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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서원도 5대 서원처럼 될 수 있어"

전씨 형제가 설립한 서원, 추모재와 화봉재를 다녀와서

등록|2015.04.30 14:08 수정|2015.04.30 14:09

▲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 있는 옥구향교 전경 ⓒ 조종안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고 서울에 성균관을, 그 하급 관학인 향교를 전국 각지에 설치했다. 군산 지역에는 태종 3년(1403) 옥구향교(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6호)와 임피향교(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5호)가 세워졌다.

조선 중기에는 오늘날 사립 학교에 해당하는 서원(書院)도  개원한다. 선조 33년(1600) 봉암서원(터만 남아 있음)을 시초로 숙종 11년(1685) 염의서원(군산시 유형문화재 제5호), 옥산서원(군산시 유형문화재 제3호), 문창서원, 산앙서원, 치동서원 등이 설립했다.

▲ 근대화의 물살을 잘 견뎌낸 원오곡 마을의 화봉재와 효열문 ⓒ 조종안


그 중 옥산서원, 산앙서원(낙영당), 치동서원(치동원)은 일제 강점기에 창건돼, 전통 문화를 유지하고자 노력한 지역 유림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개정에 낙영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치던 연재 송병선(우암 송시열 9대손)은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주장하다 그 해 12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 이렇듯 조상의 순국 정신과 숨결이 느껴지는 향교와 서원은 애향심과 관광 자원은 물론 시민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소중한 재산이 되고 있다.

군산 지역에는 국가 지정 보물을 비롯해 국가 지정 등록문화재, 도 지정 유형문화재, 도 지정 무형문화재, 도 지정 기념물, 민속 자료, 문화재 자료, 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소중한 문화 유산 50여 점이 전해진다. 그 중 추모재(군산시 유형문화재 제1호)와 화봉재(군산시 유형문화재 제6호)가 소재한 군산시 옥구읍 오곡리(원오곡마을)를 찾았다. 

근대화의 물살을 잘 견뎌낸 '원오곡마을'

▲ 담양 전씨 종가댁의 자연석 돌담과 동백 ⓒ 조종안


옥구읍 사거리에서 수산리 방향으로 직진, 한적한 시골 길을 3~4분 달리니 삼거리가 나온다. 원오곡(오리실) 마을 시내버스 정류장이다. 구 옥구 염전(군산 C.C) 가는 길을 경계로 왼쪽은 애미산(아미산), 오른쪽은 옥화산 능선이다. 예전 옥구군에서 읍내 다음으로 부자가 많았다는 오곡리. 그래서 그런지 마을이 무척 고즈넉하고 여유롭다.

오곡리(五谷里)는 '오리실'에서 유래했다. 읍내에서 오리(2km)가 돼 그리 불렸다 한다. 골짜기가 다섯 개라서 불렀다는 말도 내려온다. 일찍이 담양 전씨가 터를 잡고 살았다. 뒷산 숲에서는 백로와 황새가 떼 지어 서식했단다. 미제지(은파호수)와 선제 저수지 영향으로 만석꾼, 천석꾼이 끊이지 않았고, 예절과 학문이 뛰어난 사람을 많이 배출한 마을로 알려졌다.

군산 지역(옥구·임피)은 조선 시대부터 씨족마을이 만들어졌다. 옥구에는 고·두·문·전·강씨 등이 대성인 김·이·박씨를 누르고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지 손님이 김씨를 찾으면 '아직 김장철 아니니 김치나 찾아보라'고 농담하고, 이씨를 찾으면 '이 대신 서캐나 잡으라' 하고, 박씨를 찾으면 '아따 박 타령 한 번 잘해서 놀부 골려줘 보슈' 하고 놀려댔다고 한다.

삼거리에서 오곡길로 들어선다. 야트막한 산줄기가 타원형을 그리며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근대화의 물살을 잘 견뎌낸 전통 한옥들이 손님을 맞는다. 기와를 얹은 흙 돌담이 예스럽고 단아하다. 금방이라도 삽살개 짖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자연석을 쌓아 만든 돌담과 소나무 숲, 만개한 동백, 구수한 황토 냄새가 조화를 이루며 눈과 코를 즐겁게 한다.

서예가 강암 송성룡 선생 집안과의 인연

▲ 전호승씨가 유재 송기면 유필이 음각된 비석을 가리키고 있다. ⓒ 조종안


화봉재를 세운 전익성 선생 후손 전호성씨(70)를 만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유학, 60년 만에 고향으로 귀촌했다고 한다. 그는 마을 이야기가 나오자 "전북이 낳은 서예가 강암 송성룡 선생도 가난하던 시절 화봉재에 3년쯤 머물면서 학동들을 가르쳤는데, '서당 훈장은 글 팔아먹는 사람'으로 인식되던 시절이어서 지금처럼 존경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며 토석담 옆으로 안내했다. 

"강암 선생 집안과 원오곡 마을은 인연이 깊습니다. 강암 선생 부친(유재 송기면) 유필도 이곳에 남아 있거든요. (토석담 밑에 넘어져 있는 비석을 가리키며) 우연한 기회에 발견했는데 비문 <성균진사>를 전서체로 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재 선생은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조선 후기 유림 4대 학파 중 하나인 '간재학파' 맥을 이은 분이죠. 송하진 전북 지사에게는 할아버지가 됩니다. 날을 잡아 비를 세워 드려야 하는데 (자손들에게) 연락이 없네요."

화봉재 앞에 세워진 남평 문씨 효열문(孝烈門)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다.

▲ 남평 문씨 효열문 ⓒ 조종안


효열문은 익공 형식 공포에 겹처마 팔작 지붕이다. 장대석 기단에 둥글게 다듬은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안으로 들어가니 왼쪽에 전익성 송덕비, 오른쪽에 남평 문씨 효열비가 세워져 있다. 현판 글씨는 면암 최익현의 친필이란다. 건립 연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솟을삼문과 토석 담장, 비각 등이 조화를 이룬 전형적인 비각 형식을 잘 보여준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었던 남평 문씨(전익성의 처)는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했으며, 남편이 원인 모를 질병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게 되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약으로 사용했다. 그래도 별 차도 없이 남편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다가 남편을 따라갔다. 이 사실을 접한 고종 임금이 감동해 1889년(고종 26) 교지를 통해 숙부인(정3품)에 추봉한다. 이후 큰 가뭄이 들어 사방에서 도적이 들끓을 때도 효부의 집이라 해서 감히 범하지 못했다 한다.

"전익성 선생은 저에게 고조부가 됩니다. (전익성) 할아버지는 종5품 의금부 도사를 지냈고, 할머니는 정3품 숙부인에 오르셨으니 몇 단계 차이가 나죠. 효열문은 1905년에 세워졌는데 비석 모양이 다릅니다. 송덕비는 갓이 없고 효열비는 갓이 있잖아요. 비각도 송덕비각은 맞배 지붕인데 효열비각은 팔작 지붕이죠. 모두가 두 분의 계급 차에서 연유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추모재는 '윗서당', 화봉재는 '아랫서당'

▲ 맞배지붕의 송덕비각(앞)과 팔작지붕으로 된 효열비각(뒤) ⓒ 조종안


추모재(追慕齋)는 담양 전씨(도정 공파) 자손들의 서당 건물이다. 지역 유림 미암(嵋巖) 전윤성(1824~1901)이 후학들을 위해 고종 8년(1871)에 건립했다. 서당에서는 명성 있는 선생을 모셔 한학을 교육하고,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했다고 한다. 추모재의 특징은 행랑채나 사랑채에 있던 일반 양반가 서당과 달리 가옥에서 분리 독립된 건물이라는 것.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일자형 팔작 지붕이다. 낮은 기단에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각주 기둥을 세운 형태로 크지는 않지만, 단정한 느낌을 준다. 전면에는 긴 툇마루를 대고 왼쪽부터 훈장님 방, 학생 방, 대청 순으로 배치돼 있다. 관리가 잘 돼 조선 시대 서당 건물 형태를 확인할 수 있어 향토사적 의의가 크다.

미암은 고려 말 사대부의 모범적인 삶을 살다 간 야은 전녹생(1318~1375)의 후손이다. '통정대부 돈령부도정'(조선 시대 왕실에 가까운 친척 간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무를 처리하던 관청의 정3품 관직)을 지낸 바 있어 '도정공파'라 하였다. 저서로는 <성리강설(性理講說)> 1권과 <기문록(記聞錄)> 상·하권이 전한다.

▲ 담양 전시 후손들이 한학을 공부하던 화봉재 ⓒ 조종안


화봉재(花峯齋)는 의금부 도사를 지낸 화봉(花峯) 전익성(1833~1907)이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고종 35년(1898년) 담양 전씨(도사공파) 집안 자녀 교육을 위해 만취정(후학들의 거처)과 함께 세운 단아한 서당 건물이다.

건물은 일자형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처음엔 마을 뒷산(옥화산) 중턱에 세웠으나 1988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건물 왼쪽부터 훈장님 방, 학생 방, 대청이 있었는데, 이전 과정에서 훈장님 방과 학생 방을 합해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다.

미암 전윤성과 화봉 전익성은 형제다. 그래서 원오곡 마을 사람들은 추모재를 '윗서당', 화봉재를 '아랫서당'으로 부른다고 한다. 화봉재 넓은 대청(晩翠亭)에 걸려 있는 현판 중에는 규산 최익철, 화봉 전익성, 심석 송병순, 연재 송병선, 면암 최익현 선생 등 한말(韓末) 군산 지역의 대표적 유학자와 우국지사들 글이 남아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자원봉사 요청 들어오면 언제든"

▲ 군산 지역 유학자와 우국지사 글이 내걸린 화봉재 대청 ⓒ 조종안


전씨는 우리나라 5대 서원에 대해 언급하며 "군산 지역 서원들도 후손과 후학들이 하기에 따라 더 유명해지고 지위가 높아질 수 있다"고 넌지시 말했다.

"경북 영주에 소재한 백운동서원(소수서원),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안동 풍산의 병산서원(하회 마을), 퇴계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안동 도산서원 등이 우리나라 5대 서원으로 꼽히는데요. 그 서원들도 처음엔 '화봉재'보다 작거나 비슷한 서당으로 출발했지만, 대대적인 보수 작업과 중축으로 조선 성리학 교육의 요람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유명한 서원 몇 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도 역사, 정치, 경제적 인맥을 무시할 수 없지만, 후손과 후학들이 노력한 결과죠. 군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 유산에 관심이 많은 전국의 학생과 학자들 시선을 모으기 위해서는 관계 당국의 협조가 있어야겠지만, 후학과 후손들 노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모두가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전호성씨는 화봉재를 일반에게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3~4명 정도 숙박을 원하는 분은 일정을 협의한 후 이용할 수 있단다. 문화유산 해설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조상의 얼이 담긴 문화재 최대 보존은 올바른 사용이고, 문화재 활용을 통해 지역 문화와 경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평소 신념으로 개방하기로 했다"면서 "자원 봉사 요청이 오면 언제든 달려가겠다"고 말했다.

▲ 올바른 문화재 보존을 위해 화봉재를 일반에게 공개하겠다고 밝히는 전호성씨 ⓒ 조종안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와 <매거진군산> 5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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