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 한 마리에 분노 폭발... 그래도 '참스승'다웠다
[게릴라칼럼] 조선시대 참스승이자 조광조의 스승이었던 김굉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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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 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5월 15일 스승의 날은 학창 시절의 은사를 떠올리게 하는 날이다. 조선시대에는 스승의 날은 없었지만, 선비들이 공통적으로 떠올릴 만한 스승들이 있었다. 16세기 초반에 조선을 정치개혁의 열풍으로 몰아넣었다가 사약을 마시고 사라진 조광조. 그 조광조의 은사인 김굉필이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김굉필은 법무부 계장급인 형조좌랑으로 관료 생활을 마쳤다. 하지만, 조선왕조 5백년 중에서 후반부 3백년을 지배한 세력인 사림파(개혁적 유림들)가 김굉필과 조광조의 정신을 계승했다. 그래서 김굉필은 조선시대 스승의 모범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들이 어떤 스승을 존경했는지를 알려면, 김굉필과 그 주변의 관계를 살펴보는 게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김굉필의 수제자는 단연 조광조다. 조광조는 열일곱 살 때인 1498년, 평안도 희천군에서 마흔다섯 살 된 스승 김굉필을 만났다. 희천군은 평양 북쪽 120킬로미터 정도 되는 곳인 묘향산의 바로 위쪽에 있다. 이때 조광조는 평안도에 부임한 아버지 조원강을 따라갔다가 아버지의 소개로 김굉필이란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1454년 한성부(한양)에서 출생한 김굉필은 스물일곱 살 때 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小科)의 생원시험에 급제한 뒤, 오래도록 2단계 시험인 대과 응시를 미루다가 마흔한 살 때 추천 형식으로 공직에 부임했다. 최초로 받은 관직은 한성부 남부 참봉. 지금의 서울시 '남부구청' 9급 공무원이었다. 그 후 형조좌랑으로 있다가 1498년 무오사화라는 정치탄압의 피해자가 되어 평안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거기서, 아들의 개인교사를 찾던 조원강을 통해 조광조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인성도 가르칠 수 있어야만 참스승
공직자인 조원강이 유배 중인 김굉필을 자식의 스승으로 추천한 것은 법적인 문제 여하를 떠나서 주변의 눈총을 살 여지가 있는 일이었다. 공직자가 죄인을 가까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조원강은 개의치 않고 아들을 김굉필에게 맡겼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생각한 바람직한 스승의 이미지를 찾을 수 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성인군자가 되고자 자기 수행을 열심히 하며 제자에게 교과서 외에 인성도 가르칠 수 있어야만 참스승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송나라 사마광이 지은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에 나오는 "경전을 가르치는 선생은 만나기 쉬워도, 인간을 만드는 선생은 만나기 어렵다"는 문장을 좋아했다.
김굉필은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스승이었다. 그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행자의 자세로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지도했다. 학생들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강의할 정도로 엄격한 고행자였다. 또 그는 아동용 유교 교재인 <소학>을 중시했다. 지금의 도덕 혹은 바른생활 교과서에 상응하는 이 책을 중시한 것은, 학문의 기본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신념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소학>을 사랑했다. 그래서 별명도 소학동자였다.
▲ 조광조의 집터.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의 낙원상가 바로 옆에 있다. ⓒ 김종성
약간 여담이기는 하지만, 김굉필이 훌륭한 스승으로 모셔질 수 있었던 또 다른 '결정적 이유'는 수업료를 받지 않는 교사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억지로 주는 경우까지는 거절할 수 없었지만, 그는 수업료를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만큼 재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재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나 오래도록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최소한의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김굉필이 수행자의 모습을 갖춘 스승이었다는 점이 일차적으로 조원강의 구미를 당겼다. 그런데 조원강이 죄인을 자기 아들의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당시의 지적 풍토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김굉필이 유배를 간 것은, 그의 스승인 김종직이 수험생 시절에 세조(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암시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김굉필이 유배를 갈 당시의 임금은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세조의 증손자였다. 따라서 세조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행위는 연산군의 정통성을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김종직의 행위는 연산군의 입장에서 중죄였고, 김종직의 제자라는 것도 연산군이 보기에 중죄였다. 그 때문에 김굉필이 유배를 갔던 것이다.
이 정도면, 김굉필은 연산군 정권 하에서 반정부 인사였다. 오늘날의 공직자들 같으면 이런 낙인이 찍힌 사람한테 자식을 맡기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풍토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그것은 당시의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참스승은 군주나 정부를 상대로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참스승은 군주나 정권에게 빌빌대는 사람이 아니라 당당하게 정의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당시의 지식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수행을 멈추지 않은 김굉필
그 시대의 지식인들은 어려서부터 공부한 <논어> 헌문(憲問) 편에 나오는 공자와 자로(子路)의 대화를 기억했다. 제자인 자로가 군주를 섬기는 문제에 관해 질문하자, 공자는 "속이지 말고 범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솔직하게 군주를 범하라는 이 말은, 군주의 뜻을 거역하는 한이 있더라도 입바른 소리를 하라는 말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여론주도층 중에는 "교육자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세상의 부조리나 통치자의 잘못을 당당하게 지적해야만 참스승이 되고 참된 선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남을 가르치는 교사는 그런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게 그 시대 사람들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를 스승으로 모신 기준(奇遵, 1492~1521년)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스승의 도리를 세운다는 의미인 입사도(立師道)라는 글에서, 사회의 스승인 선비들이 정치적 부조리에 대해 입을 닫게 되면 스승의 도리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기준은 경고했다. 교사가 정치문제에 나서는 게 아니라 교권 붕괴의 길이 아니라, 교사가 정치적 부조리에 대해 함구하는 게 교권 붕괴의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도(師道, 스승의 도리 혹은 교권)의 몰락을 구제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선비의 기상을 펴는 것이다. 선비의 기상을 펴기 위해서는 선비들이 자유롭게 모여 토론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며, 선비들을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조선시대 지식인들 중에는 정치적 부조리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는 인물을 참된 스승 혹은 참된 선비로 간주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정당한 정치활동을 하다가 죄인으로 몰린 선비나 스승을 멀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조원강이 정치범 김굉필에게 자기 아들 조광조를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담양향교의 입구. 전남 담양군 담양읍에 있다. ⓒ 김종성
그런데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군주를 상대로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만이 스승의 도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제자의 충언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참스승이라고 생각했다. 이 점은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문집>에 나오는 김굉필과 조광조 사이의 에피소드에서 확인된다.
김굉필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성인군자의 모습을 잃지 않는 수행자였다. 그런 김굉필이 한 번은 제자들 앞에서 이성을 상실한 적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김굉필의 유배지를 방문한 손님이 몸보신하라고 두고 간 꿩 한 마리였다.
꿩을 보는 순간, 김굉필은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저 멀리 한양에 계셨다. 그런데 이미 죽은 꿩을 평안도에서 한양까지 보내다 보면 중간에 상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꿩의 털을 뽑고 내장을 꺼내 햇볕에 말렸다. 말린 꿩고기를 한양에 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드셔야 할 꿩고기를 먼저 잡수신 도둑이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꿩고기를 물고 달아나 버린 것이다. 그러자 고매한 수행자인 김굉필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불이 번쩍했다. 그는 자신의 수발을 드는 여자 노비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제대로 안 지키고 뭐했냐는 것이었다. 어찌나 심하게 야단을 치는지, 여자 노비가 땅바닥에 꿇어앉아 대꾸도 못하고 울기만 할 뿐이었다. 학자로서 할 수 없는 말들이 많이 나왔던 모양이다.
이성을 상실한 채 열불을 토하는 김굉필의 모습은 지켜보는 제자들이 민망해 할 정도였다. 평소에 보였던 수행자 김굉필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들뻘인 제자 조광조가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선생님께서 노모를 위하시는 정성은 간절하시지만, 그래도 군자는 말을 신중히 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린 조광조가 대학자 김굉필에게 '군자답게 말씀을 하시라'고 충고한 것이다. 충고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어린 제자가 자신을 훈계한다는 사실에 분노할 수도 있었을 텐데도, 김굉필은 너무나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조광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뜨인 김굉필은 "네가 나의 스승이구나"라며 잘못을 인정했다. 어린 제자의 충언을 감사히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조광조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세상에 이런 스승이 다 있구나 하면서 감동을 받은 듯하다. 그랬기 때문에 이 일화가 그의 문집에 실렸을 것이다.
세상을 만드는 스승이었던 김굉필
그런 훌륭한 스승을 모셔서인지, 김굉필의 학문을 계승한 사림파는 16세기 내내 가해진 정치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보수파와 싸워 1567년에 정권을 획득했다. 김굉필이 죽은 지 63년 뒤에 그의 제자들이 세상의 지배권을 잡은 것이다. 훌륭한 스승을 모셨다는 확신에서 생긴 단결력이 사림파를 강인하게 만들었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자치통감>에서는 '참스승은 인간을 만드는 스승'이라고 했지만, 김굉필은 인간을 만드는 스승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만드는 스승이었다. 그런 김굉필의 제자들이 16세기 후반 이후 3백년간 조선을 지배했기 때문에,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김굉필처럼 인간을 만들고 세상을 만드는 스승을 참스승으로 생각했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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