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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장에 사는 '신'이 심리치료사를 찾은 까닭

[독서에세이] 한스 라트의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등록|2015.05.10 16:26 수정|2015.05.10 16:26

▲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표지 ⓒ 열린책들

소크라테스와 한나절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애플의 모든 기술을 그에게 줄 것이라고, 생전의 스티브잡스는 말했다. 스티브잡스의 이 멋진 말을 들은 나도 그 이후 한참 동안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꿈꾸곤 했다.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내 생각의 허점들, 그러니까 모순과 비논리에서 비롯된 잘못된 사고방식이나 고정관념들을 샅샅이 찾아내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된 생각을 쌓아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만 된다면 내 삶이 조금은 더 단순명료해질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후 나는 소크라테스를 만나진 못했다. 대신, 책에서 소크라테스와 또 다른 소크라테스급 현자들과 떠듬떠듬 대화를 나눌 기회는 얻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이 아주 조금이라도 고쳐지고 나아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엔 이런 생각이 든다. 내 잘못된 부분을 과연 어디까지 고칠 수 있을까. 내 사고가 가을 하늘만큼 청명해질 날이 과연 오기는 올까. 만약 그런 날이 내 살아 생전엔 오지 않는다면, 나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차라리 어떤 단 하나의 진리를 좇는 삶을 사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삶의 방식에도 문제가 하나 있다. 그 단 하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연스레 '신'이란 존재가 떠올랐다. 신이라면, 분명 다 알고 있겠지. 내 삶을 이끌어줄 단 하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신이라면, 또한 분명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내게 알려주고 싶겠지. 그렇다면 문제는 신과 한나절이라도 이야기할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일 텐데 어떻게 하면 신과 만날 수 있을까.

신자들은 성경을 통해 신과 만나겠지만, 나는 소설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신은 지구에서 살고 있었다. 직업은 서커스 광대란다. 사는 곳은 불법 쓰레기장의 한 모빌 트레일러이고. 신은 속을 끓이고 끓이던 끝에 심리치료가 필요한 생태까지 와 있었다. 독일작가 한스 라트의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에서 신은 심리치료사인 야코비에게 슬쩍 말을 건네왔다.

"난 신이오. 우리끼리 얘기지만 난 많이 망가졌소. 당신이 날 도와주면 좋겠소, 야코비 박사." - 본문 중에서

"내가 뭐겠어? 인간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냐"

완벽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별 볼 것 없어 보이는 누군가가 자신이 원래는 인간이 아닌 신이라며 말을 걸어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아마도 야코비 박사가 처음 그랬던 것처럼 우선은 정신분열증을 의심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곤 괜히 엮여 난감한 상황에 부딪히기 전에 도망가는 게 상책일 테다. 하지만 우리가 만약 야코비 박사처럼 심리치료사라면 신이거나 인간인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볼 법도 하다. 신이건 인간이건 간에 어쨌든 그는 지금 도움이 필요한 상태니까.

본인의 이름을 아벨 바우만이라 소개한 신이 심리치료사에게 털어놓은 고민은 자신이 더는 전지전능하지 않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불꽃놀이 하듯 빅뱅을 일으킨 신은 그간 전지전능한 힘으로 동물 몸이나 인간 몸을 빌려 건강하게 살아온 터였다. 그런데 이십 년 전부터 기력이 점점 쇠해지더니 지금은 꼭 죽을 것만 같아졌다는 것이다. 완전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는 신. 신의 걱정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신이 탈진 상태가 되었다는 건 세상이 탈진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라는 것. 즉 인간이 탈진 상태가 되어가는 것이 신은 걱정이었다.

물론 야코비 박사는 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과연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신이라는 인간을.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자꾸 벌어진다. 신이 자꾸 마술을 부려대는 것이다. 야코비 박사가 필요할 때마다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신. 화수분이 연상되듯 자꾸만 채워지는 커피잔의 커피. 착착 들어맞는 예언들. 신은 야코비 박사의 생각까지 읽는 듯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를 데리고 다른 차원으로 여행까지 떠난다.

이 정신분열증 광대가 어쩌면 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통에 야코비는 어쩔 수 없이 신에게 묻는다. 만약 당신이 정말 신이라면, 세상을 통째로 없애버리거나 아니면 원하는 대로 바꾸면 될 일이 아니냐고. 왜 혼자 속만 태우고 있는 거냐고. 이에 대한 신의 대답은 간단했다. 본인이 더는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바꿀 수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왜 힘을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 

"야콥, 인간들 없이는 내가 뭐겠어? 인간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냐.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을 때만 움직일 수 있어. 아무도 선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나는 힘을 쓸 수가 없다고." - 본문 중에서

신을 믿는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단지 신의 존재를 믿는 것, 그것만을 말하는 걸까. 가끔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본다. 신앙이란, 신의 존재를 믿는 것 그 자체일 뿐이라고. 하지만 내게 신앙이란, 신의 존재를 믿음으로써 신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책에서 아벨 바우만이란 신은 말한다. 신을 믿는다는 건, 선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신을 믿는 사람들이 줄어든다는 건, 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줄어든다는 뜻이라고. 그러니까 신의 말은, 선을 잃어버린 사람들 때문에 본인의 능력이 자꾸만 사라져가고 있다는 거였다. 그렇다는 건, 인간이 점점 탈진 상태에 이르게 된 원인은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선한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있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인류가 겪고 있는 불행의 탈진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신은 원래 원하면 어느 몸에서든 살 수 있었다. 아벨 바우만이란 남자의 몸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언제든 다시 나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힘을 잃은 신은 나오지 못했다. 이십 년 넘게 늙어가는 한 남자의 몸에 갇혀 시름하고만 있던 이유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 몸에 갇힌 채 신은 죽어버리기까지 한다. 어느 전시회장에서 대천사 미카엘의 동상이 넘어지는 바람에 사람을 구하려다 그만 검이 심장을 관통한 것이다.

야코비 박사는 신이 죽기 전부터 이미 아벨 바우만이라는 사람이 신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신이 다른 누군가의 몸으로 들어가 또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리라는 것도 믿게 되었다. 야코비 박사는 신이 죽은 뒤 가족이 있는 쿠바로 향하는 유람선을 탄다. 왠지 이 배 안에 신이 있을 것만 같다는 예감을 품고서. 신은 정말 살아 돌아온 것일까.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배가 갑자기 좌우로 요동치던 그때, 야코비 박사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폭발로 선체 외부에 구멍이 뚫렸고, 14갑판 아래 선원실에 지금 스무 명 이상이 갇혀 있어. 10분 안에 문을 열어야 해. 안 그러면 입구가 물속에 잠길 거야." - 본문 중에서

목소리를 들은 야코비는 재빨리 엘리베이터로 뛰어가 아래로 내려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이미 반쯤은 잠긴 복도가 눈앞에 들어온다. 선원실로 접근하기 위해선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할 상황이다. 그때 라이터란 남자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를 따르며 야코비 박사는 생각한다.

나는 물속으로 잠수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그러나 정리가 쉽지 않다. 다만 침몰하는 호화유람선 안에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목숨을 걸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묘한 행복감을 느낀다. - 본문 중에서

신을 믿게 된 야코비가 선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소설은 끝이 났다. 그리고 난 답을 얻었다. 신이 말하는 진리란 '선'이 확실하다는 것을. 나는 내가 신을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신이 아벨 바우만 같다면, 신이 우리 인간을 위해 그처럼 걱정하고 애쓰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신이 선이라면, 마냥 믿고 싶어지기는 하다.

이런 신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믿으면 좋겠다는 생각 또한 든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불행의 탈진 상태를 벗어날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다. 선한 사람들이 많아진 세상은 분명 더 살기 좋아질 것이다.
덧붙이는 글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한스 라트/ 열린책들/ 2015년 4월 3일/ 1만2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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