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 싫어하는 세상
오늘날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인문적 사유가 바탕이 되는 삶을 추구하는 일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인문 정신의 전면적인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비리와 거짓이 난무하고 자본과 권력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런데도 인문의 본원이어야 할 대학에서조차 취업 실적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철학과, 국문학과를 비롯해 몇 개의 순수 인문학과가 통합 또는 폐과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마치 생각하기 싫어하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아니 심지어 자신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자기 주변에 세상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뭔가 까다롭다고 여기고 피곤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든 돈을 벌어 원하는 바대로 누리며 살아야 하는 자신들의 삶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성찰이나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한 고뇌보다 돈, 건강, 출세, 스펙, 힐링 등에 집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삶을 너무 팍팍하게 만들었다는 데서 우리 사회에서 인문 정신이 사라져가는 원인을 찾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개방, 효율, 무한 경쟁이 발전의 동력이라는 슬로건으로 인간을 약육강식의 정글로 몰아넣었습니다.
결국 생존하기도 버거운 상태에서 시집이나 철학책을 읽는다는 것, 뭔가를 한 번 더 생각한다는 것은 차라리 사치에 가깝다는 인식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인간적 가치보다는 생존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자리할 곳이 없고, 너무 쉽게 인간의 존엄성이 부정됩니다.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생각하지 못하는 지도층, 정직하지 못한 지도층 인사가 많은 사회일수록 경쟁과 자본, 그리고 개인의 이기적 욕망 앞에서 인간의 본질적 가치들이 쉽게 후순위로 밀려버리고 맙니다. 그런 사회일수록 깊게 성찰하고 비판하고 고발하는 인문 정신은 외면당하고 위기에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문의 위기는 곧 사람의 위기
인문 정신의 바탕은 인간입니다. 인간성이 사라져가는 땅에서 인문 정신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인문 정신이 죽은 땅에서 제대로 된 인간의 삶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문 정신의 위기는 곧 인간으로서의 우리 삶과 생존의 위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인문 정신은 바로 우리 삶의 현실적 부조리를 극복하고 인간적인 삶,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한 자양분과 같기 때문입니다.
인문 정신의 고갈과 함께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멀어지고 정신은 공허해집니다. 고상한 인간적 가치는 죽어가고 우리 사회 전반의 도의적 파탄의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국민을 업신여기며 정치적 기만을 일삼는 행위를 비롯해 세월호 참사나 '땅콩 회항' 사건 등 비극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태들이 반복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현실의 이러한 심각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인문 정신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인문 정신은 우리 삶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고도 합니다. 인문 정신에는 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한 노력과 실천이 담겨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김수영, 김지하, 박노해, 고은, 황석영, 장준하 등 수많은 문인, 언론인, 예술인, 학자들이 온갖 탄압과 고통 속에서도 독재를 비판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노래하여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힘 역시 인문 정신이었습니다.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인문 정신과 맞닥뜨린다는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고통스럽고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의미 있는 시, 소설, 영화, 철학적 글들, 그리고 주변의 정의로운 사람들이 어떤 이들을 불편하게 하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직한 인문 정신이 건네는 불편한 목소리를 견뎌낼수록 우리는 자신의 삶에 더 솔직하게 직면할 수 있고 나아가 소망스러운 삶에 대한 꿈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문 정신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과 보다 나은 인간적 삶을 추구할 수 있는 힘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문 정신의 위기를 넘어
루마니아의 작가 게오르규(Constantin Virgil Gheorghiu, 1916∼1992)는 기계문명으로 인해 인간의 가치가 상실되는 현대 사회를 예견한 <25시>라는 소설에서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라고 표현했습니다. 잠수함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 산소를 측정하는 기계가 없어서 산소 결핍에 민감한 토끼를 잠수함에 태우고 다녔던 일화에서 끌어온 비유적인 말입니다. 토끼는 밀폐된 공간인 잠수함에 산소가 모자라게 되면 인간보다 5∼6시간 먼저 그 상황에 대한 반응을 민감하게 보임으로써 산소 보충 시기를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게오르규는 잠수함 속 공기의 조그만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잠수함에 닥친 위험을 알려주는 '잠수함의 토끼'처럼, 종말을 향해 무분별하게 질주하는 물질문명의 횡포를 한발 앞서 감지하여 사람들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시인(작가)의 진정한 임무라고 여긴 것입니다.
시인이나 작가들은 남다른 감수성과 인문적 통찰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민감한 변화를 감지하고 위기의 징후를 가장 먼저 예견하여 위기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회적 역할을 합니다. 잠수함 속 토끼가 사람들에게 산소를 보충해야 할 시기를 알려주는 것처럼 시인, 작가들의 노력을 비롯한 인문적 고뇌들은 인간 사회가 처하게 될 미래를 전망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시인, 작가들이 잠수함의 토끼에 비유될 수 있는 존재라면, 인문 정신은 인간적 삶의 유지를 위한 산소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가이며 교수인 박범신은 "현대문학은 고통과 상처를 그 자궁으로 삼고 출발했다. 모든 작가는 시대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윤동주는 심지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쓰지 않았던가.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작가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삶의 가치가 높아지는 세상"을 위한 진정성 넘치는 비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적 삶의 가치가 높아지는 세상을 지향하며 현실을 성찰하고, 비판하고, 개선을 위해 실천하는 정신. 이것이 바로 인문 정신입니다. 우리가 인문적 사유를 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정신을 깨우치고 우리의 삶을 이를 바탕으로 사유하여 진정한 삶으로 가꾸어나가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무너져가는 우리 사회의 사람다움을 되살리기 위해 가장 절실한 일이 사회 전반적으로 꺼져가고 있는 인문 정신의 불씨를 되살리는 일이며, 우리 청소년들이 인문적 소양을 키우며 성장할 수 있도록 힘쓰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인문적 사유가 바탕이 되는 삶을 추구하는 일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인문 정신의 전면적인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비리와 거짓이 난무하고 자본과 권력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런데도 인문의 본원이어야 할 대학에서조차 취업 실적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철학과, 국문학과를 비롯해 몇 개의 순수 인문학과가 통합 또는 폐과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마치 생각하기 싫어하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아니 심지어 자신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자기 주변에 세상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뭔가 까다롭다고 여기고 피곤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든 돈을 벌어 원하는 바대로 누리며 살아야 하는 자신들의 삶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성찰이나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한 고뇌보다 돈, 건강, 출세, 스펙, 힐링 등에 집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삶을 너무 팍팍하게 만들었다는 데서 우리 사회에서 인문 정신이 사라져가는 원인을 찾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개방, 효율, 무한 경쟁이 발전의 동력이라는 슬로건으로 인간을 약육강식의 정글로 몰아넣었습니다.
결국 생존하기도 버거운 상태에서 시집이나 철학책을 읽는다는 것, 뭔가를 한 번 더 생각한다는 것은 차라리 사치에 가깝다는 인식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인간적 가치보다는 생존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자리할 곳이 없고, 너무 쉽게 인간의 존엄성이 부정됩니다.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생각하지 못하는 지도층, 정직하지 못한 지도층 인사가 많은 사회일수록 경쟁과 자본, 그리고 개인의 이기적 욕망 앞에서 인간의 본질적 가치들이 쉽게 후순위로 밀려버리고 맙니다. 그런 사회일수록 깊게 성찰하고 비판하고 고발하는 인문 정신은 외면당하고 위기에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문의 위기는 곧 사람의 위기
인문 정신의 바탕은 인간입니다. 인간성이 사라져가는 땅에서 인문 정신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인문 정신이 죽은 땅에서 제대로 된 인간의 삶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문 정신의 위기는 곧 인간으로서의 우리 삶과 생존의 위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인문 정신은 바로 우리 삶의 현실적 부조리를 극복하고 인간적인 삶,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한 자양분과 같기 때문입니다.
인문 정신의 고갈과 함께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멀어지고 정신은 공허해집니다. 고상한 인간적 가치는 죽어가고 우리 사회 전반의 도의적 파탄의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국민을 업신여기며 정치적 기만을 일삼는 행위를 비롯해 세월호 참사나 '땅콩 회항' 사건 등 비극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태들이 반복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현실의 이러한 심각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인문 정신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인문 정신은 우리 삶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고도 합니다. 인문 정신에는 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한 노력과 실천이 담겨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김수영, 김지하, 박노해, 고은, 황석영, 장준하 등 수많은 문인, 언론인, 예술인, 학자들이 온갖 탄압과 고통 속에서도 독재를 비판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노래하여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힘 역시 인문 정신이었습니다.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인문 정신과 맞닥뜨린다는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고통스럽고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의미 있는 시, 소설, 영화, 철학적 글들, 그리고 주변의 정의로운 사람들이 어떤 이들을 불편하게 하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직한 인문 정신이 건네는 불편한 목소리를 견뎌낼수록 우리는 자신의 삶에 더 솔직하게 직면할 수 있고 나아가 소망스러운 삶에 대한 꿈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문 정신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과 보다 나은 인간적 삶을 추구할 수 있는 힘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문 정신의 위기를 넘어
루마니아의 작가 게오르규(Constantin Virgil Gheorghiu, 1916∼1992)는 기계문명으로 인해 인간의 가치가 상실되는 현대 사회를 예견한 <25시>라는 소설에서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라고 표현했습니다. 잠수함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 산소를 측정하는 기계가 없어서 산소 결핍에 민감한 토끼를 잠수함에 태우고 다녔던 일화에서 끌어온 비유적인 말입니다. 토끼는 밀폐된 공간인 잠수함에 산소가 모자라게 되면 인간보다 5∼6시간 먼저 그 상황에 대한 반응을 민감하게 보임으로써 산소 보충 시기를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게오르규는 잠수함 속 공기의 조그만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잠수함에 닥친 위험을 알려주는 '잠수함의 토끼'처럼, 종말을 향해 무분별하게 질주하는 물질문명의 횡포를 한발 앞서 감지하여 사람들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시인(작가)의 진정한 임무라고 여긴 것입니다.
시인이나 작가들은 남다른 감수성과 인문적 통찰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민감한 변화를 감지하고 위기의 징후를 가장 먼저 예견하여 위기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회적 역할을 합니다. 잠수함 속 토끼가 사람들에게 산소를 보충해야 할 시기를 알려주는 것처럼 시인, 작가들의 노력을 비롯한 인문적 고뇌들은 인간 사회가 처하게 될 미래를 전망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시인, 작가들이 잠수함의 토끼에 비유될 수 있는 존재라면, 인문 정신은 인간적 삶의 유지를 위한 산소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가이며 교수인 박범신은 "현대문학은 고통과 상처를 그 자궁으로 삼고 출발했다. 모든 작가는 시대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윤동주는 심지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쓰지 않았던가.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작가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삶의 가치가 높아지는 세상"을 위한 진정성 넘치는 비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적 삶의 가치가 높아지는 세상을 지향하며 현실을 성찰하고, 비판하고, 개선을 위해 실천하는 정신. 이것이 바로 인문 정신입니다. 우리가 인문적 사유를 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정신을 깨우치고 우리의 삶을 이를 바탕으로 사유하여 진정한 삶으로 가꾸어나가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무너져가는 우리 사회의 사람다움을 되살리기 위해 가장 절실한 일이 사회 전반적으로 꺼져가고 있는 인문 정신의 불씨를 되살리는 일이며, 우리 청소년들이 인문적 소양을 키우며 성장할 수 있도록 힘쓰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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