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교사의 인권? 학생 앞에서 그런 건 없다"

[10만인리포트] '교사 40년' 전성은이 말한다④-교사론

등록|2015.07.26 16:16 수정|2015.07.27 14:34

▲ 거창고등학교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특강을 듣고 있다. 함석헌 선생, 김찬국 목사, 정지영 감독 등 '존경할만한' 사회 인사를 모셔서 강의를 듣는 게 이 학교의 오랜 전통이다. 특강 중에 강당 벽에 서서 듣는 학생들이 보이는데, 이 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엿보인다. ⓒ 박형숙


'사제동행'이라는 말이 거창고에선 죽은 말이 아니었다.
"학생들 앞에서 교사의 인권은 없다"는 말과,
"아이들이 교사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말이,
공존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현재 거창고 전교생 360여 명 중 90% 이상이 기숙사 생활을 한다. 기숙사는 아이들의 인성이 자라는 교실의 연장이다. 그래서 이름도 생활관이다. 

"도시 아이들이 적응을 어려워한다. 김치도 못 먹고 청소도 할 줄 모르고 텃밭에서 삽자루도 처음 쥐어본 아이들이다. 처음엔 양말이라도 없어지면 훔쳐갔다고 울고불고 교사에게 이르고 난리를 치지만 '형제끼리는 동생이 언니 예쁜 옷 먼저 꺼내 입고 그러지 않냐'라는 식으로 서로 적응해간다. 내 아들도 이 학교 졸업생인데 사택을 코앞에 두고도 입학 한 달만에 기숙사를 선택했다."

학교도 과거엔 24시간 개방이었다(2000년대 들어 캡스 설치가 전국 학교에 일반화되면서, 그 전통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자취생이나 집에 공부방이 없는 학생들이 언제든지 들어와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그렇게 학생들이 학교에 사니, 교사들도 학교를 벗어나기 어렵다. 밤에도 교사들이 학교에 나와 있다. 교사들의 집도 대부분 학교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토요일·일요일에도 아이들이 학교에 있으니 학교에 나오는 교사들이 있다. 강제가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다.

"학생들이 있는 곳에 교사가 있어야 한다. 교사들의 초과근무수당이 없었을 시절부터 교사들은 야간·휴일 근무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학교에서 버티질 못했다. 교사들에겐 학생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법정 시간보다 수업을 더 많이 한다. 다른 학교에 비해 3~4시간 많다. 교감, 교장도 수업했다. 그런 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거창고를 만들었다."

학생들 앞에서 교사의 인권은 없다

'가정방문'의 전통도 아직 살아 있다. 거창고등학교의 경우 도시 입학생들이 많아지면서 '학부모 면담'으로 바뀌었지만 같은 재단의 샛별초등학교와 샛별중학교는 지금도 해마다 거르지 않고 가정방문이 이뤄진다. 몇 날 몇 시가 좋은지 사전에 약속을 잡고 "차 외에는 내놓지 마라"는 주의사항이 담긴 가정통신문이 미리 각 가정으로 배달된다. 

"사는 형편을 보게 되니, 가정방문이 끝난 뒤에는 아이들이 다시 보인다. 조부모 밑에서 공부하는 아이, 장애를 지닌 부모, 살림살이, 경제 형편…, 그런 게 다 보이니 학교에 나오는 것만도 다행이다 싶어 고마운 것이다."

가정방문이 모두 끝나면 가정방문협의회를 열어 교사들이 밤늦도록 회의를 한다. 아이들 상황을 다른 교사와도 공유한다. 담임만 알아서는 학생을 제대로 보호하고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학생들의 이름을 다 알고 집안 형편까지 꿰고 있는 이유는 그래서다. 상반기에는 가정방문이나 면담을 통해 주로 학생 편의 얘기를 들었다면, 하반기에는 상담을 통해 학교 측 얘기가 전달된다. 이때 교사는 적극적으로 아이의 상황에 개입한다. "교사가 아이들 문제 속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아이를 책임질 수 없다"는 신념이 깔렸다.
  

▲ 책상을 복도로 옮겨 '자율 학습' 중인 거창고등학교 학생들. ⓒ 박형숙

교사는 결국 수업이다. 수업은 전적으로 교사에게 맡겨진다. 교장이나 교감은 교과 수업에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이러한 학교의 믿음에 교사는 최선을 다한 가르침으로 답한다. 똑같은 50분 수업인데도 이 학교의 수업 강도와 질이 높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거창고에서 종교 수업을 담당했던 한 교사의 말이다.

"종교는 강을 건너기 위한 수단이다.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가르쳤다. 인간이 신이 되어선 안 되지만 동물이 되어서도 안 된다.

비틀거리는 인간에게 종교는 지팡이다. 또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럼 비기독교인은 다 지옥 가란 말이냐. 학생 중에 기독교도가 있는데 통성기도 하지 말라고 했다. 여기는 학교지 교회가 아니지 않나."

밖에선 '이단이냐'는 비난이 들렸지만, 이 교사는 한 번도 교장(전성은)으로부터 제지를 받아본 적 없다고 한다. 반면, "교사가 수업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경우엔 단호하다. 

"내가 교장으로 있을 때였다. 바둑을 잘 두는 수학 교사였다. 새벽에 집에 귀가할 정도로 바둑에 취미가 있는 분이었는데, 그 선생이 맡은 반의 수학 성적이 떨어지는 걸 확인했다. 교장실에 불러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사표 내라. 교육청에 날 고소해도 좋다.' 이 선생도 인정하고 울면서 사과하더라. '너무 빠져서 본업을 놓치지 말라'고 충고하고 마무리됐다. 그 교사가 이번 학기 가을에 교장에 취임한다.(웃음)

어린이가 왕이다. 아이들이 교사들의 밥벌이 대상이 아니다. 교사의 인권은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지켜지는 것이지 학생 앞에서 교사의 인권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학교 교육에 있어 학부모의 역할에 대해서도 선을 긋는다. '교육전문가 = 교사'라는 인식이 확고하다.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는다고 치자. 산과 의사가 아이를 받아야지 안과 의사가 받는 게 말이 되나. 보호자가 처방하고 수술하고 의사 역할을 대신할 순 없는 거 아닌가. 다만, '증상'에 대해선 말할 수 있다. 교사가 아이를 잘 가르치도록 돕기 위해서다."

자기 선생이 최고인 줄 아는 아이들

직업 선택의 10가지 기준
현재 거창고의 강당 뒤편에는 오래된 액자 하나가 걸려 있다. <직업 선택의 십계>. 전영창 교장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철학을 전성은 선생과 동료 교사 도재원이 정리한 것이다. 거창고 졸업생, 재학생 사이에선 '거고 십계'로 통한다.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이라는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하나,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셋,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넷, 모든 조건이 갖춰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열,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거창고의 교사-학생 간 신뢰의 수준은 상당하다. 교사들의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영어 교사가 내는 시험문제, 수학 교사가 내는 시험문제를 의심하거나 출제자 교체를 요구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전국에서 자기 선생들이 최고인 줄 아는 아이들. 월급 많이 주는 직장에 갈 수 있는 실력의 교사들이 거창고에 왔다는 걸 아이들도 안다.

현재 거창고 교장인 박치용 선생은 거창고 출신. 카이스트에 입학했다가 모교에 수학 선생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대학졸업을 접고 다시 지방대 수학과에 편입해 교사자격증을 땄다. 모교의 교사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이런 교사들이 꽤 많다. 거창고등학교 25명 교사 중 절반 이상이 모교 출신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생활도 없고, 학생과 교사의 경계가 허물어진 교육 현장을 감당해낼 사람이 어디 흔하겠나.

거창고의 교사 채용은 '교사 모집 작전'이라고 불릴 만큼 그 역사가 치열하다. 1960, 1970년대에도 세칭 유명 신문사에 광고를 냈고, 경남 거창까지 면접 보러올 사람이 없으니 서울로 교장이 올라가 교회를 빌려, 때로는 다방이나 때로는 여관방을 빌려 면접장을 대신하곤 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부임 인사를 하고 근무를 하는 교사 중에, 2~3일 뒤에 간다 온다 말도 없이 사라지는 교사도 있고, 부임 인사조차 안 하고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실력 있는 교사를 박봉의 이 시골학교에 모시기란, 여간해선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거창고가 '명문학교'라는 이름을 얻은 뒤에도 교사 수급은 여전히 쉽지 않다. 지식 전달에 있어 최고여야 하는 것은 물론, 인격까지 갖춰야 하니 당연하겠다 싶다. 인격을 어떻게 따지나 물으니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손해 보는 길을 가는 사람인가를 본다."

이 대목에서 '전영창'(1917∼1976)이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 폐교 위기의 학교를 인수해 오늘날의 거창고를 있게 한 장본인. 거창고의 3대 교장이지만 사실상 창업자로 통한다. 교사들이 하나같이 "그분의 열매를 따 먹고 있다"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전영창은 국내 최초 미국 유학생이다. 국내로 돌아올 당시, 대학의 부학장직이 예정돼 있었으나 이를 마다하고 '벽지 교육'의 뜻을 세워 1956년 거창고를 빚을 떠안고 인수했다. 취임식에 참석한 학생은 8명. 자진해서 월급을 반으로 줄이겠다는 교사들과 함께 대한민국 전인교육의 기틀을 마련해 가기 시작했다.   

전성은의 아버지가 바로 전영창이다. 전 선생이 평생 교직에 있으면서 떠나지 않았던 아버지와의 일화를 소개했다. 1976년 봄, 예술제가 한창이던 때다. 역사 이래 학생 수가 제일 많았던(780명) 절정의 거창고. 학생들이 뒤엉켜 시합하랴 응원하랴, 운동장을 꽉 채운 열기와 함성을 바라보던 노(老) 교장(전영창)은 옆에서 같이 앉아 구경하던 아들(전성은)의 손을 꼭 쥐며 불쑥 이런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 교육은 실패했어."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세요?"
"OO도 돌아오지 않았지, □□도 돌아오지 않았지, △△와 ▲▲는 왔다가 가버렸지…."

교육은 길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다

전영창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서, 제일 인기 많은 학과를 나온 졸업생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떠나버렸지…"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한 달 뒤, 전영창은 숨을 거뒀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 '한 말씀'이 40년 동안 교육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전성은은 고백한다.

"아버지가 실패했다고 말한 교육은, 자기와 같은 길을 가리라 기대했던 졸업생들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함께 걷지 않았음을 뜻하는 게 분명했다. … 하지만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나이(60세)가 되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제자들에 대한 실망이나 서운함이 아니라, 그것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탄하는 말이었다. … 교육은 타인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다, 타인의 인격을 변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평생을 타인과 제자들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는 독백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버지의 '실패'에서 비롯된 전성은의 교육론은 이렇게 정리된다.

"교육은 길 감이다.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길 보여줌이다. 길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길을 가면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올지 말지는 상대방이 선택할 몫이다. 남의 인생을 내가 결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내가 결정지어 주려고 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의 전수다. 이데올로기는 아무리 좋은 가치를 지향한다고 해도 사람을 죽인다."(<교육은 왜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 중에서)

▲ 폐교 위기의 학교를 인수해 오늘날 '거고'의 명성을 있게 한 전영창(사진 속 동상) 전 교장(2대)은 전성은 선생의 아버지다. ⓒ 박형숙


차례
① 여는 글- "학생이 왕이다, 학교를 탈출하라"
② 자녀교육 즉문즉설- 배웠다는 부모의 주특기 '무언의 압력'
③ 시골학교 이야기- "우린 안 하는 걸 잘한다", 놀면서 성공한 학교
④ 교사론- "교사의 인권? 학생 앞에서 그런 건 없다"
⑤ 해법- "해방 후 지금까지 교육 정책은 없었다"
⑥ 닫는 글- "왜 대안학교의 길은 아니었을까?"


○ 편집ㅣ김지현 기자


.image.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