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그리스에 '모욕감'을 줬어
[기획-사회혁신 키워드②] 존엄이 최고의 사회혁신 키워드가 된 까닭
사단법인 '사회혁신 공간 데어(there)'는 동그라미재단 지원을 받아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5월까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상징하는 '사회혁신 키워드 100'을 선정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380여 명이 열린 토론에 참여하는 '사회실험실(오픈랩)' 방식으로 찾은 100여 개 키워드 가운데 일부를 5차례에 걸쳐 <오마이뉴스>에 소개합니다. 이번 키워드는 복지 정책의 새로운 기준이 될 '자존과 존엄' 입니다. [편집자말]
▲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당수이자 야당 지도자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지난 1월 25일 그리스 총선 승리 후 지지자들 앞에서 환영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EPA
지난 6월 27일 오전 1시(현지 시각), 6월 30일 만기가 돌아오는 16억 유로의 국제통화기금 부채상환 연장을 두고 이른바 트로이카(유럽연합, 유럽 중앙은행, 그리고 국제통화기금)가 그리스를 벼랑 끝까지 압박할 때였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국민투표 요구하며 꺼낸 '존엄'
"트로이카의 제안서는 유럽의 사회적 기본 권리들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노동, 평등,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 제안의 목표는 협상 당사자 전체 모두에게 실행가능하고 호혜적인 동의가 아니라, 단지 그리스 전체에 대한 모욕일 뿐입니다. (중략) 제가 굳게 확신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국민들의 선택이야말로 그리스 역사의 명예를 지키고 인간 존엄성의 메시지를 전 세계인들에게 전달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그의 연설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리스 주권과 그리스인의 존엄성을 위해!"
여기서 그리스 채무불이행 사태의 전말이나 국민투표 제안의 정치적 타당성 등은 논외로 하자. 관심이 있는 것은 치프라스 연설문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존엄(dignity)과 수치심, 모욕 등의 키워드다.
동일한 키워드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그리스와 함께 경제위기로 심각한 타격을 받으면서 살인적 긴축의 고통을 겪고 있는 스페인이 그곳이다. 지난 3월 22일 마드리드 광장에 운집한 군중들이 내세웠던 구호가 바로 '빵, 일자리, 주거, 존엄'이었다.
요즘 그리스와 스페인의 시민이나 정치가들을 막론하고 유럽연합과 IMF 등의 긴축 강요에 저항하는 운동에서 거의 예외 없이 '존엄'이라는 키워드가 거리를 행진하는 시위대의 플래카드에, 시민들의 절규 속에, 그리고 정치인들의 연설문 속에서 발견되고 있다.
도대체 왜인가? 그들이 '자존' 또는 '존엄'을 호명하며 말하고 싶어 하는 진정한 내용이 무엇인가? 단순히 그럴듯한 수식어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시대를 표현하는 무거운 시민들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일까?
'존엄'이 최고의 사회혁신 키워드가 된 이유
▲ 30일 오후 6시 서울시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에서 오픈테이블 전야제인 '사회혁신 키워드 100'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날 '내 삶을 더 나아지게 할 한 가지 키워드'로 16강 토너먼트를 거쳐 '존엄'을 선정했다. ⓒ 김시연
이제 우리나라로 돌아와 보자. 지난 6월 30일 사단법인 '사회혁신공간 데어'가 주관하는 '가장 공감이 가는 사회혁신 키워드 선정하기'에서 '공유자산'과 '게으름'을 비롯해 '커뮤니티 기반 시장', '작은 학교', '제3의 소유권', '존엄', '누구나 코딩', '주민권' 등 8개의 키워드가 나왔는데, 그 가운데 최고의 키워드로 선정된 것도 '존엄'이었다(관련기사: 70층짜리 반값 아파트도 '존엄'을 이길 순 없었다).
그리고 이에 앞서 380여 명이 열린 토론에 참여하는 '사회실험실(오픈랩)'에서도 가장 많이 나왔던 키워드가 사실 '자존과 존엄'이었다. 얘기되었던 사례를 몇 개만 들어보자.
"…장학금 신청해본 이들은 알 거다. 내가 얼마나 못 사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과정이다. 대부분의 지원 사업에선 내가 얼마나 힘든지를 증명해야 한다. (중략) 사회적 약자 또는 박탈된 권리로서 인지되는 주장이 아니라 국가·지자체의 선의, 중간지원관의 선의를 갈구해야 하는 요청이 된다. (중략) 계단 꼭대기에는 '장학금'이 있고, 장학금을 쟁취하기 위해선 자기 불안을 드러내야만 하는 구조. 개인이 함몰되는 삶이 아닌, 더 이상 과격하지 않아도 되는…. 존엄하게 사는 것, 이게 내 권리일 것이다."
"도시는 존엄을 지키는 공간이어야 한다. 요양병원 옆에 장례식장이 있는 모습을 보라. 건축 허가를 내고, 건물 짓고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이 사회적 통념에 마음이 무겁다. 공공건축물 등 장애인 화장실이 만들어졌지만 실제 잘 사용되지 않는다. 대부분 장애인들이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데 화장실 설계 기준은 수동휠체어에 맞춰져 (회전할 수 없어) 전동휠체어가 들어가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는 자들을 위한, 살 만한 곳이 되어야 한다."
▲ 사회혁신 중심 키워드 지도 속의 '자존'과 연관 개념들 ⓒ 사회혁신 공간 데어
그렇다면 도대체 자존감과 존엄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어떤 경우에 자존과 존엄을 요구할까? '정의론' 저자로 유명한 존 롤스는 자존감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자존감(self-respect)을 두 가지 측면을 갖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인간이 갖는 자기 자신의 가치관, 자신의 선에 대한 자신의 관점 및 자신의 인생 계획이 실현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데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 등을 포함한다. 그리고 둘째로 자존감은 자신의 의도를 성취하는 것이 자신의 힘에 닿는 것인 한에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내포한다."
그는 자존감을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 소득 등과 함께 모든 시민에 제공되어아 할 기본재라고 적시한다. 롤스의 정의론을 역량이론으로 더 발전시킨 노벨 경제학 수상자 아마티아 센은 자존, 혹은 존엄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여러 사례 - 계급, 카스트, 인종차별, (불평등한) 사회적 기회, 경제적 자원배분과 관련된 - 역시 보다 명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발전은 1인당 국민총생산의 성장뿐 아니라, 인간 자유와 존엄성의 확대까지도 의미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사례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까닭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지 않고, 동시에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저지르는 것에 있습니다."(<센코노믹스>, 갈라파고스 출판사)
사실 우리의 현실을 둘러보면 앞서 인용한 사례 이상으로 사회 활동의 도처에서 자존과 존엄이 무시되고 위협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입시지옥에서 허덕이는 청소년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자존감'이며, 스펙 경쟁과 취업 경쟁에 몰입한 청년들은 끊임없이 '존재감'에 대한 질문을 강요받고 있다. 이른바 '잉여사회'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청년들이 사회적 잉여로서 취급받는 현실이 이를 입증한다.
30, 40대 우리 사회의 허리를 담당하는 세대들의 경우, 불안정한 경제적 사회적 지위로 인해 일상 활동에서 각종 모멸감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은퇴 후의 노년은 불안정한 노후 여건 속에서 존엄하게 생을 마무리할지 확신하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전 세대에 걸쳐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중심 척도인 존재감, 자존감, 존엄은 일상의 도처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괜히 개인들과 시민들이 자존과 존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존과 존엄'이 최고의 키워드로 지명된 이유도 여기에 있고 긴축으로 고생하는 유럽의 시민들이 다시 존엄하게 살 권리를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못 사는 걸 증명하라? 이제 '존엄이 있는 복지'를 말할 때
사실 자존과 존엄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과 정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가치의 사회적 확인 과정이며 따라서 사회적 정의의 문제로 연결된다. 이것은 자존과 존엄이 우리 사회의 노동과 복지, 교육 등 주요 경제 사회정책을 펼 때 매우 강력한 준거 틀이 될 것임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품위 있는 사회에서는 복지가 인간성에 대한 모욕의 회피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설계되어야 한다"고 한 일본 사회학자 사이토 준이치의 제언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즉, 사회적인 문제의 해결에서 단지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줄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의 존엄과 정신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복지정책이 짜여야 한다는 것이다. 장은주 교수는 그의 저서 <생존에서 존엄으로>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는 복지를 단순히 물질적 재화 그 자체의 평등한 분배문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복지 문제는 다름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존중을 누리며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의 사회적 보장과 관련된 문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차기 버전의 복지정책 방향은 '자존과 존엄이 있는 복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의 복지 시스템은 시민들을 동정이나 자비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모든 요소들을 없애 시민들이 복지를 누리면서 수치심과 모욕감을 갖게 하지 말아야 한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
덧붙이는 글
김병권 시민기자는 '사회혁신공간 데어'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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