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니치, 걸림돌이라 느낀 적 없다"
[인터뷰] 극단 메이 대표 재일 조선인 김철의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우선 간략하게 자신에 대한 소개 부탁합니다.
김: "안녕하세요. 저는 김철의라고 합니다. 1971년 7월 1일 일본 오사카 출생 조선 국적 오사카의 조선학교 부속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고급학교 졸업까지 조선학교에 다녔습니다. 중학교 2학년 시기에 영화감독이나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교토예술 단기대학 영상과 입학, 학교 연극부에서 연극 활동 시작했습니다. 지난 1993년에 극단 May(메이) 설립했고, 2009년에 unit(유닛) 항로 시작해 May-항로 두 단체로 작품 발표했습니다. 최근에는 어린이들과 지적 장애인들에게 연극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극단 메이의 창단 계기는 무엇입니까? 역사와 배경, 그리고 연극인으로서 길을 걷게 된 입문 상황 등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원래 저는 영화를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영화와 함께 살았습니다. 세 살 때 가족이랑 함께 채플린 영화를 보러 간 것이 제 영화 인생의 첫 추억입니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채플린을 좋아하시고 (그래서) 채플린 영화는 내 가족의 역사와 항상 함께 걸어왔습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다시 채플린 영화를 봤을 때 그냥 코미디가 아니라 필름에 담긴 인간의 의미를 많이 알게 되고 나서 그때부터 작품도 만들고 출연도 하고 싶다는, 강한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술대학 영화과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친구가 하는 학생 극단으로부터 객원 출연 제의를 받았습니다. 연극이 뭔지 몰랐던 저는 연기 공부를 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 생각하고 출연했습니다. 그러다 졸업하면 극단 활동을 어떻게 할까 고민이 되더군요. 원래 연극지식이 없었기에 (융통성 부족으로) 다른 극단에 입단하는 방법도 모르고….
연극 활동을 하려면 그냥 극단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당시 학생극단을 하던 일본인 친구 2명하고 극단을 만들었습니다. 저까지 포함해서 3명이 시작했습니다. 셋 다 아무런 지식도 없이요."
- 메이가 영어로 5월을 뜻하는데요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극단의 이름은 누가 지었으며 진짜 뜻이 무엇인지도 알려주세요.
"극단의 이름인 메이는 5월을 뜻하는 영어 발음뿐만 아니라 일본말로도 메이라고 발음하는데 다음과 같은 서로 다른 세 한자와 발음이 같습니다. ① 迷 ② 名 ③ 明 . 즉 이것은 헤매고 찾고, 그 과정에서 명작을 만들고 그 결과 많은 길을 밝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극단을 창단한 동기들과 함께 협의해서 결정했습니다."
- 현재 극단 구성은 어떻게 되나요?
"2015년 현재는 고문으로 도와주는 형처럼 지내는 분이 한 명이고 단원은 남성 두 명이고 여성은 세 명입니다. 단장인 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인입니다. 그리고 2014년 말에 12살짜리 학생이 입단했는데 조선학교 출신입니다."
- 유서 깊은 타이니 앨리스 페스티벌에 초대를 받아서 공연한 <영도의 장>을 쓰고 연출하게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24년 만에 북한의 땅을 밟고 친척을 만나서 어릴 때보다 인간을 더 깊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술도 먹게 되는 나이가 되니까 북한 사람과 더 많은 걸 얘기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의 갈등과 고민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보도하는 북한은 아마 한국도 마찬가지인 줄 아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는 나라입니다.
저는 4학년 때부터 북한의 친척을 방문해서 좀 더 민간의 생활에 들어갈 수 있었고, 또 제주라는 고향을 원하면서도 가지 못하는 복잡한 갈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북한을 무대로 한 작품은 봐 본 적도 없었습니다. 이 사회가 북한이라는 한 나라에 대해서 '인간'을 그리는 걸 허락 안 한다면, 돈벌이도 못 하는 작은 극단이 사회가 안 하는 일을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천진에서 헤어지는 날에 잡은 조카의 작은 두 손바닥에 희망이 넘쳐나라는 마음을 담아 '영도의 손바닥(장)'이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오해가 있으면 안 되는데 저는 어떤 국가도 정치도 사상도 모두 다 인간을 학살하는 도구 수단이라고 인식합니다. 때문에 어떠한 국가, 정치, 사상도 지지 안합니다."
- 재일 일본인으로서 <만주전선>과 <흑백다방>을 관람한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너무 잘 봤습니다. 한국 작품은 인간과 사회가 함께 살아있어서 볼 때마다 중력(重力)을 느낍니다. 특히 사회성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힘, 체력도 응당 그렇지만 표현력의 크기를 강하게 느낍니다. 1980년대는 일본이 전후 가장 부유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시대인데 (거기와 비교하면) 한국은 인간과 사회, 정치, 그리고 젊음이 크게 흔들리던 시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TV로 보면서 항상 별나라 세계에서 온 것처럼 불가사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안정된 세계에서 혈육이라는 끈으로 이어진 바다 건너의 세계에 대한 관심은 성장기 청소년 특유의 감성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제게 기하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좋은 작품을 보면 볼수록 서로가 걸어온 역사의 차이 때문에 오히려 생소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걸 실감할 정도 무거운 두 작품이었습니다."
- 두 연극 이외에 보신 다른 한국 연극은 무엇입니까?
"① 제주도의 놀이패 한라산의 작품. ②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의 작품. ③ 극단 자갈치의 작품. ④ 박근형 선생님의 one week ⑤ 20년 정도 전의 한국의 연극인들이 상영한 [아타미 살인사건]"
-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연극이 있습니까?
"항상 머릿속에 있는 신작들."
-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웃음)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직접 보여주기 전까지는요."
- 자이니치(在日朝鮮人) 문제는 김철의 님 연극에서 핵심 화두인가요? 그렇다면 앞으로 이 문제를 연극적으로 어떻게 풀어가고 싶으십니까?
"핵심이나 화두라는 의식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인간을 그리려면 자기가 살아온 길을 먼저 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느꼈을 때 깨달은 저의 신분이 '자이니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작품 역사에서 자이니치를 주제로 한 작품은 너무 종류가 적고 자이니치를 그리면 거의 다 딱딱한 이미지의 작품이 됩니다. 우리는 특수하기보다는 보편타당한 존재가 되어야 하고 문화의 종류도 다양해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새 세대들이 만들어나갈 작품의 미래도 키울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자이니치의 역사와 삶을 인식하는 사람은 아직도 적고 그 존재조차 인식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자이니치의 작품이 미래에는 SF도 좋고 액션도 좋고 공포물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대가 오기 위한 역할자가 되고 싶습니다."
- 연극인으로서 자이니치(재일 조선인)의 문제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이 문제만 아니면 일본 연극계에서 더 인정받고 폭넓은 활동을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나요?
"개인적으로 걸림돌이라고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 자이니치를 인정 못 받는다면 일본 연극계에 있을 필요가 없겠지요."
- 한국 배우와 연출가 및 극작가에 대한 평가 내지는 소감을 부탁합니다.
"저는 특정 국가와 정부도 싫고 특정 사상도 싫고 어떤 이데올로기도 싫어합니다. 예술가가 국가나 정치를 위한 작품을 만들면 그건 예술이 아니라 정치선전입니다. 역사상 예술이라는 탈을 쓴 정치선전은 인간을 학살하는 도구가 되고 국가의 개가 되었습니다. 예술은 사람과 사람을 맺고 이어가는 힘이 있습니다.
언젠가 박극형 선생님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선생님께서는 박정희 정권 시대에서 예술(인)이 가장 힘들었지만 그 시대에 명작이 많이 태어났다고 하셨습니다. 한국이 군사정권에서 민간으로 정권을 이양받는 과정에서처럼 극렬한 산고는 없었지만 비교적 평화로운 일본에 살면서 가만 보면 일본을 비롯한 많은 국가의 문화가 예술의 탈을 쓴 정치선전으로 변해갑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민족과 다른 사람을 낮추어보지 않는 사람과 함께 민들 수 있는 진실한 예술 그리고 이 시대의 명작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 <타이니 앨리스 페스티벌>에 재일조선인의 자격으로 참여해 공연한 이 작품에 대해서 한국에 계신 분들을 위해서 간략하게 소개의 말씀을 부탁합니다.
"<영도의 손바닥>이라는 작품을 공연했습니다. 24년 만에 방문한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그린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가장 가깝고 가장 먼 나라입니다. 어릴 때 3번 방문한 나라에서 이제 내가 그 당시 방문한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고 방문했습니다. 지금에서야 보이는 현실과 많이 부닥치면서 언론의 프리즘을 넘어서야 접근 가능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 일본에서 연극의 위치와 위상은 답보 상태인가요? 쇠퇴 혹은 발전인가요?
"큰 무대 연극은 어떨까요? 전 소극장에서 삽니다. 오사카가 주된 활동 지역입니다. 도쿄는 오사카에 사는 사람들과는 또 다른 생각이 있을 것이고 후쿠오카와 홋카이도를 비롯한 서로 다른 도시의 연극은 각자 다른 느낌이 있을 겁니다. 세대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힘이 모든 연극의 힘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큰 파도는 이제 어렵다고 느낍니다.
다른 문화와의 교류가 없고 극장과 함께 사는 연극이 옛날보다 너무 적어졌습니다. 극장의 책임도 큽니다. 일시적으로 소극장 활성화를 위한 큰 움직임이 있었는데 손님 동원을 많이 하는 극단만 우대해서 작은 극단에 대한 차별도 많았습니다. 극장을 믿지 못한 극단도 그때 많이 생겼고 그것이 함께 자라지 못하게 된 하나의 사실이기도 합니다. 결국 눈앞의 영광만 요구한 자세가 지금의 상태를 키웠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이런 태도와 자세가 크게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무너질 거로 봅니다. 어쨌든 국가의 밑에선 어느 예술도 자라지 않기 때문에 지하 혁명적인 작품이 어떻게 자라는지 연극의 미래도 거기에 걸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본이 경제적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1980년대 문화가 싫은데 그러나 그 당시의 지하 문화들은 오히려 힘 있고 미친 듯이 성공신화 사회의 반대쪽에서 활약해 다양한 문화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쇠퇴와 발전은 야누스입니다."
김: "안녕하세요. 저는 김철의라고 합니다. 1971년 7월 1일 일본 오사카 출생 조선 국적 오사카의 조선학교 부속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고급학교 졸업까지 조선학교에 다녔습니다. 중학교 2학년 시기에 영화감독이나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교토예술 단기대학 영상과 입학, 학교 연극부에서 연극 활동 시작했습니다. 지난 1993년에 극단 May(메이) 설립했고, 2009년에 unit(유닛) 항로 시작해 May-항로 두 단체로 작품 발표했습니다. 최근에는 어린이들과 지적 장애인들에게 연극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극단 메이의 창단 계기는 무엇입니까? 역사와 배경, 그리고 연극인으로서 길을 걷게 된 입문 상황 등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원래 저는 영화를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영화와 함께 살았습니다. 세 살 때 가족이랑 함께 채플린 영화를 보러 간 것이 제 영화 인생의 첫 추억입니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채플린을 좋아하시고 (그래서) 채플린 영화는 내 가족의 역사와 항상 함께 걸어왔습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다시 채플린 영화를 봤을 때 그냥 코미디가 아니라 필름에 담긴 인간의 의미를 많이 알게 되고 나서 그때부터 작품도 만들고 출연도 하고 싶다는, 강한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술대학 영화과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친구가 하는 학생 극단으로부터 객원 출연 제의를 받았습니다. 연극이 뭔지 몰랐던 저는 연기 공부를 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 생각하고 출연했습니다. 그러다 졸업하면 극단 활동을 어떻게 할까 고민이 되더군요. 원래 연극지식이 없었기에 (융통성 부족으로) 다른 극단에 입단하는 방법도 모르고….
연극 활동을 하려면 그냥 극단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당시 학생극단을 하던 일본인 친구 2명하고 극단을 만들었습니다. 저까지 포함해서 3명이 시작했습니다. 셋 다 아무런 지식도 없이요."
- 메이가 영어로 5월을 뜻하는데요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극단의 이름은 누가 지었으며 진짜 뜻이 무엇인지도 알려주세요.
"극단의 이름인 메이는 5월을 뜻하는 영어 발음뿐만 아니라 일본말로도 메이라고 발음하는데 다음과 같은 서로 다른 세 한자와 발음이 같습니다. ① 迷 ② 名 ③ 明 . 즉 이것은 헤매고 찾고, 그 과정에서 명작을 만들고 그 결과 많은 길을 밝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극단을 창단한 동기들과 함께 협의해서 결정했습니다."
- 현재 극단 구성은 어떻게 되나요?
"2015년 현재는 고문으로 도와주는 형처럼 지내는 분이 한 명이고 단원은 남성 두 명이고 여성은 세 명입니다. 단장인 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인입니다. 그리고 2014년 말에 12살짜리 학생이 입단했는데 조선학교 출신입니다."
- 유서 깊은 타이니 앨리스 페스티벌에 초대를 받아서 공연한 <영도의 장>을 쓰고 연출하게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24년 만에 북한의 땅을 밟고 친척을 만나서 어릴 때보다 인간을 더 깊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술도 먹게 되는 나이가 되니까 북한 사람과 더 많은 걸 얘기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의 갈등과 고민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보도하는 북한은 아마 한국도 마찬가지인 줄 아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는 나라입니다.
저는 4학년 때부터 북한의 친척을 방문해서 좀 더 민간의 생활에 들어갈 수 있었고, 또 제주라는 고향을 원하면서도 가지 못하는 복잡한 갈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북한을 무대로 한 작품은 봐 본 적도 없었습니다. 이 사회가 북한이라는 한 나라에 대해서 '인간'을 그리는 걸 허락 안 한다면, 돈벌이도 못 하는 작은 극단이 사회가 안 하는 일을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천진에서 헤어지는 날에 잡은 조카의 작은 두 손바닥에 희망이 넘쳐나라는 마음을 담아 '영도의 손바닥(장)'이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오해가 있으면 안 되는데 저는 어떤 국가도 정치도 사상도 모두 다 인간을 학살하는 도구 수단이라고 인식합니다. 때문에 어떠한 국가, 정치, 사상도 지지 안합니다."
▲ 동시에 포즈를 취한 김철의와 김혜령김철의님과 극단 아랑삶새의 배우 김혜령님과 함께 ⓒ 이형석
- 재일 일본인으로서 <만주전선>과 <흑백다방>을 관람한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너무 잘 봤습니다. 한국 작품은 인간과 사회가 함께 살아있어서 볼 때마다 중력(重力)을 느낍니다. 특히 사회성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힘, 체력도 응당 그렇지만 표현력의 크기를 강하게 느낍니다. 1980년대는 일본이 전후 가장 부유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시대인데 (거기와 비교하면) 한국은 인간과 사회, 정치, 그리고 젊음이 크게 흔들리던 시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TV로 보면서 항상 별나라 세계에서 온 것처럼 불가사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안정된 세계에서 혈육이라는 끈으로 이어진 바다 건너의 세계에 대한 관심은 성장기 청소년 특유의 감성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제게 기하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좋은 작품을 보면 볼수록 서로가 걸어온 역사의 차이 때문에 오히려 생소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걸 실감할 정도 무거운 두 작품이었습니다."
- 두 연극 이외에 보신 다른 한국 연극은 무엇입니까?
"① 제주도의 놀이패 한라산의 작품. ②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의 작품. ③ 극단 자갈치의 작품. ④ 박근형 선생님의 one week ⑤ 20년 정도 전의 한국의 연극인들이 상영한 [아타미 살인사건]"
-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연극이 있습니까?
"항상 머릿속에 있는 신작들."
-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웃음)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직접 보여주기 전까지는요."
- 자이니치(在日朝鮮人) 문제는 김철의 님 연극에서 핵심 화두인가요? 그렇다면 앞으로 이 문제를 연극적으로 어떻게 풀어가고 싶으십니까?
"핵심이나 화두라는 의식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인간을 그리려면 자기가 살아온 길을 먼저 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느꼈을 때 깨달은 저의 신분이 '자이니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작품 역사에서 자이니치를 주제로 한 작품은 너무 종류가 적고 자이니치를 그리면 거의 다 딱딱한 이미지의 작품이 됩니다. 우리는 특수하기보다는 보편타당한 존재가 되어야 하고 문화의 종류도 다양해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새 세대들이 만들어나갈 작품의 미래도 키울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자이니치의 역사와 삶을 인식하는 사람은 아직도 적고 그 존재조차 인식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자이니치의 작품이 미래에는 SF도 좋고 액션도 좋고 공포물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대가 오기 위한 역할자가 되고 싶습니다."
▲ 야외에서 인터뷰를 하는 두 사람신주쿠 어원 근처에 있는 까페에서 ⓒ 이형석
- 연극인으로서 자이니치(재일 조선인)의 문제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이 문제만 아니면 일본 연극계에서 더 인정받고 폭넓은 활동을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나요?
"개인적으로 걸림돌이라고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 자이니치를 인정 못 받는다면 일본 연극계에 있을 필요가 없겠지요."
- 한국 배우와 연출가 및 극작가에 대한 평가 내지는 소감을 부탁합니다.
"저는 특정 국가와 정부도 싫고 특정 사상도 싫고 어떤 이데올로기도 싫어합니다. 예술가가 국가나 정치를 위한 작품을 만들면 그건 예술이 아니라 정치선전입니다. 역사상 예술이라는 탈을 쓴 정치선전은 인간을 학살하는 도구가 되고 국가의 개가 되었습니다. 예술은 사람과 사람을 맺고 이어가는 힘이 있습니다.
언젠가 박극형 선생님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선생님께서는 박정희 정권 시대에서 예술(인)이 가장 힘들었지만 그 시대에 명작이 많이 태어났다고 하셨습니다. 한국이 군사정권에서 민간으로 정권을 이양받는 과정에서처럼 극렬한 산고는 없었지만 비교적 평화로운 일본에 살면서 가만 보면 일본을 비롯한 많은 국가의 문화가 예술의 탈을 쓴 정치선전으로 변해갑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민족과 다른 사람을 낮추어보지 않는 사람과 함께 민들 수 있는 진실한 예술 그리고 이 시대의 명작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 <타이니 앨리스 페스티벌>에 재일조선인의 자격으로 참여해 공연한 이 작품에 대해서 한국에 계신 분들을 위해서 간략하게 소개의 말씀을 부탁합니다.
"<영도의 손바닥>이라는 작품을 공연했습니다. 24년 만에 방문한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그린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가장 가깝고 가장 먼 나라입니다. 어릴 때 3번 방문한 나라에서 이제 내가 그 당시 방문한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고 방문했습니다. 지금에서야 보이는 현실과 많이 부닥치면서 언론의 프리즘을 넘어서야 접근 가능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 일본에서 연극의 위치와 위상은 답보 상태인가요? 쇠퇴 혹은 발전인가요?
"큰 무대 연극은 어떨까요? 전 소극장에서 삽니다. 오사카가 주된 활동 지역입니다. 도쿄는 오사카에 사는 사람들과는 또 다른 생각이 있을 것이고 후쿠오카와 홋카이도를 비롯한 서로 다른 도시의 연극은 각자 다른 느낌이 있을 겁니다. 세대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힘이 모든 연극의 힘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큰 파도는 이제 어렵다고 느낍니다.
다른 문화와의 교류가 없고 극장과 함께 사는 연극이 옛날보다 너무 적어졌습니다. 극장의 책임도 큽니다. 일시적으로 소극장 활성화를 위한 큰 움직임이 있었는데 손님 동원을 많이 하는 극단만 우대해서 작은 극단에 대한 차별도 많았습니다. 극장을 믿지 못한 극단도 그때 많이 생겼고 그것이 함께 자라지 못하게 된 하나의 사실이기도 합니다. 결국 눈앞의 영광만 요구한 자세가 지금의 상태를 키웠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이런 태도와 자세가 크게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무너질 거로 봅니다. 어쨌든 국가의 밑에선 어느 예술도 자라지 않기 때문에 지하 혁명적인 작품이 어떻게 자라는지 연극의 미래도 거기에 걸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본이 경제적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1980년대 문화가 싫은데 그러나 그 당시의 지하 문화들은 오히려 힘 있고 미친 듯이 성공신화 사회의 반대쪽에서 활약해 다양한 문화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쇠퇴와 발전은 야누스입니다."
덧붙이는 글
후아이엠에도 올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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