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청계노조 인정하라" 봄과 함께 시작한 투쟁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99] 16. 합법성 쟁취를 위하여

등록|2015.05.20 14:33 수정|2015.05.20 14:33

위대한 어머니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추모 그림 ⓒ 김봉준


이소선과 청계노조 조합원들은 1984년 마지막 날까지 투쟁과 구류로 보냈다. 그리고 1985년을 맞이했다. 당시 정세는 2.12 총선을 앞두고 유화 국면이었다. 청계노조는 이 기간 동안 물적 토대를 확실하게 다지는 일을 해냈다.

첫 번째로 1985년 2월 서울 종로구 창신동 106번지에 독일의 '인간의 대지'에서 지원을 받아 노조 소유의 건물을 마련하고 '평화의 집'이라고 이름 지었다. '평화의 집'은 K.N.C.C 사회선교 협의회에서 일하던 최혁배가 독일의 NGO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에 연결해 한국의 노동 상황을 알리는 것이 계기가 돼 만들어지게 됐다.

독일의 '인간의 대지'는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가 지은 동명 소설에서 이름을 따온 소설 내용처럼 휴머니즘을 표방하며, 특히 아동과 청소년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단체다. 최혁배는 이 단체에 근무하는 아시아를 담당하는 테오돔과 긴밀하게 연결해 한국 상황을 알렸다.

테오돔은 친구인 귄터 브로이덴베르크 오스나브뤼크대 교수에게 1970년대 한국의 동백림사건, 김지하 사건, 김대중 사건에 대해 들어 한국의 인권 상황을 알게 됐다. 그 후 그는 한국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한국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브라이덴슈타인씨 등과 함께 한국의 인권 개선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진보적인 사람이었다. 1970년대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한국에 온 그는 1980년대 한국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해 다시 한국에 왔다가 최혁배를 만나게 된 것이다.

▲ 2011년 한국을 방문한 테오돔씨와 최혁배씨 ⓒ 민종덕

그는 한국 노동 운동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평화시장 봉제 공장 노동자들의 현실을 공부했다. '민중'과 같은 한국어도 배웠다. 특히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대부분 10대라는 점에 놀랐다. 그에게 전태일 사건은 곧 청소년 노동 착취의 문제였다.

그는 코리아(Korea)라는 소책자를 발간해 독일인들에게 청계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렸다. 그의 강연을 들은 10대 학생들은 '전태일의 뜻을 기리자'는 집회를 열었고 모금도 했다. 돔은 한국의 노동 운동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했다. 그 이유로 당시 안기부의 블랙리스트에도 올랐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소선은 한국을 방문한 테오 돔을 맞이해 비록 말은 통하지 않는다 해도 그가 청계천 주변 열악한 공장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그의 열정과 성실함에 감탄을 했다. 이때 이소선은 어렸을 때 동네 청년한테 배웠던 두 세 마디 영어로 좌중을 웃기기도 했다.

'인간의 대지'에서 지원 받은 돈으로 창신동 골목에 한옥 집을 매입했다. 매입 당사자는 이소선과 청계노조 간부로 했다. 공동으로 한 이유는 노조 명의로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별도의 법인을 만들 상황도 아니어서 이후 군부 독재가 물러가면 그 때 법인으로 전환하기로 한 것이다.

평화의 집과 전태일기념관 마련

이 집을 '평화의 집'으로 이름지었다. 평화의 집 개관식에는 여러 민주 단체는 물론 야당 정치인도 대거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소선은 "우리의 소원이 이뤄져 이제는 독재 정권이 우리를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남의 건물에 세들면 경찰, 안기부가 건물주한테 압력을 넣어 쫓겨나는 신세였는데 이제는 우리 집을 갖게 돼 좋다"고 말했다.이날 참석자들과 창신동 동네 사람들은 술과 떡과 고기를 나누면서 평화의 집 개관을 축하 했다.

청계노조는 '평화의 집'에 이어서 '전태일기념관'도 마련했다. 전태일 기념관건립위원회는 국내 모금이 여의치 않아 미국의 연합 장로에 프로젝트를 신청해 이것이 성사된 것이다. 미국 연합장로회에 신청한 돈은 한국의 기독교 단체를 통해서 도착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 자금으로 건물을 매입하면 그 소유주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청계노조와 한국의 기독교 단체 간에 이견이 생겼다. 청계노조에서는 청계노조 당사자의 명의로 소유가 돼야 받을 수 있다는 의견이었고, 기독교 단체에서는 종단 명의로 하고 사용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해도 된다는 의견이었다.

청계노조는 청계노조 당사자의 소유가 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면서 수령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5년 6월에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에서 수령했다. 그 돈으로 동대문 상가 아파트 두 채를 매입해 전태일기념관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소유 등기는 이소선, 문익환, 민종덕 공동 명의로 했다.

1985년 2.12 총선 결과는 민정당의 2중대로 불리는 유사 야당인 민한당을 공중 분해할 수 있는 신민당의 승리였다. 그럼에도 총선 이후 지금까지의 유화 국면이 끝나고 또 다시 탄압 국면이 예상됐다.

그래서 적령기인 청계노조 간부들은 이 유화 국면이 끝나기 전에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다시 탄압 국면이 시작되면 쫓기거나 구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혼기를 놓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청계 노조 간부들은 1985년 2월부터 3월 말까지 거의 매주 한 쌍씩 결혼식을 올렸다. 이소선은 이들의 결혼식 때마다 그들의 또 다른 어머니로 결혼식에 참석해 진정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노동자가 되라고 격려하고 당부했다.      

제3차 합법성 쟁취 투쟁

이렇게 겨울 동안 봄을 준비한 청계노조는 1985년 봄이 되자 또 다시 합법성 쟁취 투쟁의 길로 나아갔다. 지난해 1, 2차 투쟁에 이어 3차 합법성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차에 걸친 합법성 쟁취 가두 시위로 경찰의 대비는 더욱 광범위하고 치밀할 것이다. 이에 맞서 청계노조도 그에 못지 않은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야 했다. 또 다시 경찰의 허점을 찔러 가두 시위를 성공시키기 위해 궁리했다. 봄이 시작 되자 청계노조에서는 3차 합법성 쟁취 대회를 예고했다.

일시 장소는 그해 4월 12일 오후 1시에 장소는 1. 2차와 같은 곳에서 같은 요구 조건을 내걸고 연다며 대대적으로 홍보 했다. 그래놓고 노조에서 "이번에는 날짜를 변경해서 기습적으로 가두시위를 할 것이다. 그 날이 바로 4월 8일 청계노조 복구 1주년을 맞이해 대대적인 합법성 쟁취 가두 투쟁을 할 것이다"라는 말을 퍼뜨렸다. 이 말은 동대문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한테도 들어갔다. 투쟁 지도부에서는 이것을 노렸다. 4월 12일 거사를 앞두고 사전에 경찰의 작전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4월 8일이 되자 청계천, 을지로, 종로 일대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경찰들이 쫙 깔렸다. 청계노조 투쟁 지도부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경찰이 어떻게 배치되고 어떻게 경비하는지 실제 상황을 점검하고자 하는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이날 아침 일찍부터 배치된 경찰 상황을 점검했다. 그리고 3차 가두시위를 하기 좋은 장소를 찾으러 다녔다.

역시 경찰은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반경 2km정도는 삼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었다. 상황을 점검한 준비 팀은 여의치 않지만 그래도 초동에 진압되지 않고 대오를 형성 할 수 있는 장소는 신당동 시구문 옆 한양공고 앞 교차로로 판단했다. 물론 시구문 옆에도 경찰차가 배치돼 있기는 하지만 이들 경찰을 초장에 많은 숫자의 시위대가 제압을 하고 뚫으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인 4월 12일이 됐다. 이날 동화상가, 을지상가, 연쇄상가, 통일상가 등 공장이 있는 각 상가들은 철시하고 경찰들이 철통 같이 막았다. 청계천 일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후 1시 20분 점심 시간을 기해 시위대들은 신당동 중앙시장, 무학빌딩 등에 흩어져서 신호를 기다리던 시위대들은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일제히 용수철처럼 뛰어나왔다. 이들은 순식간에 스크럼을 짜고 시구문 옆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을 제압해 밀어붙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근처 골목길에 흩어져 있던 시위대들이 홍수처럼 신당동 교차로에 쏟아져 나왔다. 시위대 인원은 1, 2차 때 보다 더 많아 약 2500명가량됐다. 교차로를 가득 메운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면서 평화시장 방향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청계노조 인정하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신당동 교차로 주위 건물에 있는 봉제 공장 노동자들은 창문을 열고 내다보다가 밖으로 뛰어나와 시위대에 합세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경찰은 서울운동장 옆에 방어선을 치고 최루탄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고 투석으로 맞섰다.

경찰은 빠르게 병력을 증강 해 시위대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천천히 약수동 방향으로 이동했다. 중간에 있는 파출소를 시위대가 에워싸고 공격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파출소 밖에서 공격만 하고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경찰은 시위대의 위세에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고 엄청난 물량의 최루탄을 퍼부어 시위대의 위세를 약화하려는 작전을 펼쳤다. 이날의 시위는 약 4시간가량 신당동, 약수동을 휩쓸고 한남동 한강 다리까지 떠밀리면서 지칠 때까지 계속 이어 나갔다. 시위 과정에서 경찰 순찰차 1대와 시위 진압용 차량 1대가 불에 타기도 했다.

경찰은 시위가 끝나고 귀가하는 시민의 손을 일일이 검사했다. 돌멩이를 던진 흙 묻은 손은 무조건 연행 했다. 그러나 경찰이 연행한 사람들은 단순 가담자나 시위 구경꾼 시민만 연행했지 주동자급은 한 사람도 연행하지 못했다.

이소선은 평화의 집에서 시시각각 진행 상황을 전해 들으며 마음을 졸였다. 시위를 마치고 저녁 때 평화의 집으로 돌아온 조합원들은 온몸에 노랗게 최루 가스를 뒤집어쓰고 왔다. 이소선은 눈물, 콧물, 재채기에 정신이 없어도 이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 온 것에 감사하고 대견했다. 이소선은 조합원들의 옷을 벗겨 털어주고, 속옷도 빨아줬다. 눈이 매워 연신 눈물을 흘렸지만 이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덧붙이는 글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