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 누른 우리, '따봉충'일까
[누리꾼 탐구생활⑨] 페북 '좋아요', 콰키우틀족 '선물경제'에서 비롯돼
사이버 공간에는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있으며, 그중 페이스북은 세계 최대규모의 인맥 기반 SNS(사회적 관계망 서비스) 커뮤니티다. 여기서 사람들이 주로 하는 일들이란 겉보기에는 단순하다. 누군가 글·사진·동영상 등을 공유한다. 사람들은 '좋아요' 버튼을 누르거나 댓글을 달며 답례를 한다.
이 '친목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는 사람들은, 서로 신뢰를 얻고자 대부분 실명과 최소한의 프로필 사진을 공개한다. 그리고 '페친(페이스북 친구)' 신청으로 연대한다. 이제 사람들은 책임감을 느끼며, 어느 정도 서로 배려해가며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페북의 '의례'다.
그런데 최근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디시인사이드)와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에서, 페북커들은 곧잘 '따봉충'으로 비하된다(좋아요 버튼이 따봉 제스처다). 인터넷 백과사전 <구스위키>의 한 편집자는 용어의 기원을 디시 야구갤러리에서 찾는다. 이 용어가 처음 쓰인 이유 중 하나는, 좋아요가 글에 따라 이상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페친에게 좋아요는 정신적 위로일까, 약 올리기일까. 또 남북 긴장 고조 기사에서 좋아요는 언론에 대한 격려일까, 광기의 발로일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페북커들은 손쉽게 '좋아요'를 누르므로 "몰상식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난센스다. 왜냐하면, 페북커들은 각자의 뉘앙스에서 좋아요를 누르거나 누르지 않으니까. 매 순간 그들은 선택해야 한다. 단지 그 의도가 성공적으로 전달 될지는 순전히 페북커들끼리 맺은 고유한 맥락들(특히 친목관계)에 달렸을 뿐이다.
분명 오해의 여지가 남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서로 유대관계를 맺을수록, 관습화된 이해관계를 더 잘 이해할수록 오해가 생길 가능성은 줄어든다. 결국, 겉으로 보고 단순히 "몰상식"하다고 결론짓는 건 비합리적이다.
심지어 페북커들은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주커버그에게, 지금보다 미묘한 감정까지 잘 표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꾸준히 요구하기도 했다. 주커버그는 지난해 12월, 차라리 '싫어요' 버튼을 만드는 건 어떠냐는 페북커들의 의견에 "만들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좋아요 버튼은 긍정적 반응을 공유하는 빠른 방법"이지만, "싫어요 버튼으로 부정적 반응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들 세상에 도움이 되진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의례는 콰키우틀족 '선물경제'에서 유래
실제로 커뮤니티의 의례를 바꾸는 건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주커버그는 페이스북을 만들 당시,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Potlatch)' 선물경제를 모델로 삼았다. 포틀래치란 무엇인가. 페이스북상에서 사람들이 서로 정보나 정서적 관심 등을 주고받는 걸 연상하면 쉽다.
콰키우틀족은 부족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이 변할 때마다, 경조사 등을 구실로 포틀래치 축제를 연다. 주최 측은 재산을 많이 모은 사람들로서, 부족민들에게 음식과 선물들을 증여한다. 주최 측은 많은 재산을 탕진할수록 부족민들의 '인정'을 얻고, 부족은 화합과 빈부 격차를 해소한다.
이때 사람들은 '역할 가면극'을 즐기는데, 마치 페이스북상에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이슈에 대해 재잘거리는 것과 닮았다. 가령 '하지율'이라는 어떤 이름은, 기사를 작성한 뒤 그것을 자신의 타임라인에 공유하며 등장한다. 포틀래치가 열린 것이다. 이때 다양한 페친들이 등장해, 평소 콘셉트 대로 한 마디씩 거들며 기쁨을 나누는 식이다.
포틀래치를 통해, 콰키우틀족은 부의 재분배를, 페이스북은 정보의 공유를 이룬다. 페이스북에서 나이와 성별, 직업과 학력을 막론한 다양한 계층들이 재잘거리며 선물경제 순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누리꾼들의 재잘거림은 커뮤니티의 생명력이다
사람들이 신선한 정보 등을 나누는 걸, 인터넷 용어로는 신선한 '떡밥'을 투척했다고 번역한다. 페이스북에서 정보의 공유는 곧 떡밥 투척이다. 누구든 이왕 떡밥을 투척했다면 잠시 위세를 얻었다가 곧 묻힌다(잊힌다).
아무리 평소에 떡밥이 많은 사람이라도 무한히 투척할 수는 없고, 떨군 떡밥도 오래되면 곧 식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선한 떡밥을 원한다. 뉴스피드 창은 빠르게 업데이트되고, 다른 사람들도 꾸준히 떡밥을 투척한다.
친목 관계를 통한 사람 사이의 유대, 끊임없는 상호 인정을 유도하지만, 누구도 결정적 우위를 점할 수는 없는 구조, 정보 공유를 통한 격차의 해소... 이것이 페이스북의 풍요와 평등을 '어느 정도' 유지시키는 주커버그의 인류학적 인사이트다. 이런 모델에서 '싫어요' 버튼의 도입은 생각하기 어렵다.
진정한 포틀래치 선물경제를 실현하려면
우리는 페이스북뿐 아니라 여타 커뮤니티에서도, '이름(실명이든 닉네임이든)'으로 등장한다. 등장은 재잘거릴 때 이뤄진다. 재잘거리지 않으면 존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눈팅족의 존재는 짐작될 뿐이다). 그래서 침묵은 곧 커뮤니티 내의 죽음이다. 당신의 재잘거림이 뜸할 때, 당신의 동료는 이렇게 생존확인을 할지도 모른다.
"○○○님 살아계세요?"
결국, 반복적인 재잘거림은, 한편으로 "나다! 나다! 나다!"라는 존재선언의 되풀이와 같다. 우리는 재잘거린다, 고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터넷 상에서 쉬지않고 존재의 함성을 내지르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독일의 철학자 헤겔과 악셀 호네트, 미국의 심리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와 윌리엄 제임스 같은 이들은 바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인간 행동의 기본적 원동력이라고 설명한다. 보통 '인정받고 싶은 욕구'라고 하면, '관심병' 등 부정적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일쑤다.
그러나 이들은 인정욕구가 사회진보에 긍정적인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람은 인격적 동등함을 무시당할 때, "울분"을 느끼고, 인정받고자 하는 정치적 투쟁 즉 '인정투쟁'을 하게 되면서 사회 진보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청년들은 알바를 하다가 사장이 약속대로 시급을 안 주면, SNS에서 한풀이도 좀 하게 마련이고 그러다 비슷한 친구들이 모인 '알바노조' 같은 페이지를 발견할 수 있다. 또 정보도 공유하고 데모도 참여하다 보면, 돈도 받아낼 수 있게 되면서 악질 사장들은 사회에서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진다. 결국, SNS는 유익한 인정투쟁의 장이 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이 포틀래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리고 포틀래치의 진정한 생명력은 많은 사람들이 증여와 답례에 참여할 수 있을 때야 실현된다. 여전히 SNS에는 '유령'처럼 겉돌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은 의외의 맥락에서 등장해 친절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열심히 공유해주고, 매번 '좋아요'를 눌러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그리 많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늘 재잘거리는 사람만 재잘거리면 재미가 없고 새로운 떡밥이 도래하지 않는다.
필자의 페친 중에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호소성 질문을 하는 이들이 가끔 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몰라서다. 그런데 필자 역시 글을 잘 쓰는 축이 아니라, 부끄럽게도 "함께 노력하자"는 식의 영양가 없는 말로 마무리하기 일쑤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한 사회에는 '경제자본'뿐 아니라 '문화자본'도 있다고 설명한다. 쉽게 말해 누군가 문화를 생산하려면, 글쓰기 능력·정보나 지식 등 비물질적 생산 수단부터가 필요하다.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 뿐 아니라, 문화적 불평등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물어보자. 대체 왜 우리나라 중등교육에는 독일과 프랑스처럼 '작문수업'이나 '철학수업'이 없다시피 할까? 어찌보면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이, 대학을 나온 사람보다 참여할 수 있는 대화의 폭이 지나치게 제한된다는 것부터가 사회 관계망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다.
필자는 외국 언론을 모니터링하면서, 그것이 일리 있는 말이든 허튼소리든 서양인들이 제법 유창하게 말하는 걸 보면 저런 점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학 진학률은 한국만큼 높지 않다! 사람들이 자기 문화를 생산하고 포틀래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화자본을 공급하지 못하는 경쟁 닦달형 한국 주입식 교육에 먼저 '싫어요'를 눌러야 하지 않을까.
이 '친목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는 사람들은, 서로 신뢰를 얻고자 대부분 실명과 최소한의 프로필 사진을 공개한다. 그리고 '페친(페이스북 친구)' 신청으로 연대한다. 이제 사람들은 책임감을 느끼며, 어느 정도 서로 배려해가며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페북의 '의례'다.
그런데 최근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디시인사이드)와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에서, 페북커들은 곧잘 '따봉충'으로 비하된다(좋아요 버튼이 따봉 제스처다). 인터넷 백과사전 <구스위키>의 한 편집자는 용어의 기원을 디시 야구갤러리에서 찾는다. 이 용어가 처음 쓰인 이유 중 하나는, 좋아요가 글에 따라 이상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페친에게 좋아요는 정신적 위로일까, 약 올리기일까. 또 남북 긴장 고조 기사에서 좋아요는 언론에 대한 격려일까, 광기의 발로일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페북커들은 손쉽게 '좋아요'를 누르므로 "몰상식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 인터넷 커뮤니티들사이버 공간에는 이미 수많은 커뮤니티들이 있고, 각자 고유한 구조와 의례들을 가진다. 위에 제시된 커뮤니티들은 그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 하지율
그러나 이는 난센스다. 왜냐하면, 페북커들은 각자의 뉘앙스에서 좋아요를 누르거나 누르지 않으니까. 매 순간 그들은 선택해야 한다. 단지 그 의도가 성공적으로 전달 될지는 순전히 페북커들끼리 맺은 고유한 맥락들(특히 친목관계)에 달렸을 뿐이다.
분명 오해의 여지가 남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서로 유대관계를 맺을수록, 관습화된 이해관계를 더 잘 이해할수록 오해가 생길 가능성은 줄어든다. 결국, 겉으로 보고 단순히 "몰상식"하다고 결론짓는 건 비합리적이다.
심지어 페북커들은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주커버그에게, 지금보다 미묘한 감정까지 잘 표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꾸준히 요구하기도 했다. 주커버그는 지난해 12월, 차라리 '싫어요' 버튼을 만드는 건 어떠냐는 페북커들의 의견에 "만들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좋아요 버튼은 긍정적 반응을 공유하는 빠른 방법"이지만, "싫어요 버튼으로 부정적 반응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들 세상에 도움이 되진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의례는 콰키우틀족 '선물경제'에서 유래
▲ 콰키우틀족의 포틀래치 댄스북아메리카 서해안 인디언들 사이에서 부유한 사람들이 베푸는 축제다. 시기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경조사 등을 구실로 수시로 행한다. '포틀래치(Potlatch)'는 치누크족 말로 '소비하다', '주다' , '베풀다' 등을 의미한다. 이를 행하는 대표적 부족들로 콰키우틀, 치누크, 하이다, 누트카, 유픽 등이 있다. ⓒ matricien.org
실제로 커뮤니티의 의례를 바꾸는 건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주커버그는 페이스북을 만들 당시,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Potlatch)' 선물경제를 모델로 삼았다. 포틀래치란 무엇인가. 페이스북상에서 사람들이 서로 정보나 정서적 관심 등을 주고받는 걸 연상하면 쉽다.
콰키우틀족은 부족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이 변할 때마다, 경조사 등을 구실로 포틀래치 축제를 연다. 주최 측은 재산을 많이 모은 사람들로서, 부족민들에게 음식과 선물들을 증여한다. 주최 측은 많은 재산을 탕진할수록 부족민들의 '인정'을 얻고, 부족은 화합과 빈부 격차를 해소한다.
이때 사람들은 '역할 가면극'을 즐기는데, 마치 페이스북상에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이슈에 대해 재잘거리는 것과 닮았다. 가령 '하지율'이라는 어떤 이름은, 기사를 작성한 뒤 그것을 자신의 타임라인에 공유하며 등장한다. 포틀래치가 열린 것이다. 이때 다양한 페친들이 등장해, 평소 콘셉트 대로 한 마디씩 거들며 기쁨을 나누는 식이다.
포틀래치를 통해, 콰키우틀족은 부의 재분배를, 페이스북은 정보의 공유를 이룬다. 페이스북에서 나이와 성별, 직업과 학력을 막론한 다양한 계층들이 재잘거리며 선물경제 순환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누리꾼들의 재잘거림은 커뮤니티의 생명력이다
사람들이 신선한 정보 등을 나누는 걸, 인터넷 용어로는 신선한 '떡밥'을 투척했다고 번역한다. 페이스북에서 정보의 공유는 곧 떡밥 투척이다. 누구든 이왕 떡밥을 투척했다면 잠시 위세를 얻었다가 곧 묻힌다(잊힌다).
아무리 평소에 떡밥이 많은 사람이라도 무한히 투척할 수는 없고, 떨군 떡밥도 오래되면 곧 식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선한 떡밥을 원한다. 뉴스피드 창은 빠르게 업데이트되고, 다른 사람들도 꾸준히 떡밥을 투척한다.
친목 관계를 통한 사람 사이의 유대, 끊임없는 상호 인정을 유도하지만, 누구도 결정적 우위를 점할 수는 없는 구조, 정보 공유를 통한 격차의 해소... 이것이 페이스북의 풍요와 평등을 '어느 정도' 유지시키는 주커버그의 인류학적 인사이트다. 이런 모델에서 '싫어요' 버튼의 도입은 생각하기 어렵다.
진정한 포틀래치 선물경제를 실현하려면
우리는 페이스북뿐 아니라 여타 커뮤니티에서도, '이름(실명이든 닉네임이든)'으로 등장한다. 등장은 재잘거릴 때 이뤄진다. 재잘거리지 않으면 존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눈팅족의 존재는 짐작될 뿐이다). 그래서 침묵은 곧 커뮤니티 내의 죽음이다. 당신의 재잘거림이 뜸할 때, 당신의 동료는 이렇게 생존확인을 할지도 모른다.
"○○○님 살아계세요?"
결국, 반복적인 재잘거림은, 한편으로 "나다! 나다! 나다!"라는 존재선언의 되풀이와 같다. 우리는 재잘거린다, 고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터넷 상에서 쉬지않고 존재의 함성을 내지르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독일의 철학자 헤겔과 악셀 호네트, 미국의 심리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와 윌리엄 제임스 같은 이들은 바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인간 행동의 기본적 원동력이라고 설명한다. 보통 '인정받고 싶은 욕구'라고 하면, '관심병' 등 부정적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일쑤다.
그러나 이들은 인정욕구가 사회진보에 긍정적인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람은 인격적 동등함을 무시당할 때, "울분"을 느끼고, 인정받고자 하는 정치적 투쟁 즉 '인정투쟁'을 하게 되면서 사회 진보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청년들은 알바를 하다가 사장이 약속대로 시급을 안 주면, SNS에서 한풀이도 좀 하게 마련이고 그러다 비슷한 친구들이 모인 '알바노조' 같은 페이지를 발견할 수 있다. 또 정보도 공유하고 데모도 참여하다 보면, 돈도 받아낼 수 있게 되면서 악질 사장들은 사회에서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진다. 결국, SNS는 유익한 인정투쟁의 장이 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이 포틀래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주커버그. ⓒ Elaine Chan and Priscilla
그리고 포틀래치의 진정한 생명력은 많은 사람들이 증여와 답례에 참여할 수 있을 때야 실현된다. 여전히 SNS에는 '유령'처럼 겉돌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은 의외의 맥락에서 등장해 친절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열심히 공유해주고, 매번 '좋아요'를 눌러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그리 많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늘 재잘거리는 사람만 재잘거리면 재미가 없고 새로운 떡밥이 도래하지 않는다.
필자의 페친 중에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호소성 질문을 하는 이들이 가끔 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몰라서다. 그런데 필자 역시 글을 잘 쓰는 축이 아니라, 부끄럽게도 "함께 노력하자"는 식의 영양가 없는 말로 마무리하기 일쑤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한 사회에는 '경제자본'뿐 아니라 '문화자본'도 있다고 설명한다. 쉽게 말해 누군가 문화를 생산하려면, 글쓰기 능력·정보나 지식 등 비물질적 생산 수단부터가 필요하다.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 뿐 아니라, 문화적 불평등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물어보자. 대체 왜 우리나라 중등교육에는 독일과 프랑스처럼 '작문수업'이나 '철학수업'이 없다시피 할까? 어찌보면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이, 대학을 나온 사람보다 참여할 수 있는 대화의 폭이 지나치게 제한된다는 것부터가 사회 관계망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다.
필자는 외국 언론을 모니터링하면서, 그것이 일리 있는 말이든 허튼소리든 서양인들이 제법 유창하게 말하는 걸 보면 저런 점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학 진학률은 한국만큼 높지 않다! 사람들이 자기 문화를 생산하고 포틀래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화자본을 공급하지 못하는 경쟁 닦달형 한국 주입식 교육에 먼저 '싫어요'를 눌러야 하지 않을까.
○ 편집ㅣ박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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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짓기>(피에르 부르디외 / 새물결 / 2005 / 2만7000원)
<따봉(충)>(구스위키, 나무위키, 디시위키 2015.8.21 최종버전)
<물화>(악셀 호네트 / 나남출판 / 2006)
<인정투쟁>(악셀 호네트 / 사월의책 / 2011 / 2만3000원)
<증여론>(마르셸 모스 / 한길사 / 2011 / 2만3000원)
<포틀래치모형의 사회적 관계와 소셜 웹의 필요성>(웹플러 / 2012.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