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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부똥 팅부똥"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뿐

[중국 충칭여행 ②] 임시정부 가는 길

등록|2015.08.17 16:28 수정|2015.08.18 09:41
오전 10시 40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세 시간 조금 더 걸려 충칭의 쟝베이(江北)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 시간으로는 오후 2시쯤이지만 여기 중국에서는 오후 1시밖에 되지 않았다. 금을 주고도 시간은 살 수가 없다는데, 가만 앉아서 한 시간을 벌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시차 덕분에 생긴 일이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햇살이 쨍하게 내리 꽂힌다. 팽팽하게 시위를 당긴 활처럼 충칭의 햇살은 날이 서 있다. 이제 우리는 이 햇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말(言語)이라는 갑옷도 하나 걸치지 않고 화살이 난무하는 전쟁터 속으로 들어간다.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아는 말이라고는 '니하오'와 '쎄쎄'가 전부나 마찬가지인데... 난감한 듯 잠시 망설이던 남편이 수첩을 꺼낸다. 비전(秘傳)의 보검(寶劍)이라도 되는 양 수첩을 펼쳐들더니 앞장을 선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 묻고 묻고 또 물으면서 헤쳐나간 여행. ⓒ 이승숙


수첩에는 사전 조사를 해온 내용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충칭을 다녀온 사람들에게서 얻은 정보들이다. 공항을 나와 왼쪽으로 조금 가면 지하철 타는 곳이 나온다고 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그 많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조금 전까지 보이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아이가 된 듯 막막했다.

두 달 배운 중국어를 시험해 볼 기회가 왔다. 말을 배우기로는 이보다 더 나은 환경이 있을까. 온 천지에 중국말 하는 사람들뿐이니, 그야말로 중국말로 샤워를 하는 셈이다.

친절할 것 같은 사람을 물색한다. 첫 번째 사람은 그냥 보낸다. 아직 말 붙일 준비가 안 됐다. 두 번째 사람도 건너뛴다. 어째 인상이 편하지가 않다. 세 번째 사람에게 말을 붙인다. 왠지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워 쓰 한꿔런(我是韓國人)."

청년이 긴장하며 멈춰 선다.

"워먼쓰한꿔런. 우리는 한국 사람이에요. 우리는 중국말을 잘 못해요."

애써 중국말을 해보지만 내가 하는 말은 어린 아이들 말과 진배 없었을 거다. 그래도 일단은 말을 붙였으니 성공이다.

▲ 말이 안 통할 땐 필담으로... ⓒ 이승숙


"팅부똥, 천천히 말해 주세요"

"지하철을 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요?"

​물론 중국어로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지하철역'이라고 쓴 종이를 청년에게 보여주며 표정과 몸짓으로 뜻을 전한다. 우리가 외국인이라는 걸 안 청년이 본격적으로 길을 가르쳐 준다. 아, 그러나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다. 두 달 배운 중국어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팅부똥(听不懂). 잘 못 알아듣겠습니다. 칭원, 만만슈어. 좀 천천히 말해 주세요."

이후로 우리는 '못 알아듣겠다'는 말과 '천천히 말해 달라'는 부탁을 수도 없이 하면서 충칭과 귀주성 등지를 누비고 다녔다. 처음에는 입에서 잘 나오지 않던 이 말도 나중에는 저절로 나왔다. "팅부똥, 팅부똥" 우리가 그렇게 말하면 중국 사람도 웃고 우리도 웃었다. 두 나라 사람 사이에 이 말만은 완벽하게 통했다. 

청년이 가르쳐주는 대로 가다보니 지하철역이 나온다. 역이 보이자 뿌듯했다.

"그래, 이렇게 하는 거야.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별 문제가 없을 거야."

고작 지하철역 하나 찾은 걸 가지고도 남편은 으쓱해하며 앞으로 쑥쑥 나아간다.

▲ 중경 임시정부 ⓒ 이승숙


용기는 무슨, 익사할 뻔 했네

우리 뒤를 세 명의 한국 청년들이 따라온다. 서류 가방을 어깨에 멘 걸 보니 중국으로 출장을 온 직장인 같다. 그들도 지하철역을 못 찾아 헤매다가 우리를 보자 반가운지 여행 오셨느냐면서 말을 건다.

"충칭 임시정부 보러 가는 길이에요. 3호선 타고 가서 1호선으로 바꿔 타면 임시정부가 나와요."

임시정부를 보러간다니까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호기심을 드러낸다.

"임시정부는 상해에 있지 않아요?"

물론 상해에도 임시정부가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우리나라 임시정부는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중경에서 해방을 맞이하여 환국했다.

중국으로 출장을 왔다고 하는 청년들과 헤어졌다.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최고입니다" 해주었던 청년들이다. 자신들의 부모님 연배인 우리가 배낭 여행을 떠난 게 못내 신기한가 보다. 그들에게는 용기 있는 사람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실상 우리는 바짝 얼어 있었다.

그 청년들과 헤어진 후 근 열흘 동안 한국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완벽하게 중국 사람 속에 묻혀 다녔다.​ 중국말의 홍수 속에 휩쓸려 익사할 뻔 했던 열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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