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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다를 보러 달리다

[시골자전거 삶노래] 바람만 쐬고 돌아온 나들이

등록|2015.05.02 15:30 수정|2015.05.02 15:30
아침 일찍 이불을 빨래한다. 신나게 이불을 빨아서 마당에 넌다. 여러 날 잇달아 퍼붓던 사월비가 그치고 새로 접어든 오월 첫날 기쁘게 이불을 빨래한다. 앞으로 여러 날 더 햇볕이 고우리라 느낀다. 이 고운 볕에 겨우내 묵은 이불을 맡기자고 생각한다.

이불을 빨래하고 난 뒤 아침을 차려서 함께 먹는다. 우리 집 마당에서 뜯은 풀을 고맙게 누린다. 마루문도 열고 부엌문도 연다. 마당과 뒤꼍에 가득한 유채꽃과 갓꽃이 노란 봄내음을 가득 베푼다.

▲ 자전거순이와 함께 ⓒ 최종규


▲ 감잎이 새로 돋은 빛깔을 바라본다. ⓒ 최종규


오늘은 어느 바다로 갈까. 발포로도 가 볼까 싶으나, 그곳은 청소년수련원 공사를 하느라 시끄럽기도 하고, 물빛도 더러워졌다. 녹동까지는 멀지만, 풍남까지는 가볼 만하다 싶다. 풍남 쪽으로 자전거를 달린다.

먼저 면소재지에 들러서 빵 몇 조각을 장만한다. 바닷가에서 놀 아이들이 먹을 주전부리다. 면소재지 빨래집 처마에 제비가 깃든 모습을 본다. 자전거를 달리다가 멈추고는 제비 날갯짓을 바라본다.

면소재지를 벗어나 풍남 쪽으로 달리니 길이 시원하다. 시골길이니 자동차가 드물기도 하지만, 이 깊은 고흥 시골자락까지 자동차를 몰고 찾아오는 관광객은 매우 적다. 더없이 호젓한 마실길이다.

▲ 자전거로 함께 달리는 길 ⓒ 최종규


▲ 군내버스가 서로 엇갈린다 ⓒ 최종규


길가 감나무마다 감잎이 옅푸르다. 새봄에 돋는 감잎은 노랑이 듬뿍 밴 푸른 빛깔인데, 이를 가리킬 만한 빛이름이 있을까 궁금하다. 나는 '노푸르다' 같은 말을 한번 지어 보았다. 노랗고 푸른 빛깔이라는 뜻이다. 사월에 처음 돋는 감잎은 오월 첫무렵까지 '노랑이 듬뿍 밴 풀빛'인데, 여름에는 짙푸른 빛깔로 바뀌고, 가을에는 알록달록 새로운 빛깔로 거듭난다. 철마다 다르면서 고운 감잎빛이라고 느낀다.

시골길이든 도시길이든, 이 길을 걷거나 자전거로 달릴 때면 '나무가 있느냐 없느냐'로 크게 달라진다고 느낀다. 나무가 잘 자란 길을 걷거나 달리면 온몸이 상큼하면서 즐겁다. 나무가 없는 길을 걷거나 달리면,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매섭도록 춥다. 나무가 있는 길을 걷거나 달리면, 눈이 맑게 트이면서 홀가분한 몸이 된다. 나무가 없는 길을 걷거나 달리면, 눈을 둘 데가 없이 바쁘기 일쑤이다.

▲ 나무 없는 길이 무척 길지만, 군데군데 후박나무가 몇 그루 자란다. ⓒ 최종규


나무가 있건 없건 나 스스로 마음을 곧게 다스린다면 홀가분하거나 즐거울 만하리라 본다. 그런데, 나무가 있는 길과 없는 길은 매우 다르다. 그리 크지 않은 나무라 하더라도 그늘이 드리우는 나무라면, 이 나무 곁을 스치고 지나갈 적마다 '아, 시원하네' 하고 느낀다.

시골에서는 논이나 밭에 그늘이 진다면서 나무를 모조리 벤다.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을 텐데, 새마을운동 뒤부터 이런 짓이 널리 퍼졌다. 바닷가조차 나무가 몇 없다. 바람막이 나무가 없는 바닷가도 있고, 마을에서도 바람막이 구실을 할 나무가 없기 일쑤다.

나무가 우거져서 그늘을 짙게 드리우면 햇볕을 덜 먹는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해님은 하늘을 가로질러서 골고루 비춘다. 해는 빛뿐 아니라 볕을 베푼다. 햇빛을 덜 받아도 햇볕은 늘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무가 서기에 드센 바닷바람을 많이 막아 줄 뿐 아니라, 나무뿌리가 흙을 단단히 움켜쥐고, 나무 둘레로 여러 풀이 골고루 자라서 거센 빗줄기에도 흙이 덜 쓸린다. 나무는 열매와 꽃을 사람한테 베풀고, 그늘을 주며, 푸른 숨결(바람)을 나누어 줄 뿐 아니라, 흙이 한결 기름지도록 북돋아 준다. 이러면서 땔감을 주고, 커다란 나무는 제 몸을 바쳐서 사람이 집을 짓도록 해 준다.

▲ 바다가 보이는 길 ⓒ 최종규


▲ 바닷가에 닿다 ⓒ 최종규


▲ 고흥 바다 ⓒ 최종규


▲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곳 ⓒ 최종규


자전거는 지등마을과 이목동마을을 지나고 가화정미소 자리를 지난다. 황촌마을에 닿을 무렵부터 바다가 보인다. 풍남까지 가려는 생각이었는데, 황촌마을에서 바다가 보이기에 이쪽 바닷가를 달리기로 한다. 바다를 바라보고 바닷내음을 맡으면서 자전거를 천천히 몰다가, 여의천마을 바닷가에서 자전거를 세운다. 황촌마을 바닷가에는 나무 한 그루조차 없어서 자전거를 세울 만한 데가 없지만, 여의촌마을 바닷가에는 바람막이 나무가 제법 있고, 평상과 걸상도 있다.

나무그늘에 자전거를 세운다. 무너진 시멘트계단을 아슬아슬하게 밟으면서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곳까지 가 본다. 아이들이 오르내리기에는 너무 높은 시멘트계단인데, 바닷물을 맞고 계단이 쩍쩍 갈라졌다. 어느 계단은 길에서 퍽 먼 데까지 흩어졌다.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곳에는 시멘트계단이 무너지고 부서진 조각이 곳곳에 널브러진다. 이 볼꼴사나운 모습은 무엇일까 아리송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볼꼴사납도록 팽개쳐졌을까. 늘 물결이 치는 바닷가인데, 시멘트계단은 어쩜 이렇게 허술하게 지었을까. 철근조차 안 쓰고 시멘트만 부어서 어설피 꾸민 듯하다.

곳곳에 널브러진 시멘트조각이 많은데다가, 쓰레기도 많다. 이곳에 놀러온 사람이 버린 쓰레기일까, 아니면 바닷물에 쓸려 온 쓰레기일까. 바닷가를 아이들과 거니는데, 저쪽에서 뭐가 하나 떠내려 온다. 작은아이가 그것을 보더니 "저기 뭐가 와!" 하고 소리치며 그쪽으로 간다. 아이와 함께 다가서니 스티로폼 상자이다.

▲ 나무 그늘에 자전거를 세운다 ⓒ 최종규


▲ 시멘트계단이 망가진 채 널브러졌다. ⓒ 최종규


▲ 이런 시멘트 쓰레기는 어디에서 흘러왔을까. ⓒ 최종규


▲ 바닷물에 낡고 닳으며 '세월 때'를 먹는 쓰레기. ⓒ 최종규


▲ 바닷가로 떠밀려 온 스티로폼 쓰레기 ⓒ 최종규


▲ 예전에는 고운 모래밭이었을 텐데, 이제는 걸어다니기도 안 좋은 곳으로 바뀌고 말았다. ⓒ 최종규


온갖 쓰레기만 널브러진 바닷가에 서고 싶지 않아 나무 그늘로 돌아간다. 나무 그늘 둘레로 조그맣게 풀밭이 이루어졌고, 큰돌이 많다. 두 아이는 돌을 타면서 나무 둘레에서 논다. 봄바다를 보러 왔지만 봄바다를 바라보는 맛은 없다. 그래도, 바닷바람을 쐬면서 나무와 함께 이곳에서 놀고 쉬자고 생각한다. 두 아이는 땀이 나도록 뛰놀고, 나는 바람과 햇볕을 누리면서 책을 읽는다. 틈틈이 주전부리를 나누어 먹는다.

한 시간 반 즈음 놀고 나서 손과 낯을 씻는다.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아이는 수레에서 잠든다. 큰아이도 기운을 많이 쓰며 놀았는지 샛자전거에 앉아 힘들어 한다. 나긋나긋 노래를 부르며 우리 집으로 돌아간다. 마을마다 어르신들은 마늘밭에 농약을 치느라 부산하다. 농약바람이 일지 않는 곳으로 돌면서 자전거를 달린다.

▲ 나무 그늘 둘레에서 돌하고 놀다가 살짝 누워서 쉰다. ⓒ 최종규


▲ 무너지고 망가지고, 시멘트덩이가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바닷가에 서다. ⓒ 최종규


▲ 남녘 다도해 바닷가에 아름다운 물빛과 하늘빛이 드리울 수 있기를 빌며, 아쉬운 마음에 바닷가를 더 거닐다. ⓒ 최종규


▲ 바닷가 놀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자 ⓒ 최종규


▲ 집으로 돌아가는 길 ⓒ 최종규


▲ 유채꽃이 지면서 씨앗을 맺는 새로운 오월. ⓒ 최종규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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