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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찾아가는 이야기로 밤 깊어가는 줄 몰랐다

[남도기행 3박4일②] 의병연구가 이태룡 박사를 만나다

등록|2015.05.25 14:35 수정|2015.05.25 20:42
둘째 날(2)

이태룡

▲ 의병연구가 이태룡 박사 ⓒ 박도

가야대학교 가락관 308호실에서 '창작실기' 특강을 마치고 김성 교수 연구실로 돌아와 목을 축이는데 약속한 시간에 의병연구가인 이태룡 박사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분의 저서 <의병 찾아가는 길 Ⅰ·Ⅱ>를 내 서가에 꽂아두고는 수시로 참고하고 있다.

특히 2007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호남의병 전적지와 그 후손을 찾아가는 '항일유적답사기·2'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를 답사할 때는 위편삼절과 같은 안내서로 책을 펼칠 때마다 이 박사에 대한 존경심을 금할 수 없었다.

이태룡, 그는 1955년 경남고성 태생으로 그 무렵 경남의 한 고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검은 두루마기를 단정히 입고 있는 그의 사진에서 마치 구한말 의병장을 대하는 그런 기품을 느꼈다. 그 후 이런 저런 일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전화로), 저서를 교환하고, 메일로 안부를 전하는 사이로 발전했지만 그동안 직접 만나 회포를 푼 적은 없었다.

나는 첫눈에 그분임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피차 세월을 이기지 못한 채, 이제는 일선 교단에서 물러난 훈장으로 이마에는 인생 계급장과 머리카락에서는 인생의 연륜을 엿볼 수 있었다. 가야대학교 김성 교수의 안내로 가까운 밥집에서 점심을 들고, 이웃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서로가 걸어온 길을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애초 내 여정 계획에는 이태룡 박사와 점심을 나눈 뒤, 곧장 김해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통영으로 갈 생각이었다. 1966년 대학 재학시절 여름방학 때 부산에서 여수를 한려수도 뱃길로 갔다. 그때 잠시 들렀던 충무 남망산에서 바라본 그 다도해 경치를 두고두고 잊을 수 없어 이번 남도여행 길에 거기서 1박키로 여정을 잡았던 것이다.  그런 내 계획을 말하자 이 박사가 만류했다.

▲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 생가 ⓒ 박도


봉하마을로 가다

"오늘은 김해에서 주무시고,  내일 통영으로 가십시오."

나는 그 말은 뿌리칠 수 있었는데, 다음 말에 애초의 계획을 뒤로 미루었다.

"노무현 대통령 생가가 있는 봉하마을이 여기서 가깝습니다."
"그래요?"

마침 당신이 <한국 의병사> 상하권을 작년 여름에 펴냈는데, 노무현 대통령 영전에 바치기로 했으나 차일피일 중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흘 후면 6주기인데 조용할 때인 이때 다녀오자는 제의를 따르기로 했다. 나는 이전에 봉하마을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동향으로, 안면이 두터운 얘기를 했다.

"검찰로부터 그 수모를 당하고 얼굴이 핼쑥하신 게 말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기운 좀 내시라고 통영에 사는 동생에게 부탁하여 자연산 전복을 좀 보내드렸는데, 그것도 드시지 않은 채 돌아가셨나 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울적한 마음에 더 이상 말없이 봉하마을로 다가갔다. 각자 고인과의 추억에 잠긴 채…. 

바보 노무현의 추억

▲ 대통령 퇴임 후 밀짚모자를 쓴 노무현 ⓒ 사람 사는 세상

나는 서울생활 40여 년 중, 대부분을 종로에서 살았다. 1996년 4월 11일에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 총선 때 노무현은 종로에서 출마했다.

그때 종로는 정치1번지답게 신한국당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후보, 통합민주당 노무현 후보, 그밖에 김을동, 정인봉 후보 등 쟁쟁한 정치인들이 각축을 벌였다.

나는 한 유권자로 어느 날 종로5가 효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합동유세장을 찾아가 쟁쟁한 후보자들의 열변을 경청한 적이 있었다.

그때 노 후보의 정견발표는 마지막 순번으로 신한국당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후보 연설이 끝나자 동원된 청중이 반 이상 빠져나간 썰렁한 유세장에서 열변을 토한 후 쓸쓸히 돌아서는 그분의 뒷모습이 두고두고 삼삼하게 그려졌다.

그는 쉬운 선거구를 두고, 연고가 전혀 없는 정치1번지 서울 종로에서 출사표를 던졌다. 3당 합당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지역을 볼모로 하는 망국적인 적폐를 타파하고자 정치1번지에서 승부수를 던지는, 당시로서는 달걀로 바위를 치는 그런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때뿐 아니었다. 그 뒤로도 그분은 쉬운 길을 두고도 남이 가지 않는 길을 바보처럼 일관되게 걸었다. 그런 선구자 정신이 아마도 그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경남 안의(함양) 출신 노응규 의병장이 노무현 대통령 종증조부입니다."

이 박사가 오랜 침묵을 깨트리면서 내가 전혀 몰랐던 가계를 얘기했다.

"아, 네. 그런 의병장의 후예라서 그런 강단이 나왔나 봅니다."
"왕대 밭에 왕대 나지요."

이 박사의 대꾸였다.

봉하마을로 가는 길목은 6주기 추모행사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도로에는 노란 바람개비가 세워지고, 마을에는 손님 맞을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 모든 것을 봉하마을 뒷산의 부엉이바위와 건너편 사자바위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태룡 박사는 당신의 저서와 국화송이를, 나는 국화송이를 제단에 바치며 깊이 고개 숙였다.     

나는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안흥산골에서 띄우는 편지(68) "'그저 그런' 대통령으로 남으렵니까(2005. 1. 11)"에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퇴임 뒤 소줏잔을 나누면서 허심탄회하게 대담할 기회가 있기를 간곡히 바라면서…."라고 소박한 만남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일이 있을 줄이야.[관련기사 : 당신은 정말 행복하신 분입니다(2009.3.14) 이제 우리도 자랑스러운 대통령을 가졌습니다(2009. 5. 27)]

봉하마을에서 돌아온 뒤 우리는 김해 시내 한 횟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좀 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대통령 노무현 묘소 ⓒ 박도


원석을 캐는 사람

이태룡은 조선 선조 때 병조참판으로 황해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장 구로다의 5천 군사를 물리친 충목공(忠穆公) 이정암(李廷馣)(2등 공신)의 후손으로, 큰할아버지(李基煥)와 당숙(李圭萬)은 각각 40세와 19세에 순국한 한말 의병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큰할아버지와 당숙의 의병 행적을 찾던 중, 그 기록들이 소실된 데 참담함을 느꼈다고 비통해 했다.

부산·경남지방은 일본과 가까운 탓으로 다른 지방보다 더 일찍이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그에 따른 의병들도 많았는데 정부의 포상이나 수훈자는 호남이나 경북에 견주어 1/10 정도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그 까닭인즉,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와해되어 대법원으로 이관되자 반민족 세력들이 조종한 폭도들이 1949년 10월 27일 상오 1시 30분경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해군병사·경찰서·형무소를 공격하며 해군병사·식당·형무소 사무실·진양군청·재판소에 방화하여 건물을 소각(동아일보. 1949.11.13. 보도)시켜 그들의 친일 행위뿐 아니라, 의병 및 애국지사들의 재판기록 등이 모두 소실됨을 알고 매우 참담했다고 말했다. 그러한 울분이 그를 의병연구가로 인생길을 바꾸게 했음을 그의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와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여 오랜 세월 고교에서 국어교사로 지낸 점, 정년을 다 채우지 않고 퇴직하여 근현대사 연구에 골몰하고 있는 점, 등으로 우리의 대화는 강물처럼 그칠 줄이 몰랐다. 내가 찾았던 의병 전적지는 이미 그가 먼저 다녀간 곳으로 그 마을얘기나 후손들의 아픈 얘기는 우리들의 공동화제로 마냥 이어졌다.

그는 1986년부터 30년째 의병사를 공부하며 현장 답사를 하고 있었다. 초창기 전북 덕유산 어느 산골마을에서 의병지 답사를 하다가 마을 주민의 신고로 경찰의 불심검문도 받았다고 했다. 의병전적지를 수소문하는 그를 간첩으로 오인하여 신고했다는 웃지 못 할 얘기도 했다.

▲ 이태룡 지음 <한국 의병사> ⓒ 박도

아직도 구천을 헤매는 원혼들은 부지기수다. 그는 그분들의 원혼을 진혼코자 지금도, 앞으로도 의병전적지를 찾고 먼지 묻은 진중일기나 법원의 판결문이나 사형집행기록들을 들출 것이다.

그는 원석(原石)을 캐는 광부다. 그에 견주면 나는 그가 캐낸 원석을 별다른 노력 없이 줍는 얌체 글쟁이에 불과하다.

그의 용어는 원석 그대로 '부왜(附倭)', '토왜(討倭)', '겁약(劫約)', '억변(抑變)' 등 일백년 전 의병들이 썼던 그 시절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그의 글에는 조선의 무명과 같은 질박함과 순결함이 배어 있다.

그는 이 시대 외면 받는 의병사에 매달린, 진정한 애국자요, 겨레의 사표다. 독립군을 잡아족치던 간도특설대 출신이 영웅으로 추앙되는 세상에 의병을 연구하고, 토왜세력들의 자취를 더듬는 그는 현대판 의병장이다.

우리들의 '의병 찾아가는 이야기'는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김해에서 둘째 날은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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