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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회복해가는 카트만두

[네팔 지진 현장을 찾아서 26] 일상 속에서 축복받는 기쁨

등록|2015.09.06 15:08 수정|2015.09.08 13:09

▲ 너렌드라 라즈 쁘라싸이 집에서 특별한 축북의 시간을 갖다. 그의 장모가 카다를 걸어주고 있다. 너렌드라 라즈 쁘라싸이와 그의 아내 그리고 우리 부부. ⓒ 김형효


토요일은 네팔에 공식 휴무일이다. 토요일이 정식 휴무일이고 일요일 업무가 개시된다는 이야기를 수차례 했다. 참으로 주체적인 사람들이다. 전 세계에 네팔이 거의 유일할 것 같은 생각이다.

지난주 토요일은 남자들을 축복하는 날이라고 했다. 거리가 한산했다. 나는 새벽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용서할 수 없는 신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네팔 사람들이 당할 만큼 당하고도 신에 대해 경배하는 태도, 그들이 열정적으로 신에게 다가가려는 노력 속에 사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그들이 이미 신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초대로 방문한 곳에서 뜻밖의 인사

▲ 사진 위는 네팔 카트만두 관광청 인근 북 전시장에서 만난 라데샴 네깔리 씨와 아내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 사진 아래 왼쪽은 한국에서 가져온 조립식 주택 하역작업 중인 모습, 오른쪽은 먼줄 시인의 집 응접실에서 대화 중. ⓒ 김형효


나의 하루는 격하게 바빴다. 다음 날 미국으로 출국하는 네팔어 창시자 바누벅타 어챠르야 200주년 추모위원장인 너렌드라 라즈 쁘라싸이(Narendre Raj Prasai)씨의 초대를 받았다.

우리 부부를 집으로 초대해 갔는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집에는 네팔에 가요계 인사와 방송인, 시인 등이 두루 와 있었고 한 정당에 대변인도 와 있었다. 우리 부부가 주빈이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다. 90세에 가까운 그의 장모께서 우리 부부에게 카다와 숄을 목에 걸어주며 축원을 빌어주었다. 물론 며칠 전 있었던 바누벅타 어챠르야 200주년 관련 출판기념회에 고생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자리이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지난해 바누벅타 어챠르야 200주년 한국추모위원으로 아내는 한국 추모위원장을 나는 한국 추모위원회 총무역을 맡았었다. 그 인연으로 우리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자리였는데 전혀 사전에 이야기가 없었다. 그냥 단순한 인사로 알고 찾았다가 뜻밖에 인사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곧 네팔의 유명 가수인 고팔 욘전(Gopal Yonjan) 추모가요제로 향했다. 우리는 지인인 가수 쁘라딥 범전(Pradeep Bomjan) 형님의 초청으로 행사에 참석했다. 한 시간 이상을 함께 했으나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곧 북 전시회장을 찾았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생활을 마치고 다시 네팔로 돌아온 작가 쁘라가띠 라이(Pragati Rai)씨가 북 전시회장으로 불러서 간 것이다. 그녀의 남편 라전 무카룽도 그녀도 작가인데 5년 동안의 이주노동자 생활을 마치고 온 그녀가 이제 어떤 작품을 보여줄까? 기대가 크다.

정비된 네팔 거리, 변화를 보다

▲ 참석자들과 함께 너렌드라 라즈 쁘라싸이 씨의 집 마당. ⓒ 김형효


우리는 북 전시장에서 뜻하지 않게 라데샴 네깔리(Radheshyam Lekali) 트리뷰반대학교에 재직 중인 평론가를 만났다. 그는 지난번 나의 네팔어 시집에 대해 출판기념회장에서 평론해준 사람이다. 그는 북 전시장에서 싸인회를 갖고 있었다. 아내에게 어서 책을 한 권 구매하라고 하고 사인을 받았다.

다음 날은 아내의 스쿠터 뒷자리에 타고 하루를 보냈다. 먼저 한국인 회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랄리푸르에서 주유를 하려고 길게 줄을 지어 섰다. 아내가 주유를 마치자 곧 출발했다. 한국의 한 회사가 지진 이후 조립식 주택을 보급하기 위해 나섰다.

지인과 연이 닿아 내게 연락이 왔다. 나는 인사를 나눌 겸 그리고 빵도 전하러 갔다. 이 일정은 지극히 사적인 일정이다. 나중에 혹시 도움이라도 좀 받는다면 빵을 만드는 데 쉬워지려나? 가는 길에 한 텔레비전 방송사 카메라 기자와 동행했다. 후일 주택사업 보급이 원활하게 된다면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당일 컨테이너가 막 도착해서 작업 중이었다.

다음은 네팔 시인 먼줄 형님을 만나러 갔다. 내가 만들어간 빵을 전했다. 여전히 불편하시지만 많이 좋아지고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먼줄 시인은 가족사에 아픔으로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호전되어 가고 있고 이제 나와는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다.

그가 지난 2007년 만해문학축전에 초청받아 한국에 갔을 때 한국을 여행하며 쓴 많은 시편이 있어 출판을 진지하게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네팔에서도 출판하고 가능하다면 한국에서도 출판하자고 했다. 당일 밤 내게 네팔어 원고를 보내주시기로 했다. 때 마침 집에 있던 몇 해 전만 해도 재롱을 피우던 어린 딸이 커서 찌아를 내왔다. 또 다른 기쁨이다.

▲ 줄지어서 주유를 하고 있다. 빨간 자켓을 입은 아내도 줄지어 서 있다. 그리고 정비되고 있는 거리 풍경과 빔센 다라하라 모형을 세워 재건을 기원하는 네팔 거리 풍경이다. ⓒ 김형효


돌아오는 길에 많은 주유소가 문을 닫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거리는 정비되고 있어 새로운 네팔의 변화를 위한 몸부림은 멈추지 않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휴식 중이다.

내일은 벅터푸르와 끼리티푸르 두 곳에 빵을 배달할 예정인데 하루에 서로 다른 두 지역에 갈 수 있을 지 걱정이다. 오전에는 200여 개의 빵을 만들었고 30여 개를 배달했다. 다시 저녁에 추가로 만들어 내일 배달량을 채울 생각이다. 지치고 몸이 말을 잘 안 듣는데 이상하게 그때만 되면 사색은 더 깊어진다. 오랜만에 한 편 시를 썼다.

떠도는 일상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느냐?
나도 묻고 너도 묻고
사람과 사람으로 살아가는 인연들이
이곳, 저곳, 곳곳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묻고 있네.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그걸 왜 묻소!
그걸 왜 묻는 거요.
속으로 중얼거리며
또 다른 중얼거림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네.
온 데로 가지, 어디로 간다고
온 데로 가지, 어디로 간다고
아니 갈데없는 것이 사람인데 대체 어디로 간다고
묻고 또 물어오면 나더러 어쩌라고
나는 항상 온 데로 가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나는 항상 온 데로 가고 있소.
그렇게 나는 항상 그대들이 묻는 곳에서
그대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고
그대들과 함께 가고 있고
오늘도 내일도 사람이 가는 길
오늘도 내일도 사람이면 가야할 길
그 길에서 그 길로 가고 또 가리다.
나는 그대의 질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날이면 날마다 그렇게 가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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