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종교는 힌두교가 아닌 불교라고 한다. 30년 전부터 코사니에 찾아오고 있다는 가텀씨. 이번에는 티베트 불교의 만트라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간디 아쉬람에 두 달 정도 머물 예정이라고 한다. 영어가 짧아 불교에 관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순 없었지만 우리는 불교를 통해 좀 더 가까워 질 수 있었다.
"숙소는 잡았나요?"
"아니요."
"아, 그럼 잘됐네요. 내 옆방이 비어 있습니다."
"여기서 묵어도 되나요?"
"물론요."
"죄송합니다. 내가 가난한 여행자라서 방 가격을 알아야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묵으려면 얼마 정도 내야 하나요?"
"아 걱정 말아요. 당신이 원하는 만큼 내면 됩니다."
먹고 자고 내가 원하는 만큼 돈 내라?
▲ 인도의 서민들이 주로 먹는 채식 위주의 소박한 식단. ⓒ 송성영
간디 아쉬람은 마음에 우러나는 만큼 돈을 지불하는 기부제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망 좋은 간디 아쉬람에서 묵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가운 일이었는데 원하는 기간 동안 먹고 자고 단돈 1루피를 지불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외국인은 일주일). 한낮의 땡볕과 무거운 배낭에 지쳐 있던 나. 만약 무슬림이었다면 하늘을 향해 "알라!"라고 외쳤을 것이다.
신과 같은 그 어떤 존재가 나 같은 가난한 여행자를 위해 가텀씨를 보낸 것 같았다. 그는 앞장서서 나를 신 앞으로 안내하듯 간디 아쉬람의 매니저에게 데려갔다. 나는 여권을 꺼내 몸짓만큼이나 조용 조용한 콧수염의 매니저가 펼쳐 놓은 방명록에 몇 가지 신상을 적어 놓고 여장을 풀었다. 가텀씨가 묵고 있는 바로 옆방이었다.
내가 일주일 정도 묵기로 작정한 숙소의 창문 사이로 히말라야 난다데비가 훤히 들어왔다. 나는 창문 사이로 펼쳐져 있는 난다데비를 바라보며 이 방에 들어서기까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이끌어 주는 그 어떤 존재, 혹은 내 의지와 연관된 어떤 기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에 대해 생각의 깊이를 더해 갔다.
태양열을 이용하고 있는 간디 아쉬람은 넓다란 마당을 사이 두고 두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여장을 푼 곳은 간디홀에 속해 있었다. 간디홀은 간디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는 너른 공간과 매니저가 묵고 있는 방, 나와 가텀씨가 묵고 있는 방, 모두 네 칸으로 이뤄져 있었다. 간디홀 건너편 동에는 한꺼번에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방들이 여러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가텀씨를 따라 찾아간 식당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쉬람을 찾은 사람들로 식당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나는 운이 참 좋았다. 사람들이 빠져 나간 사이 용케 찾아와 방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식당 안쪽에선 직접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간디 아쉬람에는 매니저를 중심으로 세 사람의 요리사와 주변을 청소하는 관리인 그리고 심부름을 하는 두 명의 소년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저녁 식단은 아주 간소했다.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밀가루를 반죽해서 얇게 화덕에 구운 짜파티와 콩으로 만든 커리의 일종인 달, 그리고 감잣국과 양파와 고추가 나왔다. 모두가 채식이었는데 고추는 아주 매웠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말끔하게 식기를 비웠다.
저녁에는 인도 각지에서 찾아온 십여 명의 방문자와 함께 명상과 더불어 진행하는 기도회 시간에 참여했다. 간략한 자기소개를 통해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세 가지 종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슬람과 힌두교가 하나 되는 자리... 감동이었다
▲ 내가 묵었던 더블 침대가 놓여진 간디 아쉬람 숙소. 마하트마 간디가 바로 이 방에서 묵었다고 한다. ⓒ 송성영
기도회엔 장황하게 제 잘난 맛에 설교를 늘어놓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아쉬람의 매니저가 기도회의 일정한 순서에 따라 진행만 할 뿐이다. 여기서는 마치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성인들의 말씀을 도용해 말만 앞세우는 말법 시대, 말의 홍수가 없다.
이들 중 힌두어는 물론이고 영어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나는 눈 감고 기도하는 시간을 지루해 하는 장난기 넘치는 몇몇 꼬마 녀석들과 눈길을 주고받기도 했다.
귀에 낯선 힌두교 찬가와 무슬림 여인이 부르는 이슬람 찬가를 한 자리에서 차례로 들을 수 있는 가슴 뭉클한 감동의 시간도 있었다. 적어도 이곳 간디 아쉬람에서 만큼은 생전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갈리는 것을 반대했던 간디 뜻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힌두교인들이 대부분인 자리에서 무슬림 여인의 슬픈 찬가가 울려 퍼질 때 남북으로 갈라서 있는 한반도가 뒤엉켜 떠오르면서 코끝이 찡해져 왔다.
저녁 기도회를 마치고 방에서 잠시 명상을 하고 있는데 간간이 기침을 하던 가텀씨가 불렀다.
"헤이 송! 거기 있소!"
"아, 예..."
"차 한 잔 합시다."
나는 그에게 그냥 부르기 쉽게 '송'이라 불러 달라 했고, 나는 그를 미스터 가텀이라 불렀다. 그의 방과 내 방 사이에는 얇은 벽 중간에 출입문 하나가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잔기침 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는 내가 영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엉터리 영어에 귀를 기울이며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나보다 하루 일찍 간디 아쉬람에 여장을 풀었다는 그는 델리에 있는 동생네 집에서 머물다가 택시를 타고 꼬사니까지 10시간 넘는 거리를 단숨에 달려왔다고 한다. 그 덕에 영상 30도를 오락가락하는 델리의 여름 날씨에서 침낭에 폭 파묻혀 잠들어야 하는 쌀쌀한 코사니의 밤 공기를 접하고 감기를 얻었다 한다.
그의 웃음 소리는 아주 익살스러웠다. 영어가 유창한 그는 내가 알아듣거나, 못 알아듣거나 키득키득 웃어가며 얘기했다. 그의 유창한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나는 장난기 다분한 그의 웃음소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그는 되묻곤 했다.
"키득 키득... 내가 한 말 알아듣고 웃는 거요? 키득 키득 키득..."
"아니요.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나는 다만 당신의 웃음소리가 좋아서 웃었어요."
우리는 서로 눈빛을 마주 보며 배꼽 잡고 웃었다. 그는 내게 따끈한 차를 건네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려줬다.
"당신이 쓰고 있는 방이 바로 간디가 머물던 방입니다."
"... 정말요!?"
"사실입니다. 믿기지 않으면 매니저에게 물어보세요. 본래는 내 방과 하나로 연결해서 썼다고 합니다."
▲ 간디 아쉬람에서 만난 인도 사람 가텀 바흐마씨. 그는 독일여자와 결혼하여 독일로 이민, 거기서 명상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 송성영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국부로 추앙받는 사람이 머문 곳에서 아무나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소박한 삶을 살다간 간디의 정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개방해 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1929년 내가 쓰고 있는 방에 머물면서 아나샥티 요가를 저술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낯선 시간 속으로 그 어떤 설렘과 더불어 두려움을 짊어지고 여행을 떠난다. 납덩이처럼 무겁거나 혹은 깃털처럼 가벼운 그 무엇을 가슴에 품고 떠난다.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 그 중 하나를 내려놓게 된다. 나는 마하트마 간디가 머물렀다는 방에 누워 낯선 곳, 그것도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라는 두려움, 그 납덩어리와 같은 두려움이 빠져 나가는 느낌과 함께 나른한 몸이 점점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 별빛 찬란한 간디 아쉬람, 폭력적인 내 청춘을 평화를 갈망하도록 바꿔 주기도 했던 마하트마 간디. 그가 머물렀다는 방에서의 첫날 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한 사람의 인간이 최고의 사랑을 성취한다면, 수백만의 미움을 녹일 수 있다."
간디의 가르침이 귓속으로 또렷하게 파고들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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