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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의 3년, '낭만'은 접어 두세요

[독서에세이] 손미나의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

등록|2015.05.15 11:38 수정|2015.05.15 14:15
가벼운 에세이 한 권을 읽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가슴이 충만해지고 따뜻해지길 바랐다. 또 그러면서도 삶을 긍정하게 만들고, 여기에 더해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도전하고 싶게 만드는 그런 책을 읽고 싶었다. 손미나란 이름이 떠올랐다.

이미 그녀의 책은 두 권 읽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그녀의 3년간의 파리 생활을 담은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이다.

손미나란 사람이 내 옆집 언니는 아니기에 나는 그녀가 그 오랜 시간을 타지에서, 그것도 프랑스에서 생활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가끔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열심히 여행관련 방송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두 권의 책을 통해 큼지막한 그녀 인생 궤도 정도는 알고 있었다. 1년간의 대학원 생활을 담은 스페인 체험기가 큰 성공을 거둔 후 아나운서를 과감히 그만두고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 이후 한 번의 결혼을 거쳐 다시 싱글이 되었다는 것. 그녀의 아르헨티나 여행은 사랑이 지나간 뒤 남은 상처로 아파하던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일종의 재활 프로그램이었다는 것. 아르헨티나를 다녀온 후 그녀는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이번의 에세이를 보니 그녀는 여전히 아픔에서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듯했다.

아플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뿐이다. 계속 아파하든가, 아니면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든가. 가끔은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밖에 없는 때도 물론 있다. 너무나 아파 계속 아플 수밖에 없는 시기도 존재하니까. 그런데 이런 시기가 지나가면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명료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아픔이 모든 잡념들을 말끔히 쫓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별 후, 집에서 웅크리고만 있던 손미나는 더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 끝에 요가와 권투를 시작했고, 다시 꿈을 생각하게 됐다. 그때 떠오른 것이 파리. 스페인 유학 시절 파리에서 며칠 지내보기도 했던 그녀는 언젠가는 파리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꿈을 꿔오던 터였다. 그런데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 아닐 이유가 무엇일까. 망설일 일이 무어랴. 짐을 싸서 파리로 향했다. 그렇게 그녀는 3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어떤 빛깔을 지닌 사람이든 파리에서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헤밍웨이가 말했듯, 젊은 시절 파리에 살았던 것은 크나큰 행운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내가 앞으로 어디에서 어떤 삶을 빚어가든지 움직이는 축제처럼 내 영혼에 빛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위의 글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녀가 3년간의 파리 생활을 마무리하며 적은 소회 같은 것이다. 그리고 위의 글은 파리를 잠시 스쳐가는 여행지 정도가 아닌 일상의 터전으로 삼고 오랜 기간 그곳에서 살과 숨결을 부딪기며 살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헤밍웨이 역시 저렇게 멋진 말을 할 수 있었던 건 7년간의 파리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을 하는 이유는, 파리 생활 초보자에게 파리는 '꽃'이나 '행운' 등의 단어를 운운할 수 없을 만큼 더없이 고약하고 매정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리 생활 1~2년 차 외국인들이 쓴 이런 제목의 책들도 있다고 한다. <똥통에 빠져 지낸 1년>, <우리는 왜 프랑스는 사랑하면서 프랑스인은 증오하는가>, <6천만 프랑스인들이 다 미친 것은 아니다>, <프랑스 사람처럼 되지 않는 법> 등등.

사실 우리에겐 파리하면 낭만이 떠오른다. 물론, 발에 채는 개똥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이미지는 역시나 낭만이다. 낭만을 되찾고 싶어서일까. 우리는 유럽 여행을 할라치면 먼저 파리부터 찾는다. 파리를 갔다 오지 않고는 유럽을 말하지 말라, 정도로까지 강경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물론 없겠지만, 간혹 유럽 여행을 몇 번 해봤다는 내가 파리는 간 적이 없다고 말하면 개중 몇 사람은 그 이유를 묻는다. 왜, 파리를 먼저 가지 않았느냐고.

문화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곳,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된 곳, 패션의 중심지, 세계 최고의 세계 도시,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역사적인 건축물 등등은 파리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이렇게 떠오른 모든 것들이 아마 우리에게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테다. 하지만 실상 파리지앵, 파리지엔느라 불리는 파리사람들은 낭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레 파리에서의 삶도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파리 사람들은 파리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섬처럼 살고 있는 듯했다. 이웃과 왕래하는 일도 극히 드물고, 타인과 접촉할 때는 굉장히 신중한 태도를 보인단다. 서로 감정에 호소하는 일도 거의 없어 사건이 터지면 법으로 해결해야 하고, 그렇기때문에 파리 생활은 끝없는 문서와 절차의 연속이 된다. 오죽 사건에 말려들기 싫으면 서로 길을 걷다 부딪혔을 경우에도 파리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내 잘못이 아니에요'하고 얼른 자리를 피해버릴 정도이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파리에 와서야 진정한 고독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홀로 무인도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문화와 예술, 낭만을 좇아 찾아온 이곳에서, 이렇게 쓸쓸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거기다가 날씨는 왜 이리 우중충하단 말인가! 그래서 열도 받게 되는 것이겠지. 그러니 무시무시한 제목의 책들을 사정없이 출판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점점 파리가 좋아졌다. 낭만이 없는 대신,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파리 사람들. 딱 부러지게 일을 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감정의 앙금 같은 것을 남길 필요가 없는 사람들.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기에 자유롭게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 모두가 '꽃'이 될 '행운'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사는 도시 파리에서 나도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된통 당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손미나 역시 엄청 외로웠다고 한다.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조차 괴로울 만큼. 하지만 서서히 파리의 진면목에 다가갈 수 있었던 그녀는 파리의 맛을 한껏 음미한 듯 보였다. 파리가 주는 에너지로 충만해진 끝에 사랑하게까지 된 그녀. 사랑의 힘일까. 실제로 그녀는 자기 자신이 이제 드디어 파리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불현듯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손미나가 소설을 쓴 줄은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온라인 서점에서 그녀의 소설을 미리 보기로 살짝 훑어봤다. 이 책의 일정 부분은 소설이란 걸 써본 적도 없고,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던 한 에세이스트가 소설에 발을 들이게 되는 과정, 그 과정 중에 겪은 나락과 환희, 그리고 첫 소설 완성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소설이라니, 참 대단하다. 지칠 줄 모르고 도전하는 사람을 보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인 것 같다. 도전만큼 멋지고 가슴 뛰는 일은 없지 않은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일이 어려운 요즘이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기에, 새로운 삶을 위해 한 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은 그저 꿈에서나 가능할 일일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가슴 속 꿈의 뜨거움을 잊지 않은 채 걱정 반 설렘 반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일 것이 분명하다. 우리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겠지만, 때로는 나락을 겪고 또 때로는 환희를 겪으며 새로운 일을 시작한 사람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 삶이 더욱 힘이 드는 이유는, 매일 같은 생각,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살고 있어서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같은 사람들과 같은 이야기만을 반복하다 보면 현실은 더욱 더 좁아 보이기 마련인 것 같다.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들어지는 것일 테고.

그러니 가끔은 이런 책을 읽는 것도 좋지 않을까. 우리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그래서 그저 부럽기만 할 뿐이지만, 그래도 내 삶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도 조금의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손미나/웅진지식하우스/2013년 07월 23일/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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