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한 촛불? 개나 주라 그래
[맞벌이 가족 리씨네 유럽캠핑 에세이 25] 스페인 피게레스
▲ 내비게이션에 의지한, 외국에서의 야간 운전은 참 긴장된다. 그래서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 이성애
이번엔 튤립 나라 사람들이야
프랑스에서 캠핑을 시작하여 스페인에 처음 들어와 머물렀던 곳이 피게레스이다. 거의 한 달 만에 이베리아 반도를 한 바퀴 돌아 다시 피게레스로 왔다. 한밤중인 11시 즈음에. 그것도 또 풍차의 나라 사람들 가까이에.
넓은 캠핑장의 많은 구역 중 우리 동네 8자리 중 네덜란드가 3자리, 현지인이 분양받은 것으로 보이나 빈집이 2자리, 그리고 벨기에 차량 1자리, 그리고 한국 1자리, 그리고 빈자리. 여하튼 사람이 든 곳은 5자리이며 3자리가 튤립 나라이니 또 50%가 넘는 수치이다.
아침에 옆에 있는 튤립 나라 사람이 말하길 어젯밤 자다가 많이 놀랐단다. 아마도 굳은 땅에 망치질 하는 소리를 듣고는 놀란 모양이다. 남편에게 말하길 하루만 묵고 오늘 곧장 바로셀로나 쪽으로 가신단다. 할머니께서 이 캠핑장에 머문 시간은 고작 10시간 내외이고 우리와 대화 한 시간은 10분 남짓, 더구나 내 눈을 바라보며 말씀하신 시간은 2분 내외지만 난 그녀와의 대화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그로인해 나는 큰 용기를 내게 되었다.
"아이구, 하루만 더 있으면 요리 좀 배우고 싶었는데. 나는 남이 요리하는 거 보면 그래도 흉내를 잘 내. 알잖아, 우린 맨날 감자튀김, 고기, 잼, 햄, 달걀, 야채... 말하기도 뭣해. 야채 중에서도 알지? 그런 거. 이를테면 오이! 여하튼 질려. 맛 없어. 다른 것 좀 먹고 싶어. 하루만 더 있으면 내가 한국 요리를 배울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워."
정말 그들의 뻔한 요리 재료들, 뻔한 레시피들에 입맛을 잃어갈 즈음 그들의 평상시 식사하는 모습이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그들은 '맛이 있어서'가 아닌 '몸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원을 얻기 위해' 그냥 한 끼 때우는 심정으로 바게트를 삼시세끼 우적우적 씹어 먹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그들은 쌀 대신 빵을 주식으로 할 뿐이고 그들의 입맛엔 그게 맛있는 걸 거야"라고 누군가 말했으나 그럼에도 난 그들의 식사에서 미각세포의 역할은 그리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용기를 냈다. 한국의 가정식의 꽃이며 기본적인 식재료를 가지고도 어려움 없이 시도할 수 있는 닭볶음 요리를 해서 조금씩 맛보이기로.
사실 캠핑을 하며 최대한 놀고 쉬려는 모습이 역력한 유럽인을 보며 삼시세끼는 아니더라도 한 끼 정도 밥 같은 밥을 먹기 위해 바지런히 준비하는 모습이 어떻게 비쳐질까 의식한 적이 있다. 날은 덥고 냉장고가 없어 식자재를 신선하게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쪼그리고 앉아 오랜 시간 야채를 다듬고 텐트를 드나들며 간을 보는 일이 좀 후진국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며 위축되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꽤 가까이 지내다 보니 사실 그들의 요리는 달리 준비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빵, 햄, 과일은 그냥 내놓고 달걀은 삶거나 아니면 오믈렛으로 간단히 조리하고 커피를 끓이면 끝이다. 물론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달팽이요리', '푸아그라', '캐비아', '새끼돼지' 등의 특별한 식재료가 들어가는 전문 레스토랑의 메뉴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먹는 그들의 가정식을 말하는 것이니 '유럽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요리의 재료와 조리법이 너무 빈약해 보였다'라고 말해도 우르르 덤비지 마시길 바란다.
한국인의 입맛이 많이 자극적인 것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그들보다 훨씬 다채로운 요리를 해왔고 가족들의 입맛을 만족시켰음을 자부하며 요리를 하려고 한다. 최대한 현지에서 구한 식재료를 사용하기로 했다. 토막 낸 스페인 닭, 감자, 양파, 마늘, 완두콩 잎사귀를 깨끗이 다듬었다. 그리고 소금, 한국산 고춧가루 팍팍, 토마토 대신 케찹, 까르푸 매장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중국 간장 조금, 설탕도 넣었다. 그리고 푸욱 끓였다. 조그만 냄비 하나 가득 끓이면서 12쪽가량의 마늘 1통을 거의 다 넣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입자가 좀 큰 고춧가루가 요리의 모양새를 헤칠까하는 염려를 했지만 그런대로 색깔이 괜찮고, 우러나면 우러날수록 좀 단맛이 나긴 하지만 맛도 괜찮다. 원래는 우리 옆집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데 구역 입구에 있는, 히피스러운 헤어스타일의 튤립 나라 아줌마가 눈을 반짝이며 '대화 좀 해야지 우리 집 앞을 지날 수 있다'는 텔레파시를 강하게 쏘신다. 그녀와 얘기가 길어졌고 그녀는 우리 가족의 여행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어느덧 첫 여행지였던 태국 이야기가 나왔고 내가 물었다.
나 : "혹시 태국에 가보셨어요?"
아줌마 : "나는 아니고 내 남편의 형이 태국 여자와 결혼했어."
나 : "어, 태국 음식 드셔보셨겠네요?"
아줌마 : "응, 내 입맛엔 좀 맵던데..."
나 : '('매운 것 좋아한다고 하면 맛 좀 보시라고 드려야지' 라고 대본을 짠 나는 잠시 머뭇거리며) 예, 저도 좀 맵긴 했어요. 그래도 저는 좋아해요. 한국 음식하고 비슷해요. 이제 밥 먹으러 갈게요."
집으로 돌아와 식탁을 차리며 생각하니 그래도 아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식사 전인 그들의 식탁에 수북이 쌓인, 담백한 바게트 조각이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바베큐 판에서 구워지고 있는, 현지 마트에서 구입했을 누런 향신료를 입은 닭꼬치도 떠오른다. 내가 그런 종류를 안 먹어봤으면 모를까 몇 달을 그것만 먹었는데. 그 퍽퍽한 맛이며, 단조로운 맛을 어찌 상상 못할까.
그래서 냄비를 통째로 들고 가서 벌건 양념 속에 엇갈려 있는 닭다리를 보여주며 이것이 한국 가정식 요리 중 하나라고 했다. 좀 나눠주고 싶다는 말에 그녀가 '고맙다'고 말하는 사이 나는 아저씨와 아줌마 그릇에 시뻘건 닭다리와 감자, 그리고 완두콩을 담았다. 이 완두콩 잎은 한국엔 절대 없는 것이나 내가 여행 중 사용하게 된 식재료를 밝힘으로써 혹시 맛이 이상할 경우 '이건 한국 식재료가 아니라고 했지'라는 생각과 '역시 한국 여성은 식재료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란 생각을 동시에 가질 수 있도록 했다. 푸하. 그리고 원래 주고자 했던 옆집에 큰 조각의 닭 어깻죽지와 감자, 또 완두콩 잎을 주었다.
많이 떨리고 들뜬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려니 남편은 아무래도 대각선 집의 프랑스인(우린 그들이 프랑스어를 해서 벨기에에 사는 프랑스인이구나 생각했다. 좀 지나서야 벨기에가 프랑스어를 쓰는지 알았다)들이 마음에 걸린단다. 냄비엔 남은 것이 없고 그들은 절대 못 봤을 것이라고 하니 혹시 창문으로 봤으면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겠냐고 한다. 사실 네델란드 2집, 우리 집, 프랑스 집 중 소통의 빈도는 네델란드 두 집끼리가 당연 높고, 그 다음이 우리 집까지 껴서, 그리고 영어가 안 되는 프랑스 집과는 거의 인사만 하든가 아니면 몸 짓과 표정과 간단한 낱말을 써서 대화하는 정도였다.
밤 늦도록 4m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말을 주고받는 튤립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쏼라쏼라 대화할 때 우리도 소외감을 느꼈는데.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생각하니 우리가 먹으려고 담아 놓은 접시에서 덜어낸다는 것이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누어 먹는 게 옳은 행동 같다. 남편은 이미 식사를 끝내고 캠핑카에 오르신, 쾌활한 프랑스 부부에게 한 접시 들이밀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의 생각이 옳았소."
히피 스타일의 아줌마는 "전혀 맵지도 않고 달콤하고 맛있었다"라고 했다. 내 자랑하는 감이 있긴 하지만 그녀는 내 요리, 한국의 평균적인 맛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하튼 외국의 캠핑장에서 낼 수 있는 최선의 한국의 맛에 대해 '러블리'란 단어를 썼다. 옆 집 아줌마께선 직접 찾아와서는 "완벽한 맛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잠시 뒤 카메라를 가지고 왔다.
아줌마 : "내가 집에 가면 우리 딸들에게 한국에서 온 아주 멋진 가족을 만났다고 말해 줄 거예요.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나 : "(순간 5일간 이곳에 머물기로 한 우리의 결정이 생각나고 지금 알레르기로 부어오른 눈탱이가 생각나 본능적으로 사진 촬영을 거부하고 싶어진다.) 죄송한데, 언제 떠나세요?"
아줌마 : "화요일에요.(4일 뒤)"
나 : "우리 시간도 넉넉한데 제가 메이크업을 한 날 찍으면 어떨까요?"
남편 : "야! 그냥 찍어. 뭘 화장하고 찍어?"
아줌마 : "(놀이터 가는 아이들에게) 자리로 돌아와 앉아라. 찰칵."
- 아줌마가 가신 후 -
남편 : "너 정말 나중에 사진 찍자고 한 말 장난이야? 아니면 진짜야?"
나 : "진짠데."
남편 : "네가 무슨 연예인이냐?"
나 : "아~~ 나 유명인병 걸렸나봐. 우하."
일단 한국의 맛을 성공적으로 전한 것으로 결론내고 나니 한결 우쭐한 마음이 든다.
▲ 4성급 캠핑장이던가? 놀이터가 좋았다. ⓒ 이성애
로맨틱? 개나 주라 그래
잠잘 시간임을 알리러 아이들이 있는 놀이터로 향하는데 이쪽저쪽 모두 은은한 촛불을 켜놓았다. 마치 이 동네에선 이 시간에 이 정도 분위기는 누구나 연출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나 : "어, 이쪽에도 저쪽에도 집집마다 촛불을 켰네요. 우리도 켜야 할까요?"
옆집 아줌마 : "응, 이거? 모기 쫓으려고."
나 : "네? 모기요? 전 로맨틱한 분위기 내려고 켠 줄 알았어요."
옆집 아줌마 : "(순간 빵 터지시며 남편을 보며 하는 말) 로맨틱? 그게 뭔데? 개나 주라 그래. 푸하하하하."
여하튼 놀이터로 향하는 내 뒤통수에선 촛불을 켠 두 집, 튤립 나라 아줌마들이 빵 터져선 우활활활 웃으셨다. 그들도 그냥 그렇게 우리 사는 듯이 사는구나.
▲ 이 강둑을 걸어 피게라스 일요장에 놀러갔다. ⓒ 이성애
▲ 오후 1시까지 열리는 피게라스 일요장의 모습이다. 현지인보다 별장이나 캠핑장에 머무는 관광객이 더 많은 것 같다. ⓒ 이성애
○ 편집ㅣ박혜경 기자 |
덧붙이는 글
2012년 맞벌이 엄마, 아빠, 5살, 7살 두 딸은 직장과 유치원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쉼(태국), 사랑(터키), 도전(유럽캠핑)을 주제로 5개월간 여행하였습니다. 본 여행 에세이는 그 중 도전을 주제로 한 유럽캠핑에 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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