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덜컥 퇴직한 남편... 우리집에 대학생만 둘입니다

[공모-위기의 순간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사채업자에게 대들던 그 기세로

등록|2015.05.08 08:13 수정|2015.05.08 09:20

▲ 갑작스런 퇴직 후 남편의 어깨가 축 처졌습니다. ⓒ sxc




"다녀와요. 일찍 와요. 술 많이 마시지 말고."

현관문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에 나는 일상적인 당부를 했다.

"응."

짧은 대답을 남기고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지는 남편의 얼굴에도 일상적인 웃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속은 아마도 울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내가 남편에게 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거실의 텔레비전 화면에선 유명한 요리사가 재미있는 입담으로 봄철 기운을 돋아줄 요리를 소개하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나는 모든 게 나와는 별개인, 전혀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집안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요즘 우리 집은 겉으로는 평온한 듯하지만 속으로는 불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작년 봄에 남편이 갑작스럽게 퇴직을 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년퇴직이라는 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겪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뜻하지 않는 이유로 남편이 회사를 그만 둬 무척 당황했다.

그렇다고 모아둔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아이 둘이 대학생이다 보니, 당장의 생활마저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퇴직하기 전에 다른 곳을 알아보기도 했고, 수입이 연결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는데... 현실이라는 게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남편이 퇴직 후 자리를 잡으려 했던 곳도 불경기라는 이유로 남편의 입사를 뒤로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당황한 남편은 그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지만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실감할 뿐이다.

술에 취한 남편의 한 마디... 마음이 아프다

"다들 힘들어 하더군. 게다가 나 한 사람 쓰느니 젊은 아이들 둘 쓰는 게  더 부담이 없으니. 그게 틀린 것 아니니 좀 서운하기도 하고, 애들만 자리 잡았으면 좀 쉬고 싶은데 말이요. 허허. 모든 게 내 업보라 생각하고 있다오."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혼잣말처럼 흘리던 남편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 아침이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남편은 집을 나선다. 아마도 남편은 일을 찾아 지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뿐인가? 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자신들이 아직 학생의 신분이라는 게 짐이 된 듯, 앞에서는 밝은 웃음으로 대하다가도 뒤돌아서면 그늘진 얼굴을 보여 마음이 아프다.

거실에 이어 안방으로 들어서자 화장대 문갑 위에 놓인 결혼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27년 전, 환하게 웃고 있는 남편과 나의 웃음을 마주하자 코끝이 싸해지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세월이 흐른 만큼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20대의 열정적인 사랑, 30대의 불안한 사랑, 40대의 무덤덤한 사랑, 그리고 50대의 든든한 사랑으로 함께 해 온 우리 부부였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늘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안정적인 행복을 꿈꾸던 30대였다. 아이 둘을 낳고 키우면서 행복을 느낄 때쯤 작게나마 하던 남편의 사업이 부도를 맞는 바람에 우리는 모든 것을 내놓아야 했다.

집을 줄여 이사를 가는 것을 시작으로 써보지도 못한 돈을 독촉하는 전화에 시달려 전화기 코드를 빼놓기도 했다. 또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반복해 부탁해야 했고,  각종 공과금 용지는 수북이 쌓였다. 거기에 남편은 남편대로 무력한 모습을 보여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당장의 끼니마저 걱정되던 때, 나는 툭하면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을 맞이해야 했고 어느새 나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다가오는 날들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날카롭게 덤벼들 기세였다. 그러다보니 몸이 지치고 마음도 따라 지쳐 살아가야 할 의미조차 찾지 못했었다. 그러던 나에게 정신을 차리게 해 준 것은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였다.

그 날도 숨죽인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서너 명의 남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순간 분위기가 좋지 않으리라 짐작하고 아이들을 방으로 들여보낸 후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도 못한 채 그들과 마주했다.

"바깥양반은 어디에 계시나? 도통 연락이 돼야지. 아니, 남의 돈을 썼으면 갚아야지. 이렇게 전화를 해도 안 받고, 피하면 되나. 양심이 있어야지. 사람이."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사채업자로 특유의 옷차림과 위압적인 말투로 나를 겁줬다.

"어떻게 할 거유. 바깥양반을 불러다 앉히든가, 돈을 내놓든가, 아니면..."

순간, 아이들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당장 여기에서 나가요. 아니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그리고 당신들이 찾는 사람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이니 당신들이 찾아서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처음으로, 지금까지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들의 눈을 똑바로 보며 힘을 주어 말했다. 아마도 그 때의 내 눈빛 속에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절박함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내 모습에 당황한 그들은 오히려 나를 진정 시키기에 바빴고 자신들의 느닷없는 방문을 사과한 뒤 나를 한참 동안 어르고 달랬다.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은 다달이 갚아나가겠다는 각서를 쓰는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이름을 적어 건넸다. 그들이 돌아간 뒤에 나는 겁먹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를 보며 두려움과 맞설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당장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꿈틀거린 '희망'

▲ 고개 숙인 아버지들.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 연합뉴스


그 때는 초등학교에 오전, 오후반이 있어서 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 1시부터 7시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다. 그 때의 나는 안간힘을 쓰며 하루하루를 보냈고 남편도 다시 직장에 다니게 됐다. 그렇게 빚도 조금씩 갚아가며 생활도 안정되어갔다.

그렇게 10년 정도의 세월을 보내고 나니 신용불량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카드 발급도 자유로워졌고 빚도 다 갚았고 저축도 할 수 있는 날이 왔다. 그런데, 다시 찾아온 이 위기에 벌써부터 몸이 움츠러든다. 다시 또 그 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힘든 시간을 잘 버텼는데, 지금은 그 때에 비하면 아이들이 많이 자랐고, 남편도 일을 부지런히 찾고 있으니 분명 다시 일을 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릴 뿐... 다른 무엇보다 지금은 빚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갑자기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그리고 은근한 배짱도 부려본다. 하늘에서 누군가 보고 있다면 이런 나를 죽이기야 하겠냐는... 나는 휴대폰을 열어 남편과 아이들을 불러냈다.

'오늘 저녁은 제육볶음이에요. 일찍 와서 같이 먹읍시다.'

곧이어 대답이 왔다.

'좋군, 한 잔 합시다.'
'땡큐죠 엄마...'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이 활짝 웃고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의 웃음과 함께...

○ 편집ㅣ최유진 기자

덧붙이는 글 위기의 순간들 응모글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