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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남편에게 밥 해주고 싶다... 나, 미친 건가

[맞벌이 가족 리씨네 유럽캠핑 에세이 21] 포르투갈 포루투

등록|2015.06.14 20:09 수정|2015.06.14 20:46

▲ 록, 니콜, 카와라.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는 유쾌해서 아름다운 가족이다. ⓒ 이성애


한국인의 주식인 쌀에 대한 관심이 많던 록을 위해, 나는 "한중일의 쫀득한 밥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라며 큰소리를 쳤다. 시내관광이 늦어지는 바람에 저녁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가슴 졸이며 캠핑장으로 들어왔다.

허겁지겁 밥쌀을 씻고 호주인과 우리 입맛 사이의 공통분모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다 생각해낸 게 하필 '아웃백 스테이크'였다. 왜냐하면 난 이 브랜드가 호주 것인 줄 알았다. 나중에서야 다른 나라의 상표라는 걸 깨달았지만. 여하튼 내가 그 식당에서 먹은 것 중 좋아하는 '더운 야채'를 만들기로 했다.

매번 질척하니 양호하게 되던 밥이, 잘 하느라고 물을 적게 넣은 덕에 덜 익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프리카를 비롯한 야채는 타고 있었다. 캠핑장 초입에서 한국인 가족을 만나 얘길 나누지 않았더라면 야채를 태우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한 달 만에 만난 한국인이라 너무 반가웠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하필 록이 들이 닥쳤다. 서둘러 불을 끄는 내 모습을 록이 보았다. 밥솥을 구경하러 왔단다.

록은 평범한 사람의 1.5배 정도 되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양념에 대해 묻고는 내가 '중국간장'이라 하자 반가워했다. 그 후 우리의 요리 얘기는 길어졌고 그가 중국 요리 및 재료에 친숙하며 요리에도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외다. 다행이다. 도끼보다는 취사용 칼에 찔려 죽는 게 나을 것 같다.

보트도 땅도 있는 그, 한식에 "오늘 밥 맛있었요"

▲ 해변 ⓒ 이성애


사실 식사는 우리가 제안했지만 록의 집에 번듯하고 편리한 장비, 도구가 많았다. 준비한 것들을 가지고 록의 캠핑카로 갔다. 내가 준비한 음식은, 이름을 붙이기도 애매한 정체불명의 먹을 것이었다. 반면 니콜이 준비한 요리는 이름이 명확했다. 간장에 졸인 닭다리와 고춧가루와 중국간장으로 재운 돼지고기. 한마디로 고추장 삼겹살이다. 그들이 가진 것을 더 많이 쓰고 먹었지만, 캠핑 분위기는 좋았다. 서로 캠퍼이기에 가능한 상황이겠지.

록은 광산을 설계하는 프리랜서 엔지니어란다. 아마도 채굴을 위한 통로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보았다. 몇 해 전 몽골에 와서 잠시 일했는데, 휴일도 없이 일했단다. 록이 장난기가 섞인 표정으로 "니콜은 여유 있게 휴가를 보낼 때 나만 일했어"라고 하자 니콜이 "영하 30도에서 어떻게 휴가를 보내?" 한다. 알고 보니 몽골이 한겨울이어서 엄청 추웠단다. 록이 씨익 눈치를 보며 웃는데 제법 귀엽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브리즈번에서 브리즈번 샐러드로, 브리즈번 샐러드에서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로,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아웃백으로 바뀌며 어느덧 록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이제 호주로 돌아가 새로운 직장을 구할 것이란다. 호주에는 한중일 사람들이 참 많아서 입맛도 다양하다고 덧붙였다. 호주에 오면 반드시 브리즈번 자신의 집에 들르라고 한다. 보트도 태워 준다고 약속했다.

"아, 보트가 있었구나!"

보트도 있고 랜드로버 차도 2대에 1.5에이커(ac)의 땅도 있단다.

"아, 땅도 넓구나!"

일단 땅의 단위가 우리에겐 생소한 '에이커'란 점 때문에 록의 아우라는 황금빛으로 바뀌었다.

식사가 끝나자 록은 "이지, 이지"를 외치며 현이 아버지를 끌고 취사장으로 부리나케 갔다. 그날 저녁 설거지를 다음날로 미루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인 현이 아버지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록의 설거지 속도는 '빛'처럼 빠르다고 한다.

날이 어둑해졌다. 록은 춥냐고 묻더니 하루 종일 캠핑장 스태프들이 빗자루로 쓸어 모은 나뭇잎을 가져와 지저분하게 흩으며 숯불에 태웠다. 록의 독특한 행동-대화하며 배 긁기, 엉덩이에 낀 바지 빼기-는 여러 차례 봐서 그런지 이젠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네덜란드 할머니에게는 분명히 호주 사람에 대한 안 좋은 선입견을 안겨주었을 테다. 또 간간이 뀌어대는 방귀 소리와 재빨리 "쏘리, 익스큐즈 미, 오오!" 외치는 게, 그리 민망하지 않으니 신기하다.

직접 무릎을 꿇고 요리의 냄새를 맡으며 "냄새가 좋다"고 말해주는 그가, 설익은 최악의 밥을 먹고도 "오늘 밥 맛있었어요"라고 말해주는 그가, 빛의 속도로 설거지를 하고 소스를 연구하며 요리를 즐겨하는 그가, 와인 먹으러 오라는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도끼로 한국인을 해코지할 사람은 절대 아니다.

이렇게 자상하고 섬세한 록을 그렇게 오해했다는 게 난 지금 너무나 가슴 아프다. 호주에는 뱀이 많다는 말에, 한국에는 땅꾼이란 직업이 있으며 예전에 뱀술도 먹었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뱀술이 남자에게 좋다는 말과 다음에 브리즈번에 가게 되면 뱀술을 꼭 갖다 주겠다고까지 해버렸다.

그 날이 온다면 직접 밥솥까지 비행기를 태워 가야지. 그래서 꼭 쫀득한 밥을 해주고 싶다. 매운 맛을 좋아하는 록을 위해 오리지널 순창 매운 고추장으로 만든 불고기도 해주고 싶고.

남의 집 남자에게 밥을 해주고 싶은 감정이 솟구치다니. 나 미친 거 아니니?

[에필로그] 다음 날 관광 중

▲ 아내들에게 휴식을 주자고 제안한 록. 그의 배려로 여자들은 편히 쉬고 남자들은 한나절 아이들과 바닷가에서 모래 놀이를 하였다. ⓒ 이성애


▲ 4살 카와라, 5살 쭈, 7살 현 ⓒ 이성애


: "(별 조심하는 기색도 없이 방귀) 뽀옹~"
남편 : "아이고~"
: "아우, 방귀나 뽕뽕 뀌고. 도대체 내가 록과 다를 것이 뭐야?"
남편 : "달라. 록은 방귀 뀌고 '쏘리'라고 말은 해."
: "오우, 쎠어리."

록은 자신의 가족이 할리우드 스타란다. 피오나와 슈렉이라며 웃는다. 서로 뽀뽀도 쪽쪽 하고. 아들을 낳을 것이면 록을 닮아도 되지만, 딸을 낳을 것이면 카아라와 같이 꼭 엄마를 닮아야 한다는 말에 록이 심각해진다. 그리고는 자신의 허벅지보다 더 큰 허벅지를 만들며 바로 그 정도가 여동생 허벅지란다.

절대 딸은 자신을 닮으면 안 된다는 의미다. 절대.

○ 편집ㅣ곽우신 기자

덧붙이는 글 2012년 맞벌이 엄마, 아빠, 5살, 7살 두 딸은 직장과 유치원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쉼(태국), 사랑(터키), 도전(유럽캠핑)을 주제로 5개월간 여행하였습니다. 본 여행 에세이는 그 중 도전을 주제로 한 유럽캠핑에 관한 글이고 관광보다는 용기를 내어 외국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친구가 되었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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