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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5월 7일, 프랑스를 물리친 베트남

[베트남 디엔비엔푸 자전거 기행 ⑤] 디엔비엔푸

등록|2015.05.18 15:14 수정|2015.05.18 16:26
오늘은 자전거를 타지 않고 디엔비엔푸에 있는 전투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원래 예정엔 작전사령부가 있는 므엉 팡 마을까지 자전거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제 숙소를 찾느라 기운을 모두 빼서인지 자전거를 더 탈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차를 대절했다. 차는 다시 우리가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을과 마을 사이로 가는데 이정표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예정한 대로 자전거를 타고 왔다면 힘든 것은 둘째고 길도 찾지 못할 뻔했다. 이런 것을 보면 어제 숙소를 찾느라 헤맨 것은 분명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로 인해 자전거를 타지 않고 차를 타게 되어 여행의 즐거움을 더욱 만끽했으니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할까?

미국, 프랑스를 지원하다

프랑스는 1885년 중국에서 철수하는 대신 중국의 묵인 아래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다. 1945년 3월에 독일의 패망이 임박하자 일본은 독일 나치의 괴뢰 정권인 프랑스 비시 정권의 베트남 통치권을 장악했다. 호찌민은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해 미국과 제휴하여 일본과 전면전을 벌였다. 프랑스의 정보망이 무너져 미국도 베트남의 정보망이 필요했던 것이다. 베트민에게 미국 무기의 사용법을 가르쳤던 토머스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본부로 보냈다.

"공산주의 도깨비는 없다. 베트민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프랑스의 가혹한 체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개혁을 하고자 할 뿐이다."

호찌민은 미국이 우려하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호찌민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로 해서 만든 베트남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은 호찌민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여 호찌민 아래에서 베트남이 독립하는 것을 방해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베트남을 빼앗긴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배 하게끔 미국은 적극 후원했다. 결국 베트남의 독립을 방해하는 자본주의 국가에 대항하여 독립을 하고자 하는 호찌민은 공산주의 국가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34명의 군대로 50만 대군에 맞서다

호찌민은 1946년 3월 '베트남이 프랑스 연합 내에서 자유국가로 인정받고 프랑스는 통일을 결정할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북부에 프랑스군 주둔을 허용한다'는 내용으로 프랑스와 잠정적인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7월 드골선언으로 무산되었다. 11월 프랑스는 베트남의 하이퐁을 폭격하고 12월 하노이를 점령했다.

더 이상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호찌민은 '만일 우리에게 전쟁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 싸울 것이다'라며 12월 19일 프랑스에 대항하는 제1차 베트남전쟁이 시작된다. 프랑스의 50만 대군에 맞선 베트남은 겨우 34명의 공식 군대만 있었다.

라오스와 중국의 국경 근처에 있는 디엔비엔푸는 라오스를 통해 중국의 보급 물자를 받는 군사요충지였다. 프랑스는 1953년 11월 수송기를 타고 와 공수작전으로 디엔비엔푸를 점령하고 비행장을 건설했다. 디엔비엔푸로 집결하라는 호찌민의 호소에 징집제도가 없었음에도 베트남 젊은이들은 자발적으로 험준한 산길을 여러 달 동안 맨발로 걸어왔고 산악지대의 소수민족도 함께 싸웠다.

▲ 산 위로 포를 이동하는 쩐콩들 ⓒ 디엔비엔푸 박물관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도로와 참호를 만들고 여자와 청년을 포함한 전투수행 노동자인 수십만 명의 '쩐콩'들은 수 만대의 자전거와 수레를 이용하거나 직접 식량과 군수물자를 언덕으로 끌어 올렸다. 이 작전을 지휘한 부대가 므엉 팡 마을에 있는 작전사령부이다.

소수민족이 큰 역할을 하다

디엔비엔푸보다 해발 500미터 정도 높은 므엉 팡 마을까지 거리는 40킬로미터가 좀 넘었다. 주민들은 소수민족으로 대부분 타이(Tay)족이다. 이들은 베트남군이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호찌민은 소수민족을 강압하지 않고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들어가 베트남 독립운동에 동참해 달라고 가는 곳마다 설득을 했다. 그의 진심어린 포용력은 소수민족들조차 진심으로 함께 베트남 독립운동을 하게 했다.

작전사령부기념관에는 베트남 관광객들이 많았다. 하지만 베트남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장소 중 하나인 이곳이 이정표도 제대로 없는 등 아직까지도 잘 정비되어 있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오솔길을 따라 산 속으로 오르니 커다란 돌 비석이 서 있다. 승리한 지 55주년 되는 해에 세웠다고 한다. 산 속에 지압(Vo Nguyen Giap) 장군의 사령부가 예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모두 간이막사이며 땅굴로 연결되어 있다. 숲이 우거져 공중정찰이 불가능한 이곳에서 지압은 전투를 지휘했고 승리했다.

▲ 승리한 지 55주년 되는 해에 세운 작전사령부 기념비 ⓒ 이규봉


백기는 올리지 않고 항복한다는 프랑스

운전기사에게 호텔로 가는 대신 시내에 내려 달라 했더니 영업용 택시도 아니면서 추가 요금을 달라고 한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해 줄 수 있으련만 기사는 감춰져 있는 택시미터기를 꺼내 잘 보이게 부착한다. 이런 일이? 할 수 없이 미터기에서 요구하는 요금을 내고 시내로 나갔다.

예전 프랑스군 기지가 있던 자리에 작은 박물관이 있고 그 옆에 프랑스 사령부가 있던 A1 고지가 있다. A1 고지는 30미터 정도 높이의 얕은 언덕으로 모든 참호는 땅굴로 연결되어 있었다. 언덕 위에 올라가 보니 바로 아래 작은 분화구 같은 것이 있었다. 베트남군은 5월 6일 프랑스 사령부 중심까지 땅굴을 파고 들어와 1000킬로그램의 폭탄을 터트렸다. 분화구는 바로 이 폭파의 흔적이다. 백기는 올리지 않고 항복한다는 프랑스의 조건에 베트남은 동의했다. 그 날이 1954년 5월 7일이다.

▲ 프랑스 사령부가 있던 A1 고지의 폭파 흔적 ⓒ 이규봉


무명용사의 전사자 묘역

A1 고지 아래에는 전사자 묘역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입구에 있는 대리석 기념비에는 '전사한 영웅들께 영원히 감사합니다'와 같이 적혀 있고 묘역 중앙 양쪽으로 전사자들의 묘와 묘비가 펼쳐져 있다. 대부분의 묘비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무명용사인 것이다. 이 묘역에 안장된 2백여 명은 전사자의 아주 극소수이다. 징병제도가 없음에도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자진 입대하여 전사한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 디엔비엔푸 전투의 전사자 묘역, 대부분이 무명용사이다. ⓒ 이규봉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비록 우리가 싸운 전투는 아니었지만 동병상련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호찌민이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에 대해 1964년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깊이 생각하니 약소국들은 서로 남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우리 베트남 민족의 위대한 승리일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억압받는 모든 나라들의 승리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참고도서> 송필경의 <왜 호찌민인가?>, 에녹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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