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죽고 나서야 나온 판결, 이러니 버틸 방법이 없다

[서평] <노동여지도> 한국 노동현장의 역사와 현황 집대성

등록|2015.07.08 19:53 수정|2015.07.08 19:53
대학 시절, 한 선배와 동대문운동장을 지나던 길이었다. 선배는 동대문운동장에서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이름을 내게 가르쳐줬다. 무식한 대학생이었지만 그의 이름을 모르진 않았다. 아는 척을 했더니 선배는 다른 열사의 이름을 하나둘 덧붙이기 시작했다. 아는 이름보다 모르는 이름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그 당시 나는 그 이름들을 외우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지금도 노동현장에서는 많은 이가 죽고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사에 오르내리는 수많은 이름을 다 기억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게 머릿속에 파편화된 정보만 흩날리고 있을 무렵, 또 다른 이가 나타나 노동현장의 이름들을 불렀다.

▲ <노동여지도> 표지 ⓒ 알마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에서 노동현장을 지켜온 박점규씨는 책 <노동여지도>에서 전국의 노동활동가의 이름을 부른다. 삼성의 도시 수원부터 울산, 인천 등을 지나 서울 구로와 여의도, 파주까지 노동현장 35곳을 찾아다녔다.

그는 책 속에서 각 지역의 주요 노동운동사와 함께 주요 기업의 현재 비정규직 현황과 투쟁 상황을 설명한다. 각 지역마다 특색과 기업의 성질은 다르지만 노조와 노조조합원들이 탄압받는 상황은 똑같다.

사실 책을 처음 펼쳤을 때, 주요 도시와 이름을 되도록 머리에 새기며 읽으려 했지만 수많은 사례 모두를 기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의 실수를 똑같이 반복할 수는 없었다.

<노동여지도>를 읽으며 이번만큼은 주요 노동현장의 활동을 머리에 되새기려 노력했다. 엑셀 파일로 주요도시와 노동조합이 투쟁을 하게 된 이유, 성과를 정리하게 된 이유다(기사 하단 첨부파일 참고).

'노조 탈퇴하면 복직시켜줄게'... 공허한 약속

▲ 전주시내버스 신성여객 고 진기승 노동자 ⓒ


80여 사업장의 노동현장 상황을 정리하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전주 신성여객의 고 진기승씨의 죽음이었다. 2009년 신성여객에 입사해 민주노총 소속 노조에 가입한 그는 2012년 파업에 참가했다가 해고당했다.

부당해고가 확실한 상황이었음에도 사법부가 판결을 내리는 동안 그의 생계는 막막해졌다. 민주노총을 탈퇴하면 복직시켜주겠다는 사측의 말에 진기승씨는 회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약속은 말뿐이었다. 그는 복직되지 못했다.

그는 2014년 4월 30일 목숨을 끊었다. 법원은 5월 1일 부당해고 판결을 내놨다. 활자로 읽기만 해도 충격적이고 가슴이 아린 사연이었다. 수많은 기업이 부당해고임을 인지하면서도, 사법 처리가 더디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전횡을 부린다. 사법처리 전까지 노동자가 버틸 방법은 요원하다.

또한 순천 지도에서 소개된 포스코의 사례에서 포스코가 올해 초 국가보안시설이라는 이유로 직원들의 스마트폰에 깔게 한 '포스코 소프트맨' 앱도 충격 그 자체였다. 책에 따르면 정규직은 물론이고 비정규직 모두 이 앱을 깔아야 했는데, 이 앱을 깔면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의 내용까지 사측이 모두 볼 수 있다고 한다. 아무리 노동자를 기업의 부속품으로 여긴다고 해도, 애인도 마음대로 볼 수 없게 하는 카카오톡을 회사가 모두 본다니 소름이 끼쳤다.

책 속 부록처럼 끼워져 있는 '각 지역 주요 기업의 비정규직 현황'은 한눈에 각 지역의 비정규직 비율을 알 수 있는 시각자료다. 이 자료에 따르면 기업 내 비정규직이 가장 높은 사업장은 인천국제공항공사인데, 85.9%가 비정규직이다. 이어 맥도날드(80.9%), 롯데리아(77.3%), 희성전자(78%)와 현대삼호중공업(71.5%)이 비정규직 비율 70%가 넘는 기업으로 소개돼 있다.

▲ <노동여지도>에 수록된 '각 지역 주요 기업의 비정규직 현황'. ⓒ 알마


문제는 이러한 높은 비정규직 비율이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운송수단 서비스 기업이나 의료 기업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인천공항(85.9%), 제주항공(52.2%)이 대표적이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경협 의원이 2014년 5월 8일에 선원 등 국민 생명과 안전에 밀접한 업무에 대해선 계약직 노동자 채용을 금지하는 기간제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성과가 없다.

가슴 아픈 사연이 더 많지만 희망의 사연도 적지 않다. 군포 현대케피코는 연구원부터 운전기사 모두가 정규직인 사업장이다. 노조의 25년 투쟁의 결과다. 아산의 삼성디스플레이 사업장도 식당과 경비직을 제외한 모두가 정규직이다. 2000년 5명의 노조 조합원들이 만든 성과다.

사장이 노조를 인정해 좋은 사업장을 함께 꾸려가는 모범 사례도 있다. 파주의 경기도의료원 파주병원의 김현승 원장은 노조와 함께 임금을 동결하며 적자였던 병원을 흑자로 만들고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바꾸는 과정에 서 있다.

한 권에 담긴 '노동의 오늘', 단 아쉬운 점은...

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도를 비판한 글의 첫 화면.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도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논란거리다. 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도를 비판한 글은 http://blog.jinbo.net/stego/608에서 볼 수 있다. ⓒ 정민경


<노동여지도>는 파편화된 노동현장의 정보를 집대성하고 다양한 통계와 사법부의 판결까지 정리해놨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책 속에 소개된 좋은 사례 중 마냥 좋게만 볼 수 없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장 '파주 - 책의 도시가 품은 명암'에 소개된 보리출판사의 상황이 바로 그것. 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에 대해 긍정적인 노동자의 입장만을 전했다. 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는 현재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가 경향신문에 소개되는 과정(관련기사: '하루 6시간 노동제' 보리출판사의 실험)에서 페이스북 댓글에 보리출판사에 대한 비판이 올라오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 과정에서 2013년 진보넷에 올라온 "보리출판사 6시간제 - 노동자가 주인이 되지 못한 정책의 한계"(관련 글 보기)라는 글이 회자됐다.

이 글의 게시자는 "윤구병 사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보리출판사 6시간제도가 1년 동안 모든 직원이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준비했다고 이야기한다, 거짓말이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그 외의 많은 과정에서 윤구병 사장이 노동자와의 합의보다 통보를 한 적이 많았고 6시간 노동제를 협박의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전했다. 논란이 되는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설명한 책의 말미는 이 책의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덧붙이는 글 <노동여지도>에 나오는 노동 현장 상황을 엑셀파일로 정리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하단 첨부파일을 참고하세요.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