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고수, 대학병원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허름한 개인병원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 이렇게 깨졌다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 요인으로는 이런 게 있다. '살아오면서 터득한 가치나 정보에 부합하는지', '주변의 평판이나 조언, 인터넷 정보' 등등. 시간 여유가 있는 경우라면 보다 객관적인 정보를 수집해 결정을 내릴 수 있겠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어떤 근거로 판단해야 할까.
"대학 병원으로 옮기지?"
등굣길에 다쳐 응급실에 실려 간 둘째 아이의 사고 소식을 듣고, 내게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마다 했던 말이다. 아이는 자전거를 타다 다쳐 손목에 복합골절상을 입었다(관련 기사 : "아이가 다쳤어요",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는데...). 아이가 입원한 병원은 학교 근처 정형외과 개인병원이다.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만 해도 갈등이 컸다. 급하게 수술은 해야 하는데, 낡은 건물에 의료기기…. 무슨 이유인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수술을 담당하실 선생님은 다른 수술을 하고 있는 중이라 만날 수도 없었다. 평소 난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한다. 의료의 질과 환경이 꼭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어도 판단하는 데 영향을 줬다.
근육 손상 여부 확인을 위하여 MRI를 찍는 동안 수술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먼저 집 가까이에 있는 대학병원이 떠올랐다. 그러나 바로 수술이 가능한지가 불확실했다. 그 다음은 중형병원. 갖고 있는 기억이 좋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어디가 정형외과 수술을 잘하는지 찾기 바빴다. 아이가 응급처치를 받은 이곳은 낡은 외형 때문에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곳에서 하세요. 과장 선생님 수술 잘하세요. 저희 어머니도 그분께서 수술해주셨어요. 병원이 크다고 실력이 꼭 좋은 건 아니에요."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간호사 한 분이 따라오며 말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제야 다시 한 번 병원을 둘러봤다. 의구심이 들었다. 최신식의 깔끔하고 세련된 병원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병원 사정을 잘 아는 간호사가 자기 부모님 수술까지 맡겼다고 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다 퍼뜩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재야의 고수가 계시는데, 그분께..."
아이들이 어렸을 적, 한동네에 살던 친구가 있었다. 나와 나이도 동갑인 데다가 생각도 비슷해 가까이 지냈다. 약 10년 전, 당시 7살이었던 그 집 둘째가 놀이터 놀이기구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근처 대학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
친구는 마지막으로 S대학교 병원에라도 가보자고 애원했다. 그때는 일요일이었고 그런 중요한 수술을 할 당직 의사가 없다고 했다. 다른 대형 병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아들을 보내야 하나 절망하고 있을 때 의사 한 분이 조용히 부부를 불렀다.
"재야의 숨은 고수가 계시는데 그분께 한 번 가보시는 게 어떠실지…. 그분이라면 수술하실 수 있을 겁니다."
친구 부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알려준 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그들은 서울 신정동 외진 병원의 낡은 외관에 그만 절망했다. 시설 좋은 대학병원에서도 못하는 수술을 그런 병원서 어떻게 한다는 건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일요일에 달려나온 의사도 대학병원의 깔끔하고 스마트해 보이는 의사와는 거리가 있었다. 친구 부부는 더 불안해했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지라 수술동의서에 서명했다. 친구 부부는 '아들이 가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는 살아났다.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간 나도 수술실과 커튼으로 구분한 입원실 모습에 놀랐었다. 그런 낡은 병원 시설과는 반대로 공사장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목숨 살려주셨다고, 교통사고로 다 포기한 목숨 살려주셨다고 입원 환자들은 의사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친구 부부는 무협지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재야의 숨은 고수'를 직접 경험했다. 그 아이는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
"개인병원은 시설투자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세상에는 스스로 달인이나 고수라 칭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진정한 고수는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인정할 때가 진짜배기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하는 의술의 세계에서 그들이 인정하는 고수의 반열에 오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 충분히 예상된다. 그런 고수는 화려한 대학병원의 높은 자리에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처세와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 사회다. 이문을 쫓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그런 고수는 변두리 허름한 병원에 있을 수도 있다.
자기 포장도 능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 또한 있다.
그 기억을 떠올리고 나니 갑자기 병원이 좋게 보였다. 모두 어렵다던 그 아이를 살려낸 그런 분과 같은 의사가 있을 것 같았다.
"이곳 선생님이 재야의 숨은 고수일지 모르잖아."
최선이 아니라면 학교 가까이 있는 이곳이 차선이라는 남편과 의견 일치를 봤고, 수술동의서에 서명했다. 급하게 하는 수술이라 담당의사는 그대로 수술실에서 아이를 맞았다. 설명은 연로하신 원장님이 대신했다. 수술실에 아이를 들여보내고 입원실을 둘러봤다. 가운데 오래된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있었다. 병원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큰 병원들을 선호하다 보니 개인병원은 시설투자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잘 결정했으니까. 내 아들이어도 이분께 수술 맡길 거예요."
따라온 다른 간호사가 침상을 정리하며 말했다. 어떤 분이기에 이렇게 신뢰가 깊은지 궁금했다.
두 시간 후,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원장님의 설명이 있었다. 아이가 깨어난 뒤 집도의가 찾아왔다. 수술 경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우리가 상상했던 재야의 숨은 고수 모습은 아니었다. 깔끔하고 스마트했다. 게다가 젊어 보였다. 반대로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는 재야의 느낌이 났다. 안심이 됐다. 살아오면서 터득한 느낌으로 '누가 뭐라 해도 묵묵히 내 길을 갈 뿐이오'라는 냄새가 그대로 전해졌다.
"아니 왜 여기 있어? 대학병원가지!"
둘째의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생이 또 그런다.
"여기에 재야의 숨은 고수가 계셔."
내가 고수라 믿으니 아이의 수술 경과도 좋을 것 같다.
"대학 병원으로 옮기지?"
등굣길에 다쳐 응급실에 실려 간 둘째 아이의 사고 소식을 듣고, 내게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마다 했던 말이다. 아이는 자전거를 타다 다쳐 손목에 복합골절상을 입었다(관련 기사 : "아이가 다쳤어요",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는데...). 아이가 입원한 병원은 학교 근처 정형외과 개인병원이다.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만 해도 갈등이 컸다. 급하게 수술은 해야 하는데, 낡은 건물에 의료기기…. 무슨 이유인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수술을 담당하실 선생님은 다른 수술을 하고 있는 중이라 만날 수도 없었다. 평소 난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한다. 의료의 질과 환경이 꼭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어도 판단하는 데 영향을 줬다.
근육 손상 여부 확인을 위하여 MRI를 찍는 동안 수술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먼저 집 가까이에 있는 대학병원이 떠올랐다. 그러나 바로 수술이 가능한지가 불확실했다. 그 다음은 중형병원. 갖고 있는 기억이 좋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어디가 정형외과 수술을 잘하는지 찾기 바빴다. 아이가 응급처치를 받은 이곳은 낡은 외형 때문에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곳에서 하세요. 과장 선생님 수술 잘하세요. 저희 어머니도 그분께서 수술해주셨어요. 병원이 크다고 실력이 꼭 좋은 건 아니에요."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간호사 한 분이 따라오며 말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제야 다시 한 번 병원을 둘러봤다. 의구심이 들었다. 최신식의 깔끔하고 세련된 병원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병원 사정을 잘 아는 간호사가 자기 부모님 수술까지 맡겼다고 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다 퍼뜩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재야의 고수가 계시는데, 그분께..."
▲ "그분이라면 수술할 수 있을 겁니다"라는 말만 믿고 찾아간 병원. 외관은 허술해보였지만, 실력은 좋았다. ⓒ freeimage
아이들이 어렸을 적, 한동네에 살던 친구가 있었다. 나와 나이도 동갑인 데다가 생각도 비슷해 가까이 지냈다. 약 10년 전, 당시 7살이었던 그 집 둘째가 놀이터 놀이기구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근처 대학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
친구는 마지막으로 S대학교 병원에라도 가보자고 애원했다. 그때는 일요일이었고 그런 중요한 수술을 할 당직 의사가 없다고 했다. 다른 대형 병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아들을 보내야 하나 절망하고 있을 때 의사 한 분이 조용히 부부를 불렀다.
"재야의 숨은 고수가 계시는데 그분께 한 번 가보시는 게 어떠실지…. 그분이라면 수술하실 수 있을 겁니다."
친구 부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알려준 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그들은 서울 신정동 외진 병원의 낡은 외관에 그만 절망했다. 시설 좋은 대학병원에서도 못하는 수술을 그런 병원서 어떻게 한다는 건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일요일에 달려나온 의사도 대학병원의 깔끔하고 스마트해 보이는 의사와는 거리가 있었다. 친구 부부는 더 불안해했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지라 수술동의서에 서명했다. 친구 부부는 '아들이 가는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는 살아났다.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간 나도 수술실과 커튼으로 구분한 입원실 모습에 놀랐었다. 그런 낡은 병원 시설과는 반대로 공사장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목숨 살려주셨다고, 교통사고로 다 포기한 목숨 살려주셨다고 입원 환자들은 의사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친구 부부는 무협지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재야의 숨은 고수'를 직접 경험했다. 그 아이는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
"개인병원은 시설투자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 병원 시설을 둘러보던 우리에게 그 병원 간호사는 "개인병원은 시설투자 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걱정마세요"라고 말했다. ⓒ freeimage
세상에는 스스로 달인이나 고수라 칭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진정한 고수는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인정할 때가 진짜배기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하는 의술의 세계에서 그들이 인정하는 고수의 반열에 오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 충분히 예상된다. 그런 고수는 화려한 대학병원의 높은 자리에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처세와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 사회다. 이문을 쫓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그런 고수는 변두리 허름한 병원에 있을 수도 있다.
자기 포장도 능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 또한 있다.
그 기억을 떠올리고 나니 갑자기 병원이 좋게 보였다. 모두 어렵다던 그 아이를 살려낸 그런 분과 같은 의사가 있을 것 같았다.
"이곳 선생님이 재야의 숨은 고수일지 모르잖아."
최선이 아니라면 학교 가까이 있는 이곳이 차선이라는 남편과 의견 일치를 봤고, 수술동의서에 서명했다. 급하게 하는 수술이라 담당의사는 그대로 수술실에서 아이를 맞았다. 설명은 연로하신 원장님이 대신했다. 수술실에 아이를 들여보내고 입원실을 둘러봤다. 가운데 오래된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있었다. 병원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큰 병원들을 선호하다 보니 개인병원은 시설투자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잘 결정했으니까. 내 아들이어도 이분께 수술 맡길 거예요."
따라온 다른 간호사가 침상을 정리하며 말했다. 어떤 분이기에 이렇게 신뢰가 깊은지 궁금했다.
두 시간 후,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원장님의 설명이 있었다. 아이가 깨어난 뒤 집도의가 찾아왔다. 수술 경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우리가 상상했던 재야의 숨은 고수 모습은 아니었다. 깔끔하고 스마트했다. 게다가 젊어 보였다. 반대로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는 재야의 느낌이 났다. 안심이 됐다. 살아오면서 터득한 느낌으로 '누가 뭐라 해도 묵묵히 내 길을 갈 뿐이오'라는 냄새가 그대로 전해졌다.
"아니 왜 여기 있어? 대학병원가지!"
둘째의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생이 또 그런다.
"여기에 재야의 숨은 고수가 계셔."
내가 고수라 믿으니 아이의 수술 경과도 좋을 것 같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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