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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했던 아이가 퓰리처상까지... 엄마 때문이다?

[독서에세이] 러셀 베이커의 <성장>

등록|2015.05.14 11:16 수정|2015.05.14 14:17

▲ <성장> 표지 ⓒ 연암서가

성공한 사람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그의 어머니 이야기가 실망을 안겨주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글을 잘 쓰는 사람 중에서도 잘 쓰는 사람이라 이름난 글쟁이가 풀어내는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소소한 어린 시절 잔상들을 기분 좋게 풀어낸 이 책은 뛰어난 묘사력 때문에 마치 소설처럼 읽혔다. 진짜이야기에 유려한 문체가 덧씌워지면 어떤 하모니를 일으킬 수 있는지 확인 할 수 있는 책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러셀 베이커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사실 이 책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어떤 성공한 언론인의 성공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한 책이다.

러셀의 어머니는 33살의 나이에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을 금세 잊어버렸다. 남편이 죽었다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남편이 죽은 바람에 시댁 식구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어머니에겐 다행일 뿐이었다. 대학 공부를 마치고 교사가 된 어머니는 타지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그만 '실수'로 러셀의 아버지를 만난다. 외모만 멀쩡했던 무능력한 남자와의 불장난이 어머니의 인생을 (어머니 입장에선) 망쳐놓은 시발점이 되었다.

아이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결혼을 해야만 했던 어머니는 교사 일도 그만 두었다. 결혼 즉시, 10명이 넘는 자식을 거느리며 여왕처럼 군림하던 시어머니와는 적대적 관계가 되었다. 당뇨를 앓고 있음에도 뻑 하면 술에 취해 앓아 눕던 노동자 남편에게 어머니는 더는 애정을 바치지 않았다. 남편이 죽자마자 바로 친정 식구들에게로 도망친 이유였다. 자식은 아버지처럼 살면 안 되었다. 내 자식은 어떻게 해서든 출세를 해야 했다.

"좀 더 적극성을 가져라, 러셀." -<본문> 중에서

자식의 기질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는 어머니였다. 내성적이며 수줍음을 잘 타던 아들이 8살이 되자 어머니는 "언젠가 생존 경쟁에 뛰어들어야 할 바에는 그것을 어려서 시작하는 게 낫겠다"며 아들에게 신문배달을 시킨다. 러셀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여덟 살 때 언론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어머니의 결정이었다."

잘 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던 아이의 결심

자서전이라 이름 붙은 이 책을 다른 자서전과 비교하면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 자서전임에도 주인공이 나중에 대성할 거라는 단서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는 책을 읽기 전에 이 사람이 누구이고, 또 어느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과연 언제부터 주인공이 두드러졌는지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이런 문장을 만나게 된다.

전에 작가를 만나 보았다거나 커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욱이 어떻게 해야 작가가 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난 이야기를 좋아했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일은 그것을 읽는 것만큼이나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되면 몸이 편해질 것 같았다. 작가들은 가방을 메고 거리를 터벅터벅 걷지 않아도 되고 성난 개들과 맞닥뜨릴 일도 없으며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퉁명스럽게 거절당할 필요도 없었다.

작가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작가들이 하는 일이란 정말이지 일도 아니었다. 난 황홀했다. 작가는 적극성 따위는 없어도 되었다. 난 학교에선 웃음거리가 될까봐 아무에게도 애기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이다음에 크면 작가가 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 <본문> 중에서

신문 배달이 너무나 힘에 부쳐 어린 러셀은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셈이었다. 사실 어린 러셀이 못하는 건 신문 배달 뿐만이 아니었다. 작가가 되겠다는 러셀의 다짐은 악기 벤조를 연주하면서 한층 더 굳어졌다. 러셀에게는 음악 소질 또한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남자다운 아이도 아니었다. 누가 때리면 맞아야 했다. 남자로써 매력이 있지도 않았다. 스무 살이 다 되도록 제대로 여자를 만나지도 못했다. 그가 잘 하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러셀이 하고많은 직업 중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사실 어머니 때문이기도 했다. 집안 어른 중 에드윈이라는 아저씨가 '뉴욕타임스'의 편집위원이 되어 큰 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지금 에드윈 아저씨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봐라. 그런 사람도 출세하는데 너라고 왜 못 하겠니?" - <본문> 중에서

사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 졸업을 한 학기 남겨 놓고 러셀은 다시 한 번 다른 길을 모색해 보기도 한다. 더는 신문 배달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이번에는 소매업 쪽으로 재능을 발굴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주말이면 시장에 있는 대형 식료품점에서 창고 관리로 일했다. "내가 담당한 일은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 매장까지 운반한 다음 검정색 크레용으로 가격을 표시하고 진열대에 쌓아올리는 것이었다." 단순작업이라 재미는 없었지만 정식 채용이 되기 위해 투정하지 않고 잠자코 일했단다. 하지만 결국 여기서도 러셀은 뜻을 굽혀야 했다. 사장 눈엔 러셀은 어쩐지 맘에 드는 구석이 없는 놈이었다. 사장은 흑인보다 러셀을 더 믿지 못했다.

나는 글쓰기는 부자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히 직업다운 직업이 아니었다. 생계 수단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접지 않았다. 그것은 보잘것없긴 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능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문> 중에서

러셀 베이커를 만든 어머니의 채찍질

결국,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었던 러셀. 돈이 없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있던 터에 러셀은 장학금 제도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의학 대학인줄만 알았던) 존스 홉킨스 대학에 (얼떨결에) 원서를 넣어 합격한다. 그리고 1947년, 졸업과 동시에 '볼티모어 선'지에 입사해 드디어 언론계 거성으로서 첫 발을 내딛는다. 이후, 1954년부터는 '애드윈 아저씨'가 출세한 그 '뉴욕타임스'로 자리를 옮겨 백악관과 의회, 국내 정치를 담당하게 되었고, 칼럼으로는 조지 포크상과 퓰리처상을, 이 자서전으로는 퓰리처상 평전/자서전 부문을 수상한다.

도망치듯 버텨낸 그의 어린 시절에 적극성이란 것은 없었다. 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도, 그것이 너무나 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무 것도 잘하는 것이 없는 스스로를 원망하느라 의기소침해져 있기보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희망을 품은 것이 바로 작가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살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어머니란 거대한 벽이 있었으니까. 그는 벽 앞에만 서면 도망치던 것도 멈추고, 벌떡 일어서야 했다. 벽 앞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어 답답하긴 했지만, 그 벽의 존재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어머니는 자식의 출세를 위해 자신을 때로는 뜨거운 태양으로, 또 때로는 매서운 비바람으로 둔갑시켜야 했다. 이것이 어머니가 아는 유일한 부모 노릇이었다.

세월이 흘러 손주를 둔 할아버지가 된 러셀이 자서전을 쓰며, 책의 처음과 끝을 어머니 이야기로 채운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어머니의 모짊이, 강함이, 채찍질이 러셀 베이커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전기를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역시 위대해지고 싶어서일 테다. 우리 또한 그들처럼 삶을 살아간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겠다는 의지를 되새기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장>과 같은 전기를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 속 주인공은 자신의 말랑말랑한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어떻게 하면 자신이 위대해 보이지 않을지만을 궁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비록 부족한 우리이지만 우리 역시 그처럼 희망을 놓지 않고 산다면 뭐라도 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다시 한 번 믿어볼 수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성장>(러셀 베이커/연암서가/2010년 10월 30일/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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