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유시장에서 만난 '살아지는 삶'
[2015 반빈곤권리장전] 길 위의 삶, 노점상을 만나다③
<2015반빈곤권리장전>(아래 '권리장전')은 2015년 6월 29일부터 7월 10일까지 약 2주간 서울·경기 곳곳에서 벌어지는 도시빈민에 대한 탄압 양상에 대해 조사하고, 도시빈민의 권리목록을 작성해 발표하고자 모인 실천단입니다.
'권리장전'에는 130여 명의 대학생들이 참가하여 가든파이브, 철거민(돈의문, 서소문, 염리동), 노점상(DDP, 삼양동, 수유시장, 미아삼거리), 임차상인(만복, 보용만두, 신신원 등), 쪽방 주민(동자동), 홈리스(서울역, 홈리스행동)들을 만나 개별 면접조사 및 간담회 등을 통해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 기사는 조사에 참가한 대학생들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보고, 느끼고, 들은 바들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연속 르포 형태로 기고될 예정입니다. 각 지역에 대한 조사보고서 및 종합보고서는 빈곤사회연대 누리집 문서 자료실에 업로드돼 있습니다. '길 위의 삶, 노점상을 만나다'는 면접조사를 통해 들어본 노점상들의 목소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 기자 말
- 다음의 문장이 맞으면 O, 틀리면 X를 표시해 주세요.
① 노점상은 소득세를 내지 않기 때문에 사라져야 한다.
② 허가받지 않은 노점상을 강제 철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③ 노점상은 도시빈민이다.
④ 전국노점상총연합은 자릿세를 받는 깡패집단이다.
-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위의 문장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래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철거하는 건 좀…."
"노점상들은 가난하지 않아. 너희들이 모르는 거지. 너네는 진실을 몰라. 벤츠 끌고 노점상하러 다닌다니깐."
"노점은 세금을 안 내잖아. 이 주위 상가들은 미쳤다고 세금 내냐."
"불법이면 어쨌든 안 되죠. 합법이 되면 또 모를까."
지난 6월 30일, 대학생들이 진행한 앙케이트 조사에서 시민들은 공통적으로 위와 같은 답변을 내놨다. 약 120명의 시민의 답변이 네 가지로 유형화된 것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이런 시민들의 반응은 전날 노점상을 만나고 온 대학생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도시빈곤의 현장을 직접 만나고, 빈곤을 만들어내는 사회에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 우리가 거리로 처음 나왔을 때, 기대한 것은 비참하고 남루하고 더럽고 불행한 이미지의 도시 사람들이었다. 더불어 우리는 앞서 시민들의 대답과 같이,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노점상들을 만나면서 우리의 생각은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가 만난 수유시장의 노점상들은 강북구청 앞에서 만난 시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안타까운 사연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불쌍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벤츠를 끄는' 기업형 노점상들 같은 부자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대 '이상'의 환경을 보았기에,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빈민'이란 누구인지, 진정한 '빈곤'이란 무엇인지 물음이 생겼다. 우리가 만난 노점상들은 과연 빈곤한 사람들일까?
야채 이모 이야기
첫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리가 만난 노점상 중 한 분이었던 야채 이모다. 야채 이모의 가게는 수유시장으로 들어가는 골목 모퉁이 길가에 있었고, 우리는 노점 옆 작은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이모와 대화를 시작했다. 뭐든 물어보라는 이모의 환대에 마음을 놓았던 탓일까, 5분도 안 돼서 이모는 "어…, 그게…, 뭐 파출부도 잠깐 하고…"라고 말을 흐리며 답을 피하는 듯했다. 집요하게 캐묻자, "미싱공장에서 시다했지"라면서 허허 웃으셨다.
'시다'라고? 1990년대에 태어나 2015년에 대학을 다니는 우리에게 '시다'는 <전태일 평전>에서나 들어본 말이었다. 그제서야 이모의 빨간 안경이 눈에 들어왔다. 알이 꽤 두꺼운 지 이모의 눈이 유독 작아보였는데, 아마 젊었을 때 했다는 그 '시다 일' 때문이었나 보다.
요즘 장사는 잘 되냐고 슬쩍 여쭤보니 난색을 표하신다.
"메르스도 있고, 여름에 덥기도 해서 누가 길거리로 많이 나오지도 않아! 바로 앞에 야채○이라는 마트가 생겨서 되던 장사도 안 될 판이야. 요즘은 많이 팔아봐야 하루에 3만 원 정도 파나…."
하루 3만 원이라는 돈에 우리는 또다시 놀랐다. 오전 7시 반부터 야채를 떼어 와서 오후 8~9시까지 하루 12시간 이상을 노점을 지켜서 버는 돈이 3만 원이라니. 최저시급에도 훨씬 못 미치는 벌이에 '다른 일은 왜 안 하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야채 이모는 "눈이 나빠서 어디서 써주지도 않고, 허리가 안 좋아서 파출부도 못해. 이거 해야지 뭐 어쩌겠어!"라며 대답하신다.
하루에 3만 원 판다는 이야기를, 그 어느 곳에도 취직이 안 된다는 말씀을 할 때조차도 연신 큰 목소리와 밝은 얼굴로 말씀하신다. 우리는 또 여쭤봤다. 왜 하필 야채였을까? 옆의 노점들만 보아도 장어, 된장, 고추장, 곡물처럼 단가가 센 상품들도 있는데, 야채는 한 단에 해봤자 1000원, 2000원이다.
"음…, 우리 엄마가 수유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했어. 하하. 보고 배운 게 이건데 이거 해야지!! 하하."
우리만 애가 타는 건지, 이모는 연신 웃으신다. 알고 보니 이모의 노점 지척에 재래시장인 수유시장이 있는데 이모의 어머님께서는 그 안에서 야채장사를 하셨단다. 그런데 그 자리가 주차장으로 개발되면서 어머님은 그곳을 떠야만 했고, 결국 이모는 그 앞에서 노점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2대째 상인, 특히 노점을 하고 있는 집은 수유시장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야채가게 이모자리에서 오른쪽으로 50미터 정도 떨어진 옷 가게 노점 이모도 딸까지 옷 유통업을 하고 있다. 왼쪽으로 50미터 정도 떨어진 자리의 야채○마트 앞에서 주스를 파는 노점 할머니도 아들이 노점을 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 취직이 안 된다던데…. 학생들은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이모가 우리에게 해준 첫 질문이었다. 지금 군대에 가 있다는 이모의 아들도 취직이 안 돼서 걱정이신 모양이었다. 자식의 도움도 없이, 온전히 홀로 서서 생계를 꾸리시는구나, 하고 문득 깨달은 순간이었다.
앞서 같은 봉제공장에서 만난 남편 역시 호흡기 질환 때문에 집에서 쉬셔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수유시장 앞에는 노점 소득이 거의 집안의 유일한 소득이거나 적어도 없어서는 안 될 소득인 사람들은 대부분이었다. 특히 우리가 만난 8개의 노점 중 6개의 노점은 남편의 벌이가 시원치 않거나 이제 남편이 일할 수 없어 노점이 유일무이한 생계수단으로 남은 고령의 여성 가장들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들은 그리 특별한 사람들도, 멀리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취직 안 되는 자녀를 두고, 평생을 일하다가 늙어서 자의든 타의든 퇴직을 하고, 그러나 여전히 생계의 압박에 시달리는, 우리 부모님 같은 분들일 뿐이었다.
화분 할머니 이야기
다음으로 우리가 만난 할머니는 화분 노점을 하고 계시는 '화분 할머니'이었다. 지금 자리 잡고 있는 수유시장에서의 화분 노점은 4년 정도 됐으나, 그녀의 노점상 인생은 10년 전부터 시작됐다.
할머니가 처음부터 노점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평범하게 식당을 운영했지만 부도가 나면서 노점상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신설동에서 토스트 노점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복개 사업으로 인해 청계천 근처 상권이 붕괴됐고, 그래서 화분할머니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겨우 자리를 잡은 곳이 현재 노점을 운영하고 있는 수유시장 앞 거리이다. 이곳에서 할머니는 평생 생각지도 못한 화분장사를 시작하게 됐다. 남편은 건강상 문제로 쉬고 있고 자식은 아들 하나가 있지만, 쉰이 넘은 직장인 아들에 기대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고령여성'인 그녀가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단다.
식당에서 토스트 장사로의 변화는 쉽게 이해가 갔지만 그녀의 인생에서 '화분 장사'는 다소 뜬금없이 들린다. 그래서 "원래 화분을 키우는 데 관심이 있으셨나봐요?" 하며 넘겨짚으니 "아니 그냥 어쩌다 하게 됐는데 하다 보니 관심이 생긴 거지"라는 의외의 답을 하셨다.
그래서 "그럼 화분 노점 말고 다른 일을 한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었는데, 우리가 은연중에 기대했던 낭만 섞인 꿈이 아닌 "가게로 들어가자면 권리금만 해도 몇 억이니…" 하는 한숨 섞인 숫자들만 내뱉으셨다. "그러면 돈이 생긴다면 뭐 하고 싶은 일 없으세요?" 하고 묻자 그저 "없어, 모르겠어" 하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물음에서 엿볼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는 그녀에게 숨겨진 꿈을 기대했다. '소중한 꿈을 품었지만 가난으로 좌절된 삶'과 같은 드라마틱한 비극을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서는 '꿈'이라는 단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의 여유도, 생각의 여유도 없는 삶이기에 꿈조차 논할 수 없었다.
그녀는 틀을 갖춘 집에서 잠을 자고 하루 평균 3만 원 정도를 벌며 아들에 조금씩 기대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저축은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며, 다행히도 보험은 하나 들어놓았단다.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노점상들은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고, 결국 미래가 완전히 불투명한 삶에 처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감히 빈곤에 '정의'하다
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다. 이제껏 '서울'은 디자인 서울, 세계적인 도시 서울, 걷고 싶은 서울로 불려왔다. 2002년 청계천 복원을 시발점으로 2008년에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디자인 서울 기획 그리고 2013년 걷고 싶은 거리 기획까지 서울시는 변화를 거듭해왔다. 이제 서울시장은 이런 거창한 개발 계획 없이는 당선될 수 없을 지경이다.
이러한 개발 사업들이 그리는 미래는 아름다운 거리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는 시민들이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이다. 이들이 그리는 미래 어디에도 도시미관을 이유로 강제퇴거 당해 삶의 공간을, 아니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시민'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빈곤'은 결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노점상에는 '불법'이라는 프레임이 덧씌워지고, '빈곤한 시민'은 진정한 시민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빈곤을 결코 곱게 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만난 '빈곤'한 사람들은, 빈곤이라는 상상 속의 낙인이 찍힌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아이들을 키우고, 꿈보다는 현실이 먼저인 우리, 그리고 부모님의 모습, 그 자체였다.
'빈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정녕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어딘가 똬리를 틀고 있는 불행 덩어리인가? 아니면 우리가 '빈곤의 대상'으로 만난 노점상, 철거민, 홈리스들만의 서사인가?
혹시 그들의 모습 속에 우리의, 혹은 내 곁의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지는 않는가? 우리는 감히 빈곤을 정의(定義)할 수 없다. 하지만 짧게나마 빈곤과 함께하면서 우리가 생각한 빈곤을 향한 정의(正義)는 '당신이 생각하는 빈곤이 어떤 모습이든, 평화와 공존의 사회를 위해서는 그 기준이 보다 세심하고 예민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권리장전'에는 130여 명의 대학생들이 참가하여 가든파이브, 철거민(돈의문, 서소문, 염리동), 노점상(DDP, 삼양동, 수유시장, 미아삼거리), 임차상인(만복, 보용만두, 신신원 등), 쪽방 주민(동자동), 홈리스(서울역, 홈리스행동)들을 만나 개별 면접조사 및 간담회 등을 통해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이 기사는 조사에 참가한 대학생들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보고, 느끼고, 들은 바들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연속 르포 형태로 기고될 예정입니다. 각 지역에 대한 조사보고서 및 종합보고서는 빈곤사회연대 누리집 문서 자료실에 업로드돼 있습니다. '길 위의 삶, 노점상을 만나다'는 면접조사를 통해 들어본 노점상들의 목소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 기자 말
▲ 2015반빈곤권리장전 대원들이 시민 앙케이트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 2015반빈곤권리장전
- 다음의 문장이 맞으면 O, 틀리면 X를 표시해 주세요.
① 노점상은 소득세를 내지 않기 때문에 사라져야 한다.
② 허가받지 않은 노점상을 강제 철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③ 노점상은 도시빈민이다.
④ 전국노점상총연합은 자릿세를 받는 깡패집단이다.
-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위의 문장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래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철거하는 건 좀…."
"노점상들은 가난하지 않아. 너희들이 모르는 거지. 너네는 진실을 몰라. 벤츠 끌고 노점상하러 다닌다니깐."
"노점은 세금을 안 내잖아. 이 주위 상가들은 미쳤다고 세금 내냐."
"불법이면 어쨌든 안 되죠. 합법이 되면 또 모를까."
지난 6월 30일, 대학생들이 진행한 앙케이트 조사에서 시민들은 공통적으로 위와 같은 답변을 내놨다. 약 120명의 시민의 답변이 네 가지로 유형화된 것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이런 시민들의 반응은 전날 노점상을 만나고 온 대학생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도시빈곤의 현장을 직접 만나고, 빈곤을 만들어내는 사회에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 우리가 거리로 처음 나왔을 때, 기대한 것은 비참하고 남루하고 더럽고 불행한 이미지의 도시 사람들이었다. 더불어 우리는 앞서 시민들의 대답과 같이,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노점상들을 만나면서 우리의 생각은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가 만난 수유시장의 노점상들은 강북구청 앞에서 만난 시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안타까운 사연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불쌍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벤츠를 끄는' 기업형 노점상들 같은 부자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대 '이상'의 환경을 보았기에,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빈민'이란 누구인지, 진정한 '빈곤'이란 무엇인지 물음이 생겼다. 우리가 만난 노점상들은 과연 빈곤한 사람들일까?
야채 이모 이야기
첫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리가 만난 노점상 중 한 분이었던 야채 이모다. 야채 이모의 가게는 수유시장으로 들어가는 골목 모퉁이 길가에 있었고, 우리는 노점 옆 작은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이모와 대화를 시작했다. 뭐든 물어보라는 이모의 환대에 마음을 놓았던 탓일까, 5분도 안 돼서 이모는 "어…, 그게…, 뭐 파출부도 잠깐 하고…"라고 말을 흐리며 답을 피하는 듯했다. 집요하게 캐묻자, "미싱공장에서 시다했지"라면서 허허 웃으셨다.
'시다'라고? 1990년대에 태어나 2015년에 대학을 다니는 우리에게 '시다'는 <전태일 평전>에서나 들어본 말이었다. 그제서야 이모의 빨간 안경이 눈에 들어왔다. 알이 꽤 두꺼운 지 이모의 눈이 유독 작아보였는데, 아마 젊었을 때 했다는 그 '시다 일' 때문이었나 보다.
요즘 장사는 잘 되냐고 슬쩍 여쭤보니 난색을 표하신다.
"메르스도 있고, 여름에 덥기도 해서 누가 길거리로 많이 나오지도 않아! 바로 앞에 야채○이라는 마트가 생겨서 되던 장사도 안 될 판이야. 요즘은 많이 팔아봐야 하루에 3만 원 정도 파나…."
하루 3만 원이라는 돈에 우리는 또다시 놀랐다. 오전 7시 반부터 야채를 떼어 와서 오후 8~9시까지 하루 12시간 이상을 노점을 지켜서 버는 돈이 3만 원이라니. 최저시급에도 훨씬 못 미치는 벌이에 '다른 일은 왜 안 하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야채 이모는 "눈이 나빠서 어디서 써주지도 않고, 허리가 안 좋아서 파출부도 못해. 이거 해야지 뭐 어쩌겠어!"라며 대답하신다.
하루에 3만 원 판다는 이야기를, 그 어느 곳에도 취직이 안 된다는 말씀을 할 때조차도 연신 큰 목소리와 밝은 얼굴로 말씀하신다. 우리는 또 여쭤봤다. 왜 하필 야채였을까? 옆의 노점들만 보아도 장어, 된장, 고추장, 곡물처럼 단가가 센 상품들도 있는데, 야채는 한 단에 해봤자 1000원, 2000원이다.
"음…, 우리 엄마가 수유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했어. 하하. 보고 배운 게 이건데 이거 해야지!! 하하."
우리만 애가 타는 건지, 이모는 연신 웃으신다. 알고 보니 이모의 노점 지척에 재래시장인 수유시장이 있는데 이모의 어머님께서는 그 안에서 야채장사를 하셨단다. 그런데 그 자리가 주차장으로 개발되면서 어머님은 그곳을 떠야만 했고, 결국 이모는 그 앞에서 노점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2대째 상인, 특히 노점을 하고 있는 집은 수유시장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야채가게 이모자리에서 오른쪽으로 50미터 정도 떨어진 옷 가게 노점 이모도 딸까지 옷 유통업을 하고 있다. 왼쪽으로 50미터 정도 떨어진 자리의 야채○마트 앞에서 주스를 파는 노점 할머니도 아들이 노점을 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 취직이 안 된다던데…. 학생들은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이모가 우리에게 해준 첫 질문이었다. 지금 군대에 가 있다는 이모의 아들도 취직이 안 돼서 걱정이신 모양이었다. 자식의 도움도 없이, 온전히 홀로 서서 생계를 꾸리시는구나, 하고 문득 깨달은 순간이었다.
앞서 같은 봉제공장에서 만난 남편 역시 호흡기 질환 때문에 집에서 쉬셔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수유시장 앞에는 노점 소득이 거의 집안의 유일한 소득이거나 적어도 없어서는 안 될 소득인 사람들은 대부분이었다. 특히 우리가 만난 8개의 노점 중 6개의 노점은 남편의 벌이가 시원치 않거나 이제 남편이 일할 수 없어 노점이 유일무이한 생계수단으로 남은 고령의 여성 가장들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들은 그리 특별한 사람들도, 멀리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취직 안 되는 자녀를 두고, 평생을 일하다가 늙어서 자의든 타의든 퇴직을 하고, 그러나 여전히 생계의 압박에 시달리는, 우리 부모님 같은 분들일 뿐이었다.
화분 할머니 이야기
다음으로 우리가 만난 할머니는 화분 노점을 하고 계시는 '화분 할머니'이었다. 지금 자리 잡고 있는 수유시장에서의 화분 노점은 4년 정도 됐으나, 그녀의 노점상 인생은 10년 전부터 시작됐다.
할머니가 처음부터 노점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평범하게 식당을 운영했지만 부도가 나면서 노점상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신설동에서 토스트 노점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복개 사업으로 인해 청계천 근처 상권이 붕괴됐고, 그래서 화분할머니는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겨우 자리를 잡은 곳이 현재 노점을 운영하고 있는 수유시장 앞 거리이다. 이곳에서 할머니는 평생 생각지도 못한 화분장사를 시작하게 됐다. 남편은 건강상 문제로 쉬고 있고 자식은 아들 하나가 있지만, 쉰이 넘은 직장인 아들에 기대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고령여성'인 그녀가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단다.
식당에서 토스트 장사로의 변화는 쉽게 이해가 갔지만 그녀의 인생에서 '화분 장사'는 다소 뜬금없이 들린다. 그래서 "원래 화분을 키우는 데 관심이 있으셨나봐요?" 하며 넘겨짚으니 "아니 그냥 어쩌다 하게 됐는데 하다 보니 관심이 생긴 거지"라는 의외의 답을 하셨다.
그래서 "그럼 화분 노점 말고 다른 일을 한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었는데, 우리가 은연중에 기대했던 낭만 섞인 꿈이 아닌 "가게로 들어가자면 권리금만 해도 몇 억이니…" 하는 한숨 섞인 숫자들만 내뱉으셨다. "그러면 돈이 생긴다면 뭐 하고 싶은 일 없으세요?" 하고 묻자 그저 "없어, 모르겠어" 하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끈질기게 따라붙던 물음에서 엿볼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는 그녀에게 숨겨진 꿈을 기대했다. '소중한 꿈을 품었지만 가난으로 좌절된 삶'과 같은 드라마틱한 비극을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서는 '꿈'이라는 단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의 여유도, 생각의 여유도 없는 삶이기에 꿈조차 논할 수 없었다.
그녀는 틀을 갖춘 집에서 잠을 자고 하루 평균 3만 원 정도를 벌며 아들에 조금씩 기대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저축은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며, 다행히도 보험은 하나 들어놓았단다.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노점상들은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고, 결국 미래가 완전히 불투명한 삶에 처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감히 빈곤에 '정의'하다
▲ 2015반빈곤권리장전 대원들이 시민 앙케이트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 2015반빈곤권리장전
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다. 이제껏 '서울'은 디자인 서울, 세계적인 도시 서울, 걷고 싶은 서울로 불려왔다. 2002년 청계천 복원을 시발점으로 2008년에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디자인 서울 기획 그리고 2013년 걷고 싶은 거리 기획까지 서울시는 변화를 거듭해왔다. 이제 서울시장은 이런 거창한 개발 계획 없이는 당선될 수 없을 지경이다.
이러한 개발 사업들이 그리는 미래는 아름다운 거리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는 시민들이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이다. 이들이 그리는 미래 어디에도 도시미관을 이유로 강제퇴거 당해 삶의 공간을, 아니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시민'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빈곤'은 결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노점상에는 '불법'이라는 프레임이 덧씌워지고, '빈곤한 시민'은 진정한 시민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빈곤을 결코 곱게 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만난 '빈곤'한 사람들은, 빈곤이라는 상상 속의 낙인이 찍힌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아이들을 키우고, 꿈보다는 현실이 먼저인 우리, 그리고 부모님의 모습, 그 자체였다.
'빈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정녕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어딘가 똬리를 틀고 있는 불행 덩어리인가? 아니면 우리가 '빈곤의 대상'으로 만난 노점상, 철거민, 홈리스들만의 서사인가?
혹시 그들의 모습 속에 우리의, 혹은 내 곁의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지는 않는가? 우리는 감히 빈곤을 정의(定義)할 수 없다. 하지만 짧게나마 빈곤과 함께하면서 우리가 생각한 빈곤을 향한 정의(正義)는 '당신이 생각하는 빈곤이 어떤 모습이든, 평화와 공존의 사회를 위해서는 그 기준이 보다 세심하고 예민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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