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이라 대한에서 서울 복판에~"
우리 중동고등학교 교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당시 종로통은 서울의 한복판이었다. 하지만 무수한 세월이 흐른 지금, 종로 대신 강남이 서울 한복판이 되었다. 그래서 중동고가 강남으로 이전했는지 모른다. 또 오늘 중동고신우회가 강남 한복판에서 출범의 고동을 울렸고. 그간 신우회 이름으로 한 활동이 간간히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 9월 7일 중동신우회를 정식으로 출발시켰다.
직전 총동문회장을 지낸 백강수 장로가 섬기는 교회, 순복음강남교회에서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SNS로 소식을 묻고 전하면서 지내왔지만 막상 오늘 신우회에 얼마나 참석할지, 어떤 사람이 함께 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다든가.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그런 자세로 우리는 신우회 출범을 준비했다.
중동고신우회의 필요성을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이야기하고 다녔다. 110년의 전통에 배출한 동문만 7만여 명, 한국 현대사에서 중동고가 한 역할이 결코 적지 않음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다. 다양한 사람이 포진해 있는 동문들 중에 크리스천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을 터였다. 이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학교를 위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할 일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 교계의 자랑인 손양원 목사님이 지난해 107회 중동고 졸업식장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은 바 있다. 그의 순교 영성에 힘 얻는다면 침체된 교계에 새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겠다 싶었다. 중동고신우회에서 할 일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침체된 교계를 진작시키는 일,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여기서 첫 삽을 뜨자는 것이 많은 사람의 의견이었다.
주님의 일이란 신묘(神妙)하다. 생각하기에 따라 연(軟)에서 강(强)까지 여러 스펙트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중동신우회 출범식을 나는, 아니 많은 사람도 '연'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바람이 점점 '연'에서 '강'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감지되었다. 이럴 땐 누구든 총대를 메야 한다. 내가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다.
휴대전화 카톡과 문자로 또 때로는 메일로 연락이 닿는 그리스도인 동문에게 소식을 알렸다.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말이다.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는 상황에 이게 무엇하는 짓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중동신우회 출범식이 소수의 사람들의 의해 초라하게 거행되어서는 아니 될 말이었다. 기도 소리와 손놀림이 더욱 빨라진 이유였다.
20여 명의 참석률이 예상되었다. 이들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새벽 일찍 서둘렀다. 오전 7시 41분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곤비한 때 기차칸 수면 만큼 달콤한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기차칸에서 오늘 신우회 모임의 순서 짜기에 골몰했다. 그런데 이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비슷한 행사를 준비해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순서 맡을 담당자 정하는 것은 정말 사람의 마음대로 안 된다. 기차 속에서 긴 시간을 전화 통화로 보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부분 흔쾌히 맡겠다는 반응들이어서 힘이 났다. 오전 11시쯤 서울역 도착. 딸애가 아르바이트 일을 하는 서울역 구 청사에 들려 '광복70주년기념 특별기획전'을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훑어보고 국회도서관으로 향했다. 많지 않은 시간에 찾아 볼 자료가 너무 많아 마음의 짐이 되었다.
하지만 웬 걸! 자료 찾아야 할 시간에 신우회 출범 예배 순서지를 만들고 있었으니! 오늘 신우회 출범 모임은 다른 때와는 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식사하면서 덕담 나누고 헤어지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그렇다면 모임의 내용과 형식을 어느 만큼은 갖추어야 할 것이었다. 컴퓨터 한 대를 겨우 확보해 작업에 들어갔다.
오후 3시 30분, 전대웅 목사님이 국회도서관으로 차를 가지고 왔다. 전 선배님의 후배 사랑은 유별나다. 아마 다리가 불편한 내게는 더 한 것 같다. 지난해 우리 교회를 방문했을 땐 몇 개월 고장 난 상태로 사용한 변기를 고쳐주었고, 성경을 새 개역개정판으로 바꾸는 데도 일정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 반주자가 갑자기 자리를 비워 힘들어 하는 나에게 찬양 반주기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오후 5시가 우리의 모임 시간이다.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코리안 타임'을 염두에 두고 정하지 않았나 싶다. 교회는 사람이 끌어야 살아 있는 것 같다. 큰 덩치를 자랑하는 순복음강남교회가 우리 신우회 동문들로 인해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20여 명이 모이자 우리는 7층 외국인 예배실로 안내받아 올라갔다. 백강수 장로님이 이 부서 책임을 맡고 있다고 했다.
어떤 조직이든 출발은 미미하다. 이것은 사사로운 단체에서부터 대대적인 국가 차원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다 적용되는 현상이다. 소위 혁명이라 일컫는 것들도 처음엔 몇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많이 보아왔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로 세상을 바꾸시지 않았나! 우리 중동신우회도 소수로 시작하지만 점점 증진 발전되리라 확신한다. 백 장로님은 예상보다 많이 참석했다며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오늘 중동 신우회 모임의 순서는 이렇다. 1부 경건회, 2부 출범식. 그리고 저녁식사와 정담 나누기가 3부에 해당하는 셈이다. 1부 경건회 사회는 내가 봤다. 237장 찬송을 함께 부르고 장인수 집사님(67회)이 대표 기도를 했고, 전대웅 목사님(63회)이 요한복음 15장 12절-17절 말씀을 본문으로 "친구"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동문 신우회엔 프렌드십이 중요하고 그것이 아가페 사랑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는 내용이었다. 신진수 목사님(63회)의 축도로 1부 경건회를 끝냈다.
2부 출범을 위한 회무의 시간이다. 중동고 총동문회 직전 회장을 지낸 백강수 장로님이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고 손양원 목사님이 중동학교를 다녔다는 것을 밝혀 내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게 한 장본인이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가능했겠지만 총동문회장인 백 장로님이 아니었다면 손 목사님과 중동의 인연은 묻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작년 2월 중동고 107회 졸업식장, 명예졸업장을 손 목사님의 큰딸 손동희 권사에게 수여하고 나서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중동고등학교가 늦게나마 고 손양원 목사님에게 명예졸업장을 드리니까 손 목사님은 우리에게 중동신우회라는 선물을 주셨다고. 맞는 말 같다. 그 일로 인해 중동고 크리스찬 동문들이 결집하게 되었으니까. 이런 점에 비추어 백 장로님이 중동신우회 회장을 맡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일 것 같다.
각 기수별로 앞에 나와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많게는 다섯 명 적게는 한 명 비교적 골고루 참석한 동문들의 소개엔 신우회에 대한 바람도 곁들여 있었다. 결론은, 기대가 많고 열심히 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직과 홍보의 달인(?) 황병직 총동문회 직전 사무총장의 경과보고가 있었다. 중동신우회가 태동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윤곽이 굵직굵직한데, 일 처리엔 너무 정치(精緻)해 조직을 추스리는데 필요한 성격의 양단(兩端)을 그는 갖고 있다.
64회 가흥래 집사님이 사례 발표를 했다. 64회 신우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해도 될 듯싶다. 14년 동안 150회의 신우회 예배를 한 번도 그르지 않고 이어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회원들의 열정이 그에 조응(照應)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을 일이다. 마침 강남침례교회를 담임하는 피영민 목사님이 중동 64회 동기라 그 교회에서 장소를 제공하고 있고,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 토요일에 모이는데 적게는 20 여 명, 많을 때는 40여 명이 동부인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이런 선한 일이 각 기수별로 확산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안건 토의 시간에 몇 가지를 결정했다. 백강수 장로님이 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미미 확정된 바이고, 모임은 분기별로 그러니까 1년에 4회 모이는 것으로 하되 신년 하례회를 포함하면 연 5회를 정기적으로 모인다. 물론 긴급 사항이 발생할 경우 임시 모임은 언제든 개최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각 기수별로 1명씩 운영위원을 선임, 그들이 회장을 보좌하여 신우회를 운영하는 것으로 한다. 누군가가 이야기했듯이 어떤 조직이든 인간적 유대가 전제될 때 그 조직이 강고해진다고 하는데, 우리 중동신우회도 마음에 꼭 새겨야 할 부분이다.
오늘 신우회 출범 예배에는 63회에서 72회에 이르기 까지 비교적 골고루 참석했는데, 아쉬운 것은 그 폭이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중동이 금년 108회 졸업생을 배출했으니까 그 폭은 의외로 넓다. 그러나 오늘은 72회 최광로 목사님이 가장 낮은 기수였다. 사회에서는 장년으로 어른 행세를 할 연배인데, 신우회 모임에 와서 막내 역할을 해야 하는 그가 좀 안쓰럽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신우회 나오면 젊어져서 좋다며 기쁨으로 선배들을 돌아봤다.
사진 촬영 시간이다. 저녁 식사를 빼곤 맨 마지막 순서. 우리는 교회 1층 로비(만남의 광장)로 내려와 옷매무시를 다지고 머리를 추스리며 자리를 잡았다. 63, 64선배들이 의자에 앉고 나머지가 뒤에 서는 구도였다. 점잖게 한 컷, 또 주먹을 불끈 쥐고 구호를 외치며 한 컷. 이런 모임에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발견하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동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다. 예수님도 이런 사회를 희구하지 않으셨는가.
저녁 식사 자리는 교회 인근 보쌈 집, 회장으로 추대된 백강수 장로님이 쏜다고 했다. 먹는 즐거움, 그래서 예수님도 늘 백성들을 먹이시는 일에 많은 신경을 쓰셨다. 우리 속담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배가 불러야 흥이 난다는 뜻이다. 또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성경 말씀은 의미 있는 일이 배 채움의 전제가 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오늘 신우회를 출범시킨 우리에게 식흥(食興)이 없다면 더 이상한 일이 아닐런가. 김웅진 교수님(65회)의 식사기도 후 우리의 입이 일제히 움직였다.
손양원 목사님 이야기, 우간다 이현수 선배님의 선교 무용담 등이 공유되었고, 또 테이블별로 각자 마음에 묻어 두었던 속내들을 풀어 놓았다. 오늘 홍일점인 신진수 목사님 사모님을 좀 더 챙겨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해 미안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세상 모임 같으면 2차니 3차니 해서 자리를 옮겨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몸을 맡기겠지만 우리 믿음의 형제들은 그럴 일이 없다. 각자 아쉬움을 간직한 채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짐의 정을 나누었다.
그 중 70회를 중심으로 몇 사람들은 커피숍을 찾아 남아 있는 생각들을 더 풀어놓았다. 우리 70회가 네 명 참석해 연락을 담당한 내가 면목이 섰다. 황영훈 목사, 김동진 장로, 최민식 집사 등은 졸업하고 처음 만난 것이 된다. 정말 울퉁불퉁 여드름 청소년 때 헤어져 백발을 휘날리며 상봉한 것이다. 그것도 주님의 일꾼들로 만났으니 그 기쁨이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앞으로 신우회를 통해 더 자주 만나 사랑을 나누자고 했다. 최민식 집사님이 산 커피 향은 그것의 징표이듯 피어올랐다.
우리 중동고등학교는 1906년에 개교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11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민족 사학으로 불리고 있는 학교이다. 기독교 학교가 아닌 곳에서 예수 믿는 동문들이 모여 기독신우회를 조직한 것이다. 대단한 기도의 산물, 열정의 결정체이다. 앞으로 이 신우회가 각 기별로 확산되고 현 재학생들에게까지 연결되어 주님 안에서 더 튼튼하고 값진 삶을 사는 통로가 되면 좋겠다. 그런 일을 중동신우회에서 해 나가려 한다. 나와 가정을 위해서 나아가 학교와 지역 사회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주님의 사랑을 안고 한 발짝 한 발짝씩.
우리 중동고등학교 교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당시 종로통은 서울의 한복판이었다. 하지만 무수한 세월이 흐른 지금, 종로 대신 강남이 서울 한복판이 되었다. 그래서 중동고가 강남으로 이전했는지 모른다. 또 오늘 중동고신우회가 강남 한복판에서 출범의 고동을 울렸고. 그간 신우회 이름으로 한 활동이 간간히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 9월 7일 중동신우회를 정식으로 출발시켰다.
직전 총동문회장을 지낸 백강수 장로가 섬기는 교회, 순복음강남교회에서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SNS로 소식을 묻고 전하면서 지내왔지만 막상 오늘 신우회에 얼마나 참석할지, 어떤 사람이 함께 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다든가.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그런 자세로 우리는 신우회 출범을 준비했다.
중동고신우회의 필요성을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이야기하고 다녔다. 110년의 전통에 배출한 동문만 7만여 명, 한국 현대사에서 중동고가 한 역할이 결코 적지 않음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다. 다양한 사람이 포진해 있는 동문들 중에 크리스천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을 터였다. 이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학교를 위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할 일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었다.
▲ 중동신우회 함안 칠원면 손양원 목사 생가 방문중동신우회 회원 30 여명이 2014년 4월 25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 있는 손양원 목사 생가터를 방문했다. 생가 복원을 위해 한창 공사 중이었다. ⓒ 이명재
무엇보다도 한국 교계의 자랑인 손양원 목사님이 지난해 107회 중동고 졸업식장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은 바 있다. 그의 순교 영성에 힘 얻는다면 침체된 교계에 새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겠다 싶었다. 중동고신우회에서 할 일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침체된 교계를 진작시키는 일,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여기서 첫 삽을 뜨자는 것이 많은 사람의 의견이었다.
주님의 일이란 신묘(神妙)하다. 생각하기에 따라 연(軟)에서 강(强)까지 여러 스펙트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중동신우회 출범식을 나는, 아니 많은 사람도 '연'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바람이 점점 '연'에서 '강'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감지되었다. 이럴 땐 누구든 총대를 메야 한다. 내가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다.
휴대전화 카톡과 문자로 또 때로는 메일로 연락이 닿는 그리스도인 동문에게 소식을 알렸다.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말이다.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는 상황에 이게 무엇하는 짓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중동신우회 출범식이 소수의 사람들의 의해 초라하게 거행되어서는 아니 될 말이었다. 기도 소리와 손놀림이 더욱 빨라진 이유였다.
20여 명의 참석률이 예상되었다. 이들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새벽 일찍 서둘렀다. 오전 7시 41분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곤비한 때 기차칸 수면 만큼 달콤한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기차칸에서 오늘 신우회 모임의 순서 짜기에 골몰했다. 그런데 이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비슷한 행사를 준비해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 중동신우회 출범 예배 순서지사진설명 2)중동신우회 출범예배 순서지. 순서를 제안받은 사람들이 흔쾌히 받아주어 일이 한결 쉽게 진행될 수 있었다 ⓒ 이명재
순서 맡을 담당자 정하는 것은 정말 사람의 마음대로 안 된다. 기차 속에서 긴 시간을 전화 통화로 보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부분 흔쾌히 맡겠다는 반응들이어서 힘이 났다. 오전 11시쯤 서울역 도착. 딸애가 아르바이트 일을 하는 서울역 구 청사에 들려 '광복70주년기념 특별기획전'을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훑어보고 국회도서관으로 향했다. 많지 않은 시간에 찾아 볼 자료가 너무 많아 마음의 짐이 되었다.
하지만 웬 걸! 자료 찾아야 할 시간에 신우회 출범 예배 순서지를 만들고 있었으니! 오늘 신우회 출범 모임은 다른 때와는 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식사하면서 덕담 나누고 헤어지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그렇다면 모임의 내용과 형식을 어느 만큼은 갖추어야 할 것이었다. 컴퓨터 한 대를 겨우 확보해 작업에 들어갔다.
오후 3시 30분, 전대웅 목사님이 국회도서관으로 차를 가지고 왔다. 전 선배님의 후배 사랑은 유별나다. 아마 다리가 불편한 내게는 더 한 것 같다. 지난해 우리 교회를 방문했을 땐 몇 개월 고장 난 상태로 사용한 변기를 고쳐주었고, 성경을 새 개역개정판으로 바꾸는 데도 일정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 반주자가 갑자기 자리를 비워 힘들어 하는 나에게 찬양 반주기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 출범 예배를 드리고 있는 신우회원들사진설명 3)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예상한 것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중동신우회가 고고한 소리를 세상에 냈다 ⓒ 이명재
오후 5시가 우리의 모임 시간이다.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코리안 타임'을 염두에 두고 정하지 않았나 싶다. 교회는 사람이 끌어야 살아 있는 것 같다. 큰 덩치를 자랑하는 순복음강남교회가 우리 신우회 동문들로 인해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20여 명이 모이자 우리는 7층 외국인 예배실로 안내받아 올라갔다. 백강수 장로님이 이 부서 책임을 맡고 있다고 했다.
어떤 조직이든 출발은 미미하다. 이것은 사사로운 단체에서부터 대대적인 국가 차원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다 적용되는 현상이다. 소위 혁명이라 일컫는 것들도 처음엔 몇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많이 보아왔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로 세상을 바꾸시지 않았나! 우리 중동신우회도 소수로 시작하지만 점점 증진 발전되리라 확신한다. 백 장로님은 예상보다 많이 참석했다며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오늘 중동 신우회 모임의 순서는 이렇다. 1부 경건회, 2부 출범식. 그리고 저녁식사와 정담 나누기가 3부에 해당하는 셈이다. 1부 경건회 사회는 내가 봤다. 237장 찬송을 함께 부르고 장인수 집사님(67회)이 대표 기도를 했고, 전대웅 목사님(63회)이 요한복음 15장 12절-17절 말씀을 본문으로 "친구"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동문 신우회엔 프렌드십이 중요하고 그것이 아가페 사랑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는 내용이었다. 신진수 목사님(63회)의 축도로 1부 경건회를 끝냈다.
▲ 중동신우회 회장으로 추대된 백강수 장로사진설명 4)중동신우회 회장으로 추대된 백강수 장로. 그는 중동총동문회 직전 회장으로서도 많은 일을 했다 ⓒ 이명재
2부 출범을 위한 회무의 시간이다. 중동고 총동문회 직전 회장을 지낸 백강수 장로님이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고 손양원 목사님이 중동학교를 다녔다는 것을 밝혀 내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게 한 장본인이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가능했겠지만 총동문회장인 백 장로님이 아니었다면 손 목사님과 중동의 인연은 묻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작년 2월 중동고 107회 졸업식장, 명예졸업장을 손 목사님의 큰딸 손동희 권사에게 수여하고 나서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중동고등학교가 늦게나마 고 손양원 목사님에게 명예졸업장을 드리니까 손 목사님은 우리에게 중동신우회라는 선물을 주셨다고. 맞는 말 같다. 그 일로 인해 중동고 크리스찬 동문들이 결집하게 되었으니까. 이런 점에 비추어 백 장로님이 중동신우회 회장을 맡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일 것 같다.
각 기수별로 앞에 나와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많게는 다섯 명 적게는 한 명 비교적 골고루 참석한 동문들의 소개엔 신우회에 대한 바람도 곁들여 있었다. 결론은, 기대가 많고 열심히 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직과 홍보의 달인(?) 황병직 총동문회 직전 사무총장의 경과보고가 있었다. 중동신우회가 태동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윤곽이 굵직굵직한데, 일 처리엔 너무 정치(精緻)해 조직을 추스리는데 필요한 성격의 양단(兩端)을 그는 갖고 있다.
▲ 인사하는 63회 동문들사진설명 5)기수별 소개 시간, 63회 동문들이 4명 참석해 선배로서의 모범을 톡톡히 보였다. 오른쪽부터 신진수 김광섭 성용제 전대웅 선배 ⓒ 이명재
64회 가흥래 집사님이 사례 발표를 했다. 64회 신우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해도 될 듯싶다. 14년 동안 150회의 신우회 예배를 한 번도 그르지 않고 이어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회원들의 열정이 그에 조응(照應)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을 일이다. 마침 강남침례교회를 담임하는 피영민 목사님이 중동 64회 동기라 그 교회에서 장소를 제공하고 있고,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 토요일에 모이는데 적게는 20 여 명, 많을 때는 40여 명이 동부인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이런 선한 일이 각 기수별로 확산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안건 토의 시간에 몇 가지를 결정했다. 백강수 장로님이 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미미 확정된 바이고, 모임은 분기별로 그러니까 1년에 4회 모이는 것으로 하되 신년 하례회를 포함하면 연 5회를 정기적으로 모인다. 물론 긴급 사항이 발생할 경우 임시 모임은 언제든 개최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각 기수별로 1명씩 운영위원을 선임, 그들이 회장을 보좌하여 신우회를 운영하는 것으로 한다. 누군가가 이야기했듯이 어떤 조직이든 인간적 유대가 전제될 때 그 조직이 강고해진다고 하는데, 우리 중동신우회도 마음에 꼭 새겨야 할 부분이다.
오늘 신우회 출범 예배에는 63회에서 72회에 이르기 까지 비교적 골고루 참석했는데, 아쉬운 것은 그 폭이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중동이 금년 108회 졸업생을 배출했으니까 그 폭은 의외로 넓다. 그러나 오늘은 72회 최광로 목사님이 가장 낮은 기수였다. 사회에서는 장년으로 어른 행세를 할 연배인데, 신우회 모임에 와서 막내 역할을 해야 하는 그가 좀 안쓰럽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신우회 나오면 젊어져서 좋다며 기쁨으로 선배들을 돌아봤다.
▲ 예배 끝내고 기념사진 촬영사진설명 6)중동신우회 출범식이 끝나고 기념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 이명재
사진 촬영 시간이다. 저녁 식사를 빼곤 맨 마지막 순서. 우리는 교회 1층 로비(만남의 광장)로 내려와 옷매무시를 다지고 머리를 추스리며 자리를 잡았다. 63, 64선배들이 의자에 앉고 나머지가 뒤에 서는 구도였다. 점잖게 한 컷, 또 주먹을 불끈 쥐고 구호를 외치며 한 컷. 이런 모임에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발견하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동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다. 예수님도 이런 사회를 희구하지 않으셨는가.
저녁 식사 자리는 교회 인근 보쌈 집, 회장으로 추대된 백강수 장로님이 쏜다고 했다. 먹는 즐거움, 그래서 예수님도 늘 백성들을 먹이시는 일에 많은 신경을 쓰셨다. 우리 속담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배가 불러야 흥이 난다는 뜻이다. 또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성경 말씀은 의미 있는 일이 배 채움의 전제가 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오늘 신우회를 출범시킨 우리에게 식흥(食興)이 없다면 더 이상한 일이 아닐런가. 김웅진 교수님(65회)의 식사기도 후 우리의 입이 일제히 움직였다.
손양원 목사님 이야기, 우간다 이현수 선배님의 선교 무용담 등이 공유되었고, 또 테이블별로 각자 마음에 묻어 두었던 속내들을 풀어 놓았다. 오늘 홍일점인 신진수 목사님 사모님을 좀 더 챙겨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해 미안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세상 모임 같으면 2차니 3차니 해서 자리를 옮겨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몸을 맡기겠지만 우리 믿음의 형제들은 그럴 일이 없다. 각자 아쉬움을 간직한 채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짐의 정을 나누었다.
▲ 70회를 중심으로 가진 커피 타임사진설명 7)70회를 중심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커피숍을 찾아 남은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 이명재
그 중 70회를 중심으로 몇 사람들은 커피숍을 찾아 남아 있는 생각들을 더 풀어놓았다. 우리 70회가 네 명 참석해 연락을 담당한 내가 면목이 섰다. 황영훈 목사, 김동진 장로, 최민식 집사 등은 졸업하고 처음 만난 것이 된다. 정말 울퉁불퉁 여드름 청소년 때 헤어져 백발을 휘날리며 상봉한 것이다. 그것도 주님의 일꾼들로 만났으니 그 기쁨이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앞으로 신우회를 통해 더 자주 만나 사랑을 나누자고 했다. 최민식 집사님이 산 커피 향은 그것의 징표이듯 피어올랐다.
우리 중동고등학교는 1906년에 개교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11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민족 사학으로 불리고 있는 학교이다. 기독교 학교가 아닌 곳에서 예수 믿는 동문들이 모여 기독신우회를 조직한 것이다. 대단한 기도의 산물, 열정의 결정체이다. 앞으로 이 신우회가 각 기별로 확산되고 현 재학생들에게까지 연결되어 주님 안에서 더 튼튼하고 값진 삶을 사는 통로가 되면 좋겠다. 그런 일을 중동신우회에서 해 나가려 한다. 나와 가정을 위해서 나아가 학교와 지역 사회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주님의 사랑을 안고 한 발짝 한 발짝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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