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째' 외우는 가정통신문, 무슨 내용 들어있길래
[열다섯 살은 중이다⑤] 급식이 진짜 '밥심'
▲ 학교 급식실 모습점심시간 급식 봉사활동을 하려고 학생들이 준비하고 있는 모습 ⓒ 임정훈
가출했지만 무단결석 안 하는 지민이
지민(여, 중2)이가 가출한 지 사흘째다. 초등 5학년 때 지민이의 부모는 이혼했다. 그 후 아버지와 둘이 사는데 아버지가 종종 지민이를 때리기도 하고 욕도 한다. 지민이가 안 좋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담배를 피우고, 집에도 늦게 들어오고, 아빠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중학생이 되면서 사춘기 물이 오른 지민이와 아빠의 갈등은 더 커졌다. 지민이는 자신을 챙겨주고 이해해주기보다는 때리고 혼내는 아빠가 더욱 싫었고, 그걸 못 견딜 만큼 힘들어지면 한 번씩 집을 나갔다. 그러다 다시 집에 들어가면 아빠의 폭력은 더 커졌고 갈등 역시 더 크게 불어났다. 같은 동네에 사는 고모가 한 번씩 지민이를 챙겨주고 아빠와의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해주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게 부족했다.
위 클래스란? |
학생들의 학교 적응을 위한 상담과 심리 검사 등의 일을 한다. Wee는 We + education 또는 We + emotion 의 합성어로써, 학교, 교육청, 지역 사회가 연계하여 학생들의 건강하고 즐거운 학교생활을 지원하는 3단계의 다중 통합지원 서비스망이다. 2008년부터 학교에는 Wee 클래스, 지역 교육청에는 Wee 센터, 시·도 교육청에는 Wee 스쿨이 있다 |
그런데 지민이는 가출을 해서 집을 나왔어도 학교에는 결석을 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와서 벌써 몇 번의 가출을 했지만 학교를 빼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집을 나오면 학교도 안 나오는 일반적인 가출의 유형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급식은 먹어야 하잖아요!"
이유는 단 하나, 밥. 그러니까 '급식' 때문이었다. 학교에 나오면 어차피 공부야 관심 밖의 일이니 신경 쓸 게 아니었고,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인 밥을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위탁급식에서 직영급식으로 바꾸면서 급식 메뉴의 질이 좋아졌다. 이어 유상급식에서 무상급식으로 변하면서 급식비를 안 냈으니 빨리 내라는 급식비 미납고지서 같은 독촉도 사라졌다. 기꺼이 즐겁게, 친구들과 함께 왁자지껄하면서 먹기만 하면 됐다.
가출했으니 먹는 게 제대로 일 리 없는 건 자명했다. 굶거나 간단한 분식 등으로 때우는 게 다반사였다. 그중 한 끼나마 학교에서 급식으로 온전히 해결할 수 있으니 지민이로서는 가출은 했지만 학교에 나올 이유가 충분했다. 가출을 이유로 학교를 안 나오는 것도 아니니 '무단결석'이라는 죄명으로 징계(대한민국 학교들은 왜 무단결석을 징계의 사유로 정해 놓았을까)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한 끼 밥, 급식의 힘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무상급식은 가출한 학생도 학교에 나오게 한다. 이것이 진짜 '밥심'이다.
▲ 학교 체육대회에 등장한 손팻말급식실에 달려가는 마음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하자는 뜻의 “급식실 가는 마음으로”라는 팻말이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 임정훈
"급식실 가는 마음으로"
매월 초 중규의 중요 업무(?) 중 하나는 급식표 가정통신문을 외우는 일이다. 중규는 월초마다 나오는 급식표 가정통신문을 가장 애타게 기다린다. 혹 사정이 생겨 하루이틀이라도 늦으면 중규는 급식표 가정통신문이 왜 늦느냐고 담임 선생님에게 따지듯 묻기도 하고 급식실로 달려가 직접 확인하기도 한다.
중규뿐만 아니라 한창 성장기인 중딩들에게 급식은 절체절명의 중요 일과다. 급식을 후다닥 먹어치우고 매점으로 달려가 후식을 사 먹는 것까지 마쳐야 중식 코스가 끝난다. 그러므로 교과서보다 밥이 더 중요하다는 데 이견을 달 중딩은 단언컨대 없다.
그래서 4교시 수업은 항상 위태롭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4교시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는 시각을 '적확하게' 안다. 교실 벽에 걸린 낡은 아날로그 시계를 보고 1초도 안 틀리게 타종 시각을 잡아낸다. 아무리 용한 족집게 무속인도 이럴 수는 없다.
"(학생들 몇 명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5, 4, 3, 2 (큰 소리로) 1!"
"(동시에 수업 끝을 알리는 종소리) 딩동댕~~"
4교시 수업을 마치기 몇 분 전부터 학생들은 미묘하게 술렁이기 시작한다. 의자에 앉아는 있지만 이미 몸의 절반 이상이 출입문 쪽을 향하고 있거나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안절부절못한다. 아직 선생님의 설명은 계속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교과서를 진즉에 덮어버린 이들도 있다. 게다가 학생들이 좋아하는 메뉴가 들어있는 날은 급식실 앞 줄서기에 밀리지 않으려면 더욱 서둘러야 한다. 밥은 소중하니까!
매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숱한 가정통신문 가운데 학생들이 유일하게 절대로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대부분의 가정통신문은 나눠주는 순간 종이비행기가 되거나 쓰레기로 전락해 버리지만 이건 결코 그렇지 않다. 바로 한 달 치의 급식 식단을 알려주는 급식표 가정통신문이다. 밥과 반찬 그리고 열량 표시까지 다 들어 있는 급식표 가정통신문을 학생들은 가장 소중히 간직한다.
이 급식표 가정통신문을 학생들이 보관·관리하는 데는 대체로 몇 가지 일정한 유형이 있는데 대략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필통 보관형 - 급식표 가정통신문을 받으면 고이 접어 필통 속에 넣어두고 날마다 꺼내보는 유형이다. ▲ 벽보 게시형 – 주로 교실 벽 쪽 자리에 앉는 학생들이 자주 하는 것으로 벽에 급식표를 붙여두고 확인하거나 날짜별로 지우는 유형이다. ▲ 책상 부착형 – 자신의 책상에 급식표를 붙여두고 날마다 하나씩 뜯어내거나 X 표시를 하며 지우는 방식으로 이용하는 유형이다.
▲ 몽땅 암기형 – 급식표 가정통신문을 받으면 곧장 외워버리는 유형으로 전체 메뉴를 모두 외우거나 주 메뉴만 외우는 형태,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와 그렇지 않은 메뉴로 나누어 외우는 형태로 구분된다. ▲ 교탁 활용형 – 교탁 바로 앞에 앉는 학생들이 즐기는 유형으로, 자신의 책상과 교탁이 마주하는 위치에 급식표를 붙이거나 날짜별로 잘라서 붙여두고 활용하는 형태다. 등잔 밑이 어두운 관계로 선생님들은 결코 이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이 밖에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가 나오는 날만 골라 책상 위에 날짜별로 식판 그림을 그려 놓는 유형 등도 있다.
이처럼 학생들이 급식표 가정통신문을 보관·활용하는 형태는 다양하지만 결국 모두가 '밥'을 향한 격렬하고 뜨거운 마음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학교의 급식 메뉴를 알려주는 스마트폰 앱도 다양하게 나와 있다. 때문에 학생들은 저마다 휴대폰에 하나씩 설치해 두고 같은 동네 이웃 학교와 급식의 질을 비교하는 데 활용하기도 한다.
학교 체육대회에서는 급식실에 달려가는 마음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하자는 뜻의 "급식실 가는 마음으로"라는 팻말이 등장해 눈길을 끌며 보는 이들이 웃음을 머금게 하기도 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걸 중딩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 책상 부착형자신의 책상에 급식표를 붙여두고 날마다 하나씩 뜯어내거나 X 표시를 하며 지우는 방식으로 이용하는 유형이다. ⓒ 임정훈
무상급식은 세종대왕도 했다
우리나라의 학교급식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제한적으로 이어져 오다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학교급식법>(1981년)과 <학교급식시행령>을 제정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초등학교 급식은 1993년부터 크게 확대, 1998년부터는 전국 모든 초등학교에서 급식을 실시하게 됐고 1991년 2학기부터는 특수학교의 급식이 무상으로 제공됐다. 2003년에 이르러서야 초·중·고 학교급식이 전면 실시됐으며 2015년 현재 경남 등 일부 지자체를 제외한 대부분 지자체에서 초·중학생 모두에게 무상급식을 시행하고 있다.
무상급식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117권, 29년 <1447년> 9월 8일)에 등장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의정부에서 예조의 공문을 근거로 말하기를, '사부학당의 학생들에게 한 끼니 식사를 항상 주고, 온종일 토론하며 책을 읽게 하였습니다'(議政府據禮曹呈啓, '四部學堂生徒, 常給一時之食, 使之終日講讀)라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이미 사부학당(서울의 중앙 <中學>·동쪽 <東學>·서쪽 <西學>·남쪽 <南學>에 설치한 성균관의 부속학교)의 학생들에게 한 끼 식사를 매일 주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물며 21세기인 지금 학교에서 학생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다. 가출을 하고도 학교에는 꼬박꼬박 나오는 지민이도, 교과서는 잘 안 보지만 한 달 치 급식표를 줄줄 외우는 중규도 모두 학교급식 시간이 있어 따분하고 재미없는 학교생활이 그나마 즐겁다고 말한다. 지옥 같은 학교를 견디게 하는 큰 힘 가운데 하나가 급식이다.
이들에게서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밥 한 끼 먹는 즐거움마저 빼앗는 세상은 오지 않았으면 한다. 최소한의 행복을 누릴 권리는 지민이도 중규도 또 다른 중딩 모두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 다양한 급식표 활용법. ⓒ 임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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