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 학생을 각목으로... "경찰 헬기까지 떴어요"
[기획 연재] 인천대, 분쟁사학에서 국립대학법인으로 ⑧
국내 최대 사학으로 비리가 끊이지 않아 학내 구성원과 갈등을 지속했던 선인학원은 1994년 시·공립화됐다. 선인학원이 한때 거느린 학교는 14개, 그곳에 다닌 학생이 3만 6400여 명, 교직원이 1만 4000여 명에 달했다. 1980~1990년대 인천은 '노동자의 도시'로 불렸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이 많았던 인천엔 맞벌이 부부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맞벌이 부부 자녀들이 다닌 학교의 상당수가 선인학원 수중에 있었다. 이로 인해 인천 교육은 추락했다. 선인학원이 지금까지 그대로 존치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 기자 말
1986년은 5.3 인천민주항쟁과 건국대 사태, 개헌 공방 등으로 점철된 해였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기 위한 '민주 항쟁'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던 셈이다.
1986년 10월 인천대 폭력 사태는 결국 백인엽이 선인학원에서 다시 쫓겨나는 계기가 됐다(관련기사 : 캠퍼스 뒤덮은 파라솔... 학생들은 왜 발끈했나). 10월 21일, 축구부 학생들은 백주 대낮에 하키채, 못이 박힌 각목, 쇠파이프 등을 시위 학생들에게 휘둘렀고, 도망가는 학생을 쫓아가 뭇매질을 하는 만행을 목격한 학생들은 다음날 비상총회를 열었다. 재학생 약 5000명 중 3500여 명이 모였다. 인천대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가 열린 것이다.
"비상학생총회에는 4학년 빼고 다 모였을 겁니다. (86학번 정수영)"
"도서관에 있던 친구들까지 다 모여 싸움이 커진 거죠." (84학번 정명락)
"백인엽 모의 장례식은 폭력 사태로 확 퍼진 대중 열기를 모았지요. (경찰) 헬기까지 떠서 위협할 정도였으니까요." (80학번 심상준)
학생 농성에 무기 휴교령 내린 문교부
학생들은 비상 총회 후 단과별로 학장실과 보직 교수실을 점거했다. 학생 1000여 명은 자퇴서까지 쓰면서 결연한 의지를 피력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백인엽은 10월 22일 밤 10시 30분께 인화여중 교장실로 서정홍 인천대 학장과 임영별 재단 상임감사를 불러 "학생들의 요구대로 학원 운영에서 떠나겠다"며 사태 수습을 부탁했다.
그날 밤 인천대와 인천전문대는 '상식을 뛰어 넘는' 심야 긴급 교수회의를 소집했다. 인천대의 경우 10월 23일 새벽 1시께 교수 43명이 모였고, 이후 70여 명으로 늘었다.
회의에서 대학 당국은 백씨의 퇴진 의사를 전달했고, 사태 수습을 위해 교수들이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교수 10여 명을 선출해 '평교수협의회'를 구성했다. 이 교수들은 새벽 3시께 농성 중인 학생들을 찾아가 ▲백인엽 완전 퇴진 ▲축구부 해체 ▲학장 이하 전 교무위원의 즉각적 보직 사퇴 ▲중간고사 담당 교수의 재량에 맡길 것 등을 건의하기로 합의했다.
교수들이 학생들의 선인학원 정상화 투쟁에 중재자로서 처음 '수동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셈이다. 이후 10월 29일 교수회의를 또 열어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백인엽 완전 퇴진, 이사진 전면 개편' 등을 주장하는 결의문을 채택해 발표했다.
인천전문대도 10월 23일 비슷한 시간에 교수회의를 소집했다.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새벽 5시 비상 교수협의회가 열렸고, 교수 132명이 참석해 결의문을 채택했다.
결의문엔 ▲백인엽 영구 퇴진 ▲보직교수 총사퇴 ▲재단 이사진이 현 사태를 책임질 것 ▲농성 학생들에게 편의 제공 ▲학생 과격 행위 유감 등, 8개 항이 포함됐다. 또한 교수 5명을 선발해 '인천전문대 정상화를 위한 수습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재단에 의해 쫓겨난 학장 복귀와 보직 교수 사퇴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재단은 보직교수 사퇴 문제를 다루지 않고 시간 끌기로 버텼다.
이런 가운데 인천대 학생들은 농성을 계속했고, 문교부는 10월 31일 무기 휴교령을 내렸다. 대학 휴교령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1964년), 위수령(1971년), 10월 유신 반대 시위(1972년), 5.18민주항쟁(1980년) 때 내려졌다. 학교 관리 업무 이외의 기능이 일체 정지되는 휴교령이 특정 대학 문제로 내려진 경우는 처음이다.
당시 문교부는 책임을 학생들에게 돌리거나 양비론적 태도를 취했다.
"학생들이 14일부터 설립자 등의 퇴진을 요구하며 점거농성, 기물파괴 등 격렬한 소요를 거듭해와 학교 관계자들을 6차례 불러 학원을 정상화할 것을 촉구했으나, 교수들까지 학생에 동조하는 등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여 휴교령을 내렸다"(<한국일보> 1986년 11월 1일자 보도)
또한 문교부는 ▲주동 학생 엄중 처벌 ▲선동 학생 또는 동조 교수 조치 ▲재단의 학사 운영 불간섭 등을 주문했다.
휴교령이 내려진 31일 선인학원 교문 밖에서는 학생 700여 명이 연좌시위를 벌였는데 오전 한때는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일부 학생이 학내 진입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렇듯 학교 출입이 통제된 속에서도 학생 약 250명은 계속 학교 안 농성을 이어갔다. 인천대 학생 상당수가 건대 농성 투쟁에 참가한 가운데도 이 정도 인원이 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선인학원 민주화 투쟁에 학생들의 지지와 참여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인학원 정상화 투쟁으로 분위기 '반전'
10월 29일 전국 22개 대학 학생 2500여 명이 건국대에 모여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이라는 조직의 발대식을 진행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들을 좌경용공세력으로 몰았고 이에 학생들이 3박 4일간 농성을 이어갔다. 이를 '건대 사태' 또는 '건대 항쟁'이라 부른다.
건대 농성은 농성 시작 사흘만인 10월 31일 최대 구속 영장 신청(1288명)을 낳으며 진압됐다. 1288명 중 5명이 이후 구속된 395명 중 2명이 인천대 학생이었다.
앞서 건대 농성을 진압한 전투 경찰 2000여 명은 11월 1일 소방차 등을 동원해 인천대 본관 11층(도서관) 농성장 진입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총회를 열고 13명만 남기로 하고 나머지는 농성을 풀기로 결정했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소수만 남기로 한 것이다. 이 학생들은 결국 옥상으로 진입한 경찰에 의해 전원 연행됐다. 경찰은 이중 5명을 구속하고, 8명을 즉결 심판에 넘겼다.
1986년 선인학원 정상화 투쟁은 대학 분위기를 완전히 바꿨다. 또한 백인엽을 다시 학원에서 몰아내는 성과를 낳았다. 비리 사학의 본질을 본 학생들은 학생회와 재단 정상화 투쟁을 벌인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전 재단 정상화 투쟁 때는 소수가 탄압받는 양상이었다. 대자보를 붙이면, 직원들이나 학교 사주를 받은 학생들이 바로 찢어버렸다. 그런데 이때부터 분위기가 반전됐다." (86학번. 정수영)
그해 12월 2일, 백인엽은 문교부에 각서 하나를 제출했다. 이 각서엔 "물의를 야기한 데 대하여 유감으로 생각하며 앞으로 대학 운영에 관여하지 않을 것을 표명한다"고 적혀 있었다. 백인엽은 1980년 부패 혐의로 구속됐을 때 선인학원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검찰에 제출한 바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투쟁 이후 몸살을 앓았다. 폭력과 업무 방해, 특수 절도 등의 혐의로 여러 명이 추가적으로 고발됐다. 또한 최후까지 농성을 벌였던 학생 전원이 제적됐다. 여기다 10월 21일 폭력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축구부 학생 11명도 무기정학의 조치를 받았다. 가담 정도가 약했던 학생들도 2주일씩 정학 조치를 받았다.
문교부는 축구부 학생 폭력 사태에 책임을 물어 당시 학생처장과 학생과장을 해임하라고 지시했다. 또 학생들에 대한 우호적인 발언을 한 일부 교수에게도 해임이란 중징계를 내리라고 지시했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이 많았던 인천엔 맞벌이 부부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맞벌이 부부 자녀들이 다닌 학교의 상당수가 선인학원 수중에 있었다. 이로 인해 인천 교육은 추락했다. 선인학원이 지금까지 그대로 존치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 기자 말
1986년은 5.3 인천민주항쟁과 건국대 사태, 개헌 공방 등으로 점철된 해였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기 위한 '민주 항쟁'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던 셈이다.
1986년 10월 인천대 폭력 사태는 결국 백인엽이 선인학원에서 다시 쫓겨나는 계기가 됐다(관련기사 : 캠퍼스 뒤덮은 파라솔... 학생들은 왜 발끈했나). 10월 21일, 축구부 학생들은 백주 대낮에 하키채, 못이 박힌 각목, 쇠파이프 등을 시위 학생들에게 휘둘렀고, 도망가는 학생을 쫓아가 뭇매질을 하는 만행을 목격한 학생들은 다음날 비상총회를 열었다. 재학생 약 5000명 중 3500여 명이 모였다. 인천대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가 열린 것이다.
"비상학생총회에는 4학년 빼고 다 모였을 겁니다. (86학번 정수영)"
"도서관에 있던 친구들까지 다 모여 싸움이 커진 거죠." (84학번 정명락)
"백인엽 모의 장례식은 폭력 사태로 확 퍼진 대중 열기를 모았지요. (경찰) 헬기까지 떠서 위협할 정도였으니까요." (80학번 심상준)
학생 농성에 무기 휴교령 내린 문교부
학생들은 비상 총회 후 단과별로 학장실과 보직 교수실을 점거했다. 학생 1000여 명은 자퇴서까지 쓰면서 결연한 의지를 피력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백인엽은 10월 22일 밤 10시 30분께 인화여중 교장실로 서정홍 인천대 학장과 임영별 재단 상임감사를 불러 "학생들의 요구대로 학원 운영에서 떠나겠다"며 사태 수습을 부탁했다.
그날 밤 인천대와 인천전문대는 '상식을 뛰어 넘는' 심야 긴급 교수회의를 소집했다. 인천대의 경우 10월 23일 새벽 1시께 교수 43명이 모였고, 이후 70여 명으로 늘었다.
▲ 1986년 인천대 분규 관련 언론보도. ⓒ 한만송
교수들이 학생들의 선인학원 정상화 투쟁에 중재자로서 처음 '수동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셈이다. 이후 10월 29일 교수회의를 또 열어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백인엽 완전 퇴진, 이사진 전면 개편' 등을 주장하는 결의문을 채택해 발표했다.
인천전문대도 10월 23일 비슷한 시간에 교수회의를 소집했다.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새벽 5시 비상 교수협의회가 열렸고, 교수 132명이 참석해 결의문을 채택했다.
결의문엔 ▲백인엽 영구 퇴진 ▲보직교수 총사퇴 ▲재단 이사진이 현 사태를 책임질 것 ▲농성 학생들에게 편의 제공 ▲학생 과격 행위 유감 등, 8개 항이 포함됐다. 또한 교수 5명을 선발해 '인천전문대 정상화를 위한 수습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재단에 의해 쫓겨난 학장 복귀와 보직 교수 사퇴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재단은 보직교수 사퇴 문제를 다루지 않고 시간 끌기로 버텼다.
이런 가운데 인천대 학생들은 농성을 계속했고, 문교부는 10월 31일 무기 휴교령을 내렸다. 대학 휴교령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1964년), 위수령(1971년), 10월 유신 반대 시위(1972년), 5.18민주항쟁(1980년) 때 내려졌다. 학교 관리 업무 이외의 기능이 일체 정지되는 휴교령이 특정 대학 문제로 내려진 경우는 처음이다.
당시 문교부는 책임을 학생들에게 돌리거나 양비론적 태도를 취했다.
"학생들이 14일부터 설립자 등의 퇴진을 요구하며 점거농성, 기물파괴 등 격렬한 소요를 거듭해와 학교 관계자들을 6차례 불러 학원을 정상화할 것을 촉구했으나, 교수들까지 학생에 동조하는 등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여 휴교령을 내렸다"(<한국일보> 1986년 11월 1일자 보도)
또한 문교부는 ▲주동 학생 엄중 처벌 ▲선동 학생 또는 동조 교수 조치 ▲재단의 학사 운영 불간섭 등을 주문했다.
휴교령이 내려진 31일 선인학원 교문 밖에서는 학생 700여 명이 연좌시위를 벌였는데 오전 한때는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일부 학생이 학내 진입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렇듯 학교 출입이 통제된 속에서도 학생 약 250명은 계속 학교 안 농성을 이어갔다. 인천대 학생 상당수가 건대 농성 투쟁에 참가한 가운데도 이 정도 인원이 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선인학원 민주화 투쟁에 학생들의 지지와 참여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인학원 정상화 투쟁으로 분위기 '반전'
10월 29일 전국 22개 대학 학생 2500여 명이 건국대에 모여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이라는 조직의 발대식을 진행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들을 좌경용공세력으로 몰았고 이에 학생들이 3박 4일간 농성을 이어갔다. 이를 '건대 사태' 또는 '건대 항쟁'이라 부른다.
건대 농성은 농성 시작 사흘만인 10월 31일 최대 구속 영장 신청(1288명)을 낳으며 진압됐다. 1288명 중 5명이 이후 구속된 395명 중 2명이 인천대 학생이었다.
앞서 건대 농성을 진압한 전투 경찰 2000여 명은 11월 1일 소방차 등을 동원해 인천대 본관 11층(도서관) 농성장 진입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총회를 열고 13명만 남기로 하고 나머지는 농성을 풀기로 결정했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소수만 남기로 한 것이다. 이 학생들은 결국 옥상으로 진입한 경찰에 의해 전원 연행됐다. 경찰은 이중 5명을 구속하고, 8명을 즉결 심판에 넘겼다.
1986년 선인학원 정상화 투쟁은 대학 분위기를 완전히 바꿨다. 또한 백인엽을 다시 학원에서 몰아내는 성과를 낳았다. 비리 사학의 본질을 본 학생들은 학생회와 재단 정상화 투쟁을 벌인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전 재단 정상화 투쟁 때는 소수가 탄압받는 양상이었다. 대자보를 붙이면, 직원들이나 학교 사주를 받은 학생들이 바로 찢어버렸다. 그런데 이때부터 분위기가 반전됐다." (86학번. 정수영)
그해 12월 2일, 백인엽은 문교부에 각서 하나를 제출했다. 이 각서엔 "물의를 야기한 데 대하여 유감으로 생각하며 앞으로 대학 운영에 관여하지 않을 것을 표명한다"고 적혀 있었다. 백인엽은 1980년 부패 혐의로 구속됐을 때 선인학원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검찰에 제출한 바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투쟁 이후 몸살을 앓았다. 폭력과 업무 방해, 특수 절도 등의 혐의로 여러 명이 추가적으로 고발됐다. 또한 최후까지 농성을 벌였던 학생 전원이 제적됐다. 여기다 10월 21일 폭력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축구부 학생 11명도 무기정학의 조치를 받았다. 가담 정도가 약했던 학생들도 2주일씩 정학 조치를 받았다.
문교부는 축구부 학생 폭력 사태에 책임을 물어 당시 학생처장과 학생과장을 해임하라고 지시했다. 또 학생들에 대한 우호적인 발언을 한 일부 교수에게도 해임이란 중징계를 내리라고 지시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사인천(isisa.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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