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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가 클까 2x가 클까?" 답을 찾는 힘, '인문적 사유'

청소년을 위한 행복한 인문 이야기 ①

등록|2015.05.17 15:57 수정|2015.05.17 15:58
인문적 사유는 주어진 현실과 인간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꿈꾸는 깊고 높은 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문적 사유는 인간의 본래 가치를 지켜낼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고양시키며 살아갈 수 있는 미래 지향적 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인문적 소양과 사유의 힘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인간적 가치가 무시되고 재물과 권력이 앞서 사회가 사람답게 사는 일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교육 또한 학력과 학벌 위주의 극심한 경쟁으로 청소년들이 좀처럼 인간다운 삶에 대한 소양을 키워나가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메마른 인문적 사유, 어떻게 키울까

▲ 인문학적 삶, 왜 배워야할까 ⓒ pixabay


그래서 더욱 미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이 성장 과정에서 인문적 사유의 힘을 키우고 다지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청소년들에게 인문적 감수성과 소양을 키워줄 수 있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었는지요? 국어 교과 속의 문학이나 사회 교과 속의 철학 아니면 어려운 인문학 텍스트를 읽게 하는 접근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인문적 관심과 학교 생활을 통해서 볼 때 이런 방식의 접근은 성장기를 통해 꼭 지녀야 할 인문적 소양의 바탕을 키워주기보다, 오히려 처음부터 인문적 영역에 대해 강한 거부감과 부담감을 갖게 만들어버리기 십상이지요. 교과서는 어디까지나 공부에서 시작해 공부로 끝나기 십상이고, 대부분의 인문학 서적은 어렵고 딱딱합니다.

이제 인문학은 그 본질적 가치인 '인문 정신'으로 대중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들의 실제 삶 속에, 바로 내 삶의 일상 속으로 좀 더 깊고 가깝게 들어와야 합니다. 인문 정신은 우리의 현실적 삶과 좀 더 밀착되어 삶의 방향성과 시대의 문제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가치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인문적 소양과 정신을 키우기 위해서 물론 인문학 저서들이 매우 유용하겠지요. 그러나 보다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일이 본질인 인문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서 처음부터 반드시 어려운 인문학적 독서에 의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삶 가운데에서 인문적 요소들을 경험하고 느끼고 사유하면서 점차 체화해가는 일이 중요하고 또 가능합니다.

인문적 독서 이외에도 좋은 영화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신문의 사건 기사나 칼럼 등을 통해서도 인문적 소양을 키울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와의 대화, 특별한 정서적 체험들, 내 주변 사람들의 인간적인 삶의 모습, 자연의 섭리와 아름다움 등에서도 우리는 인문적 감수성을 풍요롭게 해 주는 교감이나 감동을 경험하면서 우리 삶을 보다 인간적으로 가꿔 가고자 노력하는 인문적 사유의 힘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럴 수 있는 눈을 뜨게 해 주고, 마음을 향하게 해 주는 일입니다.

'청소년을 위한 행복한 인문 이야기'는 기존의 인문학 개념의 한계를 극복하고 청소년들이 인문은 곧 학문이라는 개념에서 탈피해 어렵지 않게 인문적 소양을 키우고 인문 정신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한 현장 체험적 글입니다.

청소년 인문과 인문 정신에 대한 생각과 실제 수업 사례들을 현장 강의 형식의 기본 틀에 담은 이 글을 통해 청소년들은 지금까지의 어려운 '인문학'에 대한 개념을 넘어 우리 삶 속의 다양한 상황과 사람들에 대한 인문적 성찰의 과정을 흥미롭게 경험해 감으로써 인문적 사유의 힘과 인문 정신을 키워갈 수 있도록 기획하였습니다. 또한 교사와 학부모와도 공유해 청소년 인문학과 인성 지도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인식, 그리고 적용의 계기를 만들어 보고자 했습니다.

Х가 큰가, 2Х가 큰가?

이제 질문을 하나 던지면서 '우리들의 행복한 인문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Х와 2Х 중 어느 쪽이 더 크지요?"

저는 해마다 첫 수업 시간에 이렇게 아이들에게 'Х와 2Х 중 어느 쪽이 더 큰지,  Х와 -Х 중에서는 어느 쪽이 더 큰지'를 묻습니다. 아이들의 답은 어떨까요? 많은 아이가 "2Х가 Х보다 더 큽니다", "Х가 -Х보다 더 큽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당연한 걸 왜 물어보나', '국어 시간에 웬 수학?' 하며 자신 있게 답하는 아이들이 많지만, 결과는 어떨까요. 그렇습니다. 이 답은 틀렸습니다. 만약 Х의 값이 -2라면, Х보다 -Х가 더 크고, 2Х보다 Х가 더 큽니다. 그리고 만약 Х가 0이면 둘의 값은 똑같습니다. 그러니 위의 답은 분명히 옳은 답이 아니지요. 2Х가 더 크다는 답은 겉으로 보이는 대로만 판단한 결과입니다.

"알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거나, "선생님, Х의 값이 뭡니까?"라고 물어야 맞는 것입니다. 상식적 수준의 수학적 개념이지만, 의외로 잘못 답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내가 해마다 빠뜨리지 않고 새로 만나게 되는 아이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그만큼 청소년들이 이 답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 짧은 문답은 청소년들의 잠들어 있는 인문적 감수성을 깨워 의미 있는 자신의 삶과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첫 발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Х, Х, 2Х'라는 수학적 기호를 통과해 인문적 사유의 세계로 발을 내디뎌 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자신의 인간적 삶의 가치들을 추구하고 또 펼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단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대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사람답게 살기 위한 진정한 인간적 가치들을 내면화할 수 있는 조건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걸까요? 생각해 보면 우리 청소년들의 교육 환경은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해 가는 일은 고사하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힘을 키우기에도 너무나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진실이 가려지고 왜곡되는 일이 참 많이 생겨납니다. 심지어 세상을 바로 알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존재들도 분명히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진실(Х의 진짜 값)은 교묘히 가린 채 그냥 2Х가 큰 것처럼 믿게 하는 누군가, 무언가가 틀림없이 있다는 얘기지요. 물론 그 누군가, 무언가는 자기 안에 있기도 합니다.

만일 성장하면서 내가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힘을 키워놓지 못한다면, Х의 값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 채 진정한 내가 아닌 가짜 인생, 바보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냥 Х보다 2Х가 크다고 알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생은 결코 다시 살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생각하면 참으로 허망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Х가 큰지 2Х가 큰지를 바로 아는 일은 이제 수학 문제 풀이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한 삶의 문제 풀이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것들, 겉으로 보이게 내놓는 것들이 결코 다가 아닐 수 있음을 알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의도에 의해 오히려 실체가 가려지거나 숨겨질 수도 있고, 적어도 다른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일에 대해 '내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무언가의 다른 모습 또는 그것의 진짜 모습을 보려고 노력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직 생활을 하며 인생을 좀 살아 보니 교과 공부도 물론 중요하지만, Х와 그 옆에 붙어 있는 겉 숫자만 보지 않고 그 전체가 가지고 있는 참 값까지를 제대로 보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다운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정말 해야 하는 공부는 바로 이런 눈과 정신을 키워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더군요.

프랑스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폴 발레리(Paul Valery, 1871∼1945)는 '용기를 내어서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며 잘 보이지 않거나 가려지는 Х의 참값을 제대로 보려는 생각과 고뇌, 이것이 바로 인문적 사유입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현재 국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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