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촌 리모델링 사업'에 선정된 추자면 예초리
[우리 마을을 찾아서 12] 추자면 예초리
▲ 추자도 항공사진. ⓒ 신용철
추자도는 제주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부속섬으로 행정구역상 제주도 제주시 추자면에 속해 있다.
제주항에서 배로 1시간 20여분 걸리는 추자도는 모두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추자도를 둘러싸고 있는 섬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바다 경치가 빼어나다. 추자군도의 전체 면적은 7.05㎢이다. 인구는 2050명(올 3월말 현재)이며 추자대교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2개의 주 섬(상추자도와 하추자도)으로 구성돼 있다. 행정구역상 제주도에 속해 있으나 지리적으로 전라남도 완도군과 접해 있다. 그래서인지 추자도에서는 제주도 사투리보다는 전라도 사투리를 자주 듣게 된다.
추자도는 조선 초기까지 제주목에 속해 있었지만 이후 전라남도 영암군에 속했다. 1896년 다시 완도군으로 편입됐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전라남도 제주군에 편입됐다.
박기선 추자지역 정책보좌관은 "추자도는 지리적 정서나 문화가 제주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라며 "최근 추자를 운항하던 선박 두 척 가운데 한 척이 선령 기준 만료 등으로 중단되면서 한 척만 운항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제주도에서 소외됐다고 느끼며 추자면민들의 불편과 원성이 극에 달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5월 현재 추자도를 경유해 제주에서 목포 사이 단 하루 한번 운항하는 여객선은 250명 정원으로 여러 불편을 낳고 있었다.
▲ 추자도 일출. ⓒ 추자면
김방우 추자노인회장은 "예전에 배가 두 척 운항 할 때는 목포에서 제주로 가는 배 타고 들어가서 1박을 하며 용무를 보면 모두 해결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배가 한 척만 운항하고 있어 제주에 오후 들어가면 다음날 아침까지는 용무를 마무리 할 수 없어 2박을 해야 하는 실정"이라고 불편을 호소했다.
추자면 6개 마을 가운데 가장 인구고령화가 높고 소외된 마을 예초리는 96세대 154명(남 68명, 여 86명 2013년 5월 31일 현재) 거주하고 있다. 추자면에서 해안선 소유 범위가 제일 길고 해초와 모자반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있으며 마을 주민 모두가 1차 산업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지난 3월 해양수산부는 소외된 어촌 마을 발전을 위해 '어촌 리모델링 사업 추진을 위한 기초정책연구' 실태조사 대상지 4곳을 선정했다. 동해안 경북 울진군 원남면 덕산 1리, 서해안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 1리, 남해안 경남 거제시 장목면 관포리에 이어 도서지역으로 제주도 제주시 추자면 예초리가 유일하게 선정됐다.
지난달 지역개발연구원·건축전문가·어촌어항협회 등 전문가 4명이 기초조사를 위해 예초리를 다녀 갔다. 김채완 예초리장은 "해수부에서 어촌 리모델링 사업으로 우리 마을이 선정된 만큼 제주에서 제일 고령화되고 소외된 마을 가운데 하나인 우리 마을이 이 사업으로 인해 마을 안길과 주택 등 리모델링 사업이 잘 추진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갯바위에서 울던 두 살 아기, 황경한
▲ 황경한의 묘. ⓒ 신용철
황경한은 조선 순조 때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 때 백서를 작성한 황사영과 정난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경한의 아버지 황사영은 1790년 약관의 16세 나이로 사마시에 장원급제한 인재로써 같은 해 당시 명문가문인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 18세 정난주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는 신유사옥 때 천주교도의 핵심 주모자로 지목돼 1801년 11월 서소문 밖 사람들이 오가는 저잣거리에서 대역부도죄를 저지른 중죄인으로 처참하게 순교했다.
그의 부인 정난주는 제주 대정현의 관노로 유배되며 당시 2살이던 아들 황경한을 가슴에 안고 귀양길에 올라 추자도에 이르러 아들이 평생 죄인으로 살아갈 것을 걱정해 어린 황경한을 예초리 바닷가 갯바위에 몰래 내려놓고 사공들에게는 죽어서 수장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대정현 관노로 유배된 정난주는 유배생활 38년간 풍부한 학식과 교양으로 주민들을 교화했다. 그래서 그녀는 노비 신분이면서도 '서울 할머니'라는 칭송을 받으며 살다가 1838년 2월 선종해 대정성지에 묻혔다.
한편 갯바위에 놓여 졌던 황경한은 그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온 예초리 마을주민 오씨 가족에 의해 키워졌으며 황씨가 없던 추자도에서 창원 황씨 입도조가 됐다. 현재 그의 후손들 중 일부가 하추자도에 살고 있으며 추자도에서는 황씨와 오씨가 결혼하지 않는 풍습도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구한말 개신교가 하층민을 대상으로 처음 전도된 반면 천주교는 조선 후기 아쉬울 것 없었던 양반들을 대상으로 들어왔다. 천주님 아래서 영생과 평등 세상을 꿈꾼 그들에게 신앙이란 유배와 순교까지도 각오했던 숭고하고 값진 행동이었다.
김채완 예초리장 "마을 발전을 위해 일할 터"
▲ 김채완 추자면 예초리장. ⓒ 신용철
"내 개인사업만 하는 것이 아닌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 일도 하고 마을 주민들과 여러모로 협력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예초리에서 나고 자라 중학교 졸업 후 서울과 여수 등에서 식품업과 해상운수업 등 사업을 하다 지난 2006년 다시 고향에 돌아와 도내 최초로 멍게 양식 사업을 하고 있는 김채완(70) 예초리장.
그는 지난달 20일부터 마을 주민들의 적극 추천으로 새로 맡게 된 이장직까지 수행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김 이장은 "매년 추자도에 주민참여예산 20억 정도가 지원이 되는데 지난해 추자면 6개 마을 가운데 예초리만 지원이 전혀 없었다"며 "이장을 맡은 이상 3년 임기 동안 열심히 마을 사업을 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흔이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젊어 보이는 그는 인터뷰 동안에도 열정과 아이디어가 번뜩거렸다. 그는 "예초리는 과거에는 가정적 민박이 있었는데 주민들이 고령화되면서 현재는 거의 전무한 상태"라며 "앞으로 버스종점이 있는 우리 마을에 민박과 숙박 시설을 비롯해 식당 등 관광객들이 쉽게 찾아 올 수 있도록 마을 리모델링 사업을 시와 면에 요청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김 이장은 "마을 주민 가구당 70~80%가 멸치액젓 사업을 하고 있다"며 "마을 공동 사업체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소득이 돌아갈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이와 함께 "주민들의 소원이 마을 바다 앞에 있는 '큰녀'를 만조 때에도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드는 일"이라며 "이뿐만 아니라 엄바위 장승 개발 휴게쉼터 등 주민을 비롯해 낚시객과 관광객들에게도 인상에 남을 만한 시설을 만드는 것이 임기 내 목표"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지역일간지 <제주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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