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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 떠난 지 14년... 남자와 돌아온 그 여자

[여행 책에 없는 유럽 종단기9] 지중해, 알프스, 수녀원, 오렌지

등록|2015.06.27 13:51 수정|2015.06.27 13:51
*전편에 이어 계속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는 로사 수녀님은 무려 30년을 여기 프랑스 생폴드방스 수녀원에서 생활해온 분이다. 그녀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이었다. 처음 건너왔을 무렵 배꽃 같았을 이방인 소녀는 이제 세월이 흐르고 묻어 수녀원을 책임지는 중후한 원장 수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 서 있는 그녀는 수녀원을 떠난 지 14년 만에 남자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남겨진 그녀는 길 떠난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

"비비아나(그녀의 세례명) 이게 얼마만이야!"

두 여인 틈에서 나는 멋쩍게 서 있었다. 이윽고 수녀님의 안내로 방문자들이 묵는다는 숙소로 걸어갔다. 둘은 앞서갔고, 나는 돌멩이가 콕콕 박혀 있는 돌길을 따라 캐리어를 덜커덩 끌며 뒤따랐다. 사방으로 오렌지 나무가 통통하게 솟아 있었고, 그 사이로 달빛이 노랗게 쏟아졌다.

수녀원에서 맞은 새해

밤이 어떻게 지나갔을까. 피로를 호소하던 나는 몸살을 앓았다. 허무하게 새해가 밝았다. 자그마한 마을의 수도원에서 소박한 자정 예식과 더불어 새해를 맞겠다는 계획은 날아가버렸다. 그녀는 새해 잔치를 겸한 자정 미사에 다녀왔단다. 그녀가 전하는 사진 속에는 거동도 불편해 보이는 연로한 수녀님이 평상복 차림의 할머니와 더불어 와인 잔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새해는 나 없이도, 나의 곁에서 훌쩍 찾아왔다.

▲ 프랑스 남동부 생폴드방스의 아침. 언덕 마을 뒤편의 지중해가 아침 햇살로 물들다. ⓒ 송주민


눈을 뜨자, 나무로 된 유리창 사이로 햇살 몇 줄기가 스며든다. 일어나서 창문을 연다. 나무 겉문을 열어젖히자, 끼이익, 덜커덕, 소리와 함께 어스름이 순식간에 흩어진다. 새해의 햇살이 환하게 내리비추는 순간이다. 광선을 타고 먼지 몇 톨이 여유로이 날아다닌다. 뒤를 돌아 방을 바라본다.

여기는 호텔이 아니다. 수녀원 한편에 있는 방문자들의 집. 어젯밤 수녀님들이 하얗게 정돈된 침대 시트와 베개 포를 건네주었고, 우리는 직접 침대와 베개에 씌웠다. 단출한 침대에 손때 묻은 민무늬의 책상과 의자, 세월이 묻어 정감있게 해어진 옷장, 구석에는 자그마한 세면대가 놓여 있다. 나그네에게 허락한 소박한 쉼터, 룸서비스도 청구서도 없는 곳, 고객이 되지 않는 이런 곳이 좋다.

오래된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테라스에 선다. 밖을 내다보자, 와, 탄성이 나온다. 여기는 어디일까. 마을과 산과 나무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키 작고 뭉글뭉글한 올리브 나무가 보이고, 그 옆에는 키가 크고 늘씬하게 하늘로 솟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서 있다.

▲ 프랑스 남동부 생폴드방스에서 맞은 아침 ⓒ 송주민


▲ 프랑스 남동부 생폴드방스에서 맞은 아침 ⓒ 송주민


그 자리로 쏟아지는 햇살, 저 머나먼 눈 쌓인 알프스까지 보이는 확 트인 전망, 찌르르르 새소리가 들리는 평온함, 이 아늑함……. 1급 호텔을 가더라도 이런 곳이 있을까. 지중해에서 떠오른 태양이 온통 대지를 따사로이 뒤덮고 있다. 새해 첫날, 익숙하던 한겨울 추위가 여기는 없다.

언덕 위에 지어진 수녀원, 평지가 아닌 곳이 오히려 축복이었을까. 주변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언덕 너머 지중해, 아침 태양에 물들어 눈이 부신 쪽빛 바닷가도 보인다. 주위로 산들이 솟아 있으나 아기자기 동산 같은 느낌이다. 우리나라의 덥수룩하고 우거진 산새와 다르다. 완만한 언덕에, 듬성듬성한 나무 사이로 귀여운 집들이 콕콕 박혀 있다. 장작을 태우는 하얀 연기가 미풍을 타고 하늘 위로 흩어진다. 그 위로 아침 햇살이 새하얗게 쏟아지고 있다.

하느님이 키워준다는 오렌지 잼의 맛

▲ 생폴드방스의 도미니코 수녀회 마당 곳곳에 있던 오렌지 나무들 ⓒ 송주민


시선을 가까이로 돌리자, 어제 밤 달빛 아래에서 보았던 오렌지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수녀원 마당 곳곳에 솟아 있다.

"나 여기 있을 때, 저 나무들에 물을 주는 일을 했었어."

눈이 동그래진 나를 보며,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말했다. 수녀원에 있던 3개월, 그녀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오렌지 나무에 물을 줬단다. 똑같아, 똑같아,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는 이야기를 그녀는 되풀이하고 있다.

오렌지들은 햇살을 받아 더욱 벌겋고 노랗게 반짝인다. 테라스 안쪽 바로 앞 식사 테이블에 놓인 아침식사에는 바게트 빵과 함께 오렌지 잼이 놓여 있다. 간단히 아침을 먹는다는 프랑스라더니, 바게트와 잼류, 음료 정도로 단출하게 차려져 있다.

"이 오렌지 잼이 저 마당에 있는 것들로 만든 것일까?"
"맞아. 하느님이 키워준 오렌지들이지."

신앙이 강한 사람들은 다 하느님이 해줬다고 하는 게 문제야. 그런 생각을 하며, 유자잼 보다 조금 더 진한 빛깔의 오렌지 잼을 바게트에 발라서 한입 먹어본다. 달달하고 새콤하다. 그리고 인공의 맛이 없다. 어느덧 로사 수녀님이 보인다.

"잼이 참 깊고 맛있네요."
"이거야 말로 비오(Bio, 불어 biologique 친환경 유기 재배 식품을 저렇게 줄여서 부르더라)지. 자기들이 알아서 햇살 받아 자란 것들이니 말이야."

농약도 비료도 없이 햇살과 바람과 살살 뿌려주는 물만으로 큰 오렌지란다. 한겨울에도 이렇게 화창한 날씨를 보니, 저절로 컸다는 게 이해가 가기도 한다. 스마트폰의 날씨앱에도 파리나 더 위쪽의 벨기에, 네덜란드 등지는 온통 흐리거나 비 표시의 연속인데(유럽의 우중충한 겨울 날씨를 연상케 하듯), 이곳은 이번 주 내내 해님 표시만 이어져있다. 여기는 날마다 화창한 날씨가 오만할 정도로 계속된다는 프로방스의 땅이다. 수녀님도 덧붙인다.

"우리가 뭘 얼마나 하겠어. 하느님이 알아서 키워주시는 거야."

사람은 흘러갔으나, 흔적은 그대로

▲ 생폴드방스의 도미니코 수녀회 입구 풍경 ⓒ 송주민


함께온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여기는 15년 전 제가 있을 때랑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아요. 저 오렌지 나무도 그렇고 여기서 내려다보는 풍경 하며, 이 날씨, 이 벽돌로 된 오래된 수녀원 건물들......"
"변할 게 뭐가 있겠어.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오면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더라고. 요즘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니까.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맞아주는 곳이 있으니 그렇다고 하더라고."
"하다못해 여기 수녀원 안에 테이블이며 컵들, 접시, 촛대, 바깥에 놓인 철제 의자, 저기 빨래가 널려 있는 빨래줄도 그대로예요. 수녀님들하고 끙끙대며 가지치기를 했던 저기 저 야자나무도 똑같네요. 조금 더 키는 자랐나?(웃음)"

순간, 무너진, 완전히 산산조각 난 나의 어릴 적 동네가 떠오른다. 뉴타운, 얼마 전 동생과 그 동네를 찾았을 때, 완전히 철거되고 언덕마저 깎여나간 채 고층 아파트만이 빼곡히 솟은 나의 어린 시절의 터를 보았을 때. 옛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상전벽해 되어버린 콘크리트 숲을 거닐었을 때, 우리 형제는 지금 딛고 서 있는 존재의 뿌리가 밑바닥부터 뽑혀버린 것처럼 허탈해했다. 헛헛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동네를 걸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피에르(Pierre, 베드로) 수녀님은 안 계시군요."
"응. 돌아가셨지."

그녀에게 불어를 가르쳐줬다는 하얗고 작은 할머니 수녀님, 베일을 쓴 연로한 프랑스 여인, 저 오렌지 나무에 물을 주는 것도 그 수녀님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아, 여기 거북이가 있었죠. 오렌지 나무 위쪽에 있는 텃밭에서 커다란 거북이가 돌아다녔는데, 제가 무서워서 머뭇거렸어요. 그러자 피에르 수녀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확 잡더니 옆으로 살짝 치워주시던 모습이 아른거려요. 놀라는 나를 보며 활짝 웃으시던 표정도..."

그녀는 회상에 잠긴 듯 말을 잇는다.

"침묵을 지켜야 하는 이곳인데, 저는 떼제(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떼제에 창설된 초교파 수도회) 노래를 부르며 흥얼흥얼 거리곤 했죠. 그럴 때마다 피에르 수녀님이 웃으면서 입에 손가락을 올리고 '쉿' 하던 표정도 떠올라요."

로사 수녀님도 누군가를 떠올리는 표정이다.

"그 수녀님, 아주 평화로운 표정으로 돌아가셨어."
"여기는 모든 게 그대로예요. 변한 게 있다면, 그 노수녀님이 이제 안 계시다는 거네요."

사람은 흘러갔으나 살아온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다. 수녀원 벽에 내려앉은 짙고 깊은 이끼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저 앞쪽으로 언덕 위에 솟은 돌로 이뤄진 마을, 저기는 뿌리가 있을까. 그래 가보자. '중세 마을'이라고 들었던, 수백 년을 이어져 왔을, 인공이되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는, 화석처럼 남아 있으나 현재의 삶도 이어져 있을 법한 옅은 살구빛의 석조 마을 속으로.

▲ 프랑스 남동부 생폴드방스 전경 ⓒ 송주민


*다음 편에 계속

○ 편집ㅣ박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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