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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세권 된다고 좋아했는데, 그게 독약이었어"

[포토에세이] 4호선 종착역 당고개역

등록|2015.07.23 15:29 수정|2015.07.23 15:29

상계동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사에서 내려다 본 상계동(덕릉로 119가길), 아파트촌 사이로 낡은 주택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다. ⓒ 김민수


지하철 4호선 종착역인 당고개역이 있는 상계동은 서울의 끝자락이다. 서울의 끝자락일 뿐만 아니라 달동네의 상징이었으나, 재개발로 이전 달동네의 모습은 많이 사라진 상황이다.

'당고개'라는 이름만 듣고는 '당집이 제법 많은 동네'일 것이라고 상상을 했다. 당고개역사에서 내려다본 상계동엔 제법 '당'으로 추정될 수 있는 깃발들이 많긴 했지만, 나의 상상과는 별개의 사안이다.

당고개는 본래 '당현'이라 불렸는데 고개를 넘나드는 이들이 일정한 장소에 돌멩이를 하나 둘 쌓아 기도를 올리는 성황당으로 변해서 '당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상계동개발이 된 곳과 재개발지구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재개발지구에 사는 이들의 나라사랑도 다르지 않다. 제헌절을 맞이하여 게양한 태극기가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 김민수


당고개역에서 바라본 상계동 일대는 재개발의 광풍이 한 차례 지나간 듯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재개발의 광풍 속에서 소외된 곳(덕릉로119가길 부근)이 눈에 들어왔다. 역주변의 번잡스러움은 이내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사라졌고, 나는 1970년대 초반 달동네에 들어와있는 느낌을 받았다.

서울 하늘에 이런 곳이 몇 곳이나 더 남은 것일까?

상계동면장갑을 잔뜻 실은 오토바이 한 대가 골목길을 지나고 있다. 면장갑은 노동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곳의 삶의 정황이 그리 만만치 않음을 본다. ⓒ 김민수


대형 상가건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골목길 풍경은 걷는 이에게는 속내를 더 숨기지 못하고 드러냈다. 내가 알고 있는 상계동에 대한 이야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상계동 일대를 재개발하며 철거민들과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 이후, 그럭저럭 개발이 되었을 것이고, 지하철역까지 들어선 마당에 그래도 어느 정도의 환경이 조성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만난 그곳은 쇠락해서 더는 사람들이 살아가기 버거운 재개발지구의 끝자락을 보는 것만 같았다.

상계동잔뜩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골목길을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좁은 골목길들은 끊어질듯 이어져 있고, 큰 건물에 가려버린 재개발지구는 위태위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터전이다. ⓒ 김민수


좁은 골목길과 막다른 길, 동네 이름을 착각하게 만들 만한 수많은 당집들과 사찰 표시, 사람들이 떠나버린 집,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고 외쳐야할 것 같은 골목길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네 개발은 참으로 문제가 많다. 싹 밀어버리고 성냥갑 같은 아파트를 짓는 것이 능사요,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던 이들이 그곳에 정착할 수 없게 하는 개발 외에는 없다. 그래서 결국 약삭빠른 복부인들이나 투기꾼들의 주머니와 개발업자들의 주머니만 채운다. 그곳을 지켜온 이들과 살아가야 할 이들은 그보다 더 외지로 나가거나 개발이 되기까지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버텨야 하는 것이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정기섭(82세)씨는 이곳에서 50년 이상 살아오면서 가게를 운영했고, 통장일도 10년을 맡아 일했다. 동네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다. ⓒ 김민수


골목 초입에 간판도 없는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곳은 50년째 이 동네에서 살고 있는 정기섭(82) 어르신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 때(1965년 즈음)에는 집들이 드문드문 있었으며, 남양주군 별내면에 속했다고 한다. 그러다 서울시로 편입이 되었고, 정부의 철거민 정책에 따라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던 청계천 복개사업이 진행되면서 철거민들이 대거 유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동 일대가 개발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팔고 떠났고, 그 와중에 복부인과 투기꾼들만 한몫을 잡았다고 했다. 대부분 가난했던 이들은 아파트를 줘도 관리비조차도 버거워서 아예 아파트에 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냥 당장에 몇 푼 챙겼다 생각하고 미련없이 떠났다는 것이다.

동네가게가게에는 소주와 담배를 제외하곤 물건이 거의 없었다. 당고개역이 들어오면서 상계동 일대가 개발되면서 골목상권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 김민수


한동안 철거민들의 유입으로 마을이 북적거릴 때에는 제법 장사할 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근의 개발과 당고개역이 생긴 이후, 손님이 뚝 끊어졌단다.

"당고개역이 생긴다고 좋아했었지. 그런데 그게 없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독약같은 것이었어. 완전히 망했지. 가게에 물건이 거의 없지? 소주하고 담배만 있는데, 장사가 하도 안되니까 그저 동네 사람들 마실 와서 소주나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지. 재개발을 할 거면 언제까지 할 거다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말이 없어. 그냥 기약없이 기다리는거지. 그렇다고 지금 환경이 사람 살 만한 환경도 아니고....."

정기섭(82세)씨의 손, 오른손 엄지는 어릴적 작두에 잘려나갔다고 한다. 82세의 고령임에도 손아귀의 힘과 팔근육은 단단했다. ⓒ 김민수


어르신의 손은 단단했다.

엄지손가락은 어릴적 농사일을 돕다가 작두에 잃었단다. 아들 넷을 낳아 다들 분가시켰는데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다고들 한다며 한숨을 쉰다. 두 살 어린 아내는 시력이 좋지 않아 겨우겨우 노인정에 오갈 정도니, 이 가게라도 있어서 그나마 입에 풀칠을 하고 사는 것이라고 체념하는 듯 말하면서도 밝게 웃는다.

마을주민신원만(64세)씨가 할아버지와 함게 나눌 점심을 가지고 가게에 방문했다. 그는 중계동에 살다 이곳으로 이주한지 15년이 되어간다고 했다. ⓒ 김민수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동네에 사는 지인 분이 그릇과 냄비에 뭔가를 들고 가게로 들어왔다. 나중에 골목을 한 바퀴 돌고 오니 두 분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신원만(64)씨는 이곳에 정착한 지 15년째라고 했다.

"중계동에 살다가 15년 전에 이곳으로 왔어요. 내가 좀 약았으면 보상이라도 받았을 텐데, 그냥 이사를 왔어요. 오늘도 슬레이트 사다가 지붕 땜빵하고 왔어요. 옛날 집인데다가 벽돌도 손으로 직접 만들어서 지었기 때문에 주먹으로 벽을 치면 무너질 정도예요. 그런데 재개발을 추진하기는 하는데 확답은 없고, 막연하니까 마음고생은 고생대로 하지요. 집에 문제가 생기면 땜빵식으로 수리하면서 그냥 사는 거죠."

연탄가게연탄가에게 걸려있는 목장갑, 한 여름이라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그나마 연료비라도 아낄 수 있는 여름이 겨울보다는 한결 낫다고 한다. ⓒ 김민수


골목길을 돌다 굳게 문이 잠긴 연탄집을 만났다.

여름철이니 연탄을 쓸 일이 없을 터이니, 그래도 월동준비를 할 때까지는 한가할 것이다. 그나마 서민들에게는 연탄값이라도 아낄 수 있는 여름이 더 살 만한 것이기는 할까? 좁은 골목길과 방수도 제대로 안 되는 집에서, 지열과 폭염에 찜통일 방에서 지내는 일은 어쩌면 더 고되지 않을까?

가난한 분들에게는 가을이 가장 좋은 계절일 터이다.

자연이 주는 시원함에 이런저런 먹을거리도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니 '한가위만 같아라'하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동네전경골목길 사이로 너머의 아파트단지가 보인다. 골목길에 놓인 거울에 비친 마을 전경을 담아보았다. ⓒ 김민수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 길에 정기섭 어르신의 가게를 들여다보며 인사를 하니 식사를 하다말고 "식사 하고 가시지?" 하신다. 진정성을 담은 말이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밥을 당신은 먹지 못할지도' 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듯하다.

한낮이 아니었더라면 소주라고 한 잔 팔아주고, 소주라도 한 잔 나눴어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필자의 주량이 너무 약하다. 길 한켠에 제법 큰 유리 거울이 벽에 걸려 있다. 거울에 비친 골목길과 아파트... 과연, 이게 우리의 진짜 현실이란 말인가?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 편집ㅣ박혜경 기자

덧붙이는 글 지하철 종착역에는 어떤 동네,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이런 테마작업의 일환으로 7월 17일, 4호선 종착역인 당고개역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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