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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는 두 가지뿐인데, 전국적으로 유명한 빵집

3대째 이어지는 빵집, 전남 순천 화월당

등록|2015.09.16 08:33 수정|2015.09.16 08:33

▲ 동네 빵집 화월당을 살린 '볼 카스텔라' ⓒ 김종성


100년이나 됐다는 군산 이성당, 60년이 넘은 전주 풍년 제과와 목포 코롬방 제과, 50년 된 대전 성심당, 70년이 넘은 서울 태극당 등 오래된 빵집 이야기는 그곳의 맛있는 빵과 과자만큼이나 풍성하고 흥미롭다. 'OO당'과 'OO제과'라는 친근한 이름은 어릴 적 매일 가고팠던 시내의 빵집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일까 요즘엔 오직 빵을 맛보러 가는 '대한민국 빵빵곡곡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다. 

전통의 빵집, 제과점마다 내세우는 먹거리를 보니 팥빵, 튀김 소보로빵, 초코파이, 야채 샐러드빵, 크림치즈빵 등 익숙한 이름이 대부분이다. 영어나 불어로 된 이름 모를 고상한 빵일 줄 알았는데 소박하기만하다. 왜 이런 평범한 빵을 먹기 위해 전국에서 찾아와 줄을 서거나 택배주문을 하는 걸까. 역시 그만의 '맛'이겠지만, 단순히 맛있는 빵 이상의 매력이 있지 않을까 싶다.

전남 순천에도 길게는 일제 강점기인 1928년부터 혹은 광복 후부터 3대째 이어오는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오래된 빵집이 있다. 순천시 원도심 중앙에 자리한 화월당(花月堂, 순천시 남내동)이다. 이 빵집이 여느 빵집들과 다른 건 팥빵, 크림빵이나 쿠키, 팥빙수 같은 것을 팔지 않는다는 거다. 화월당에서 먹을 수 있는 빵은 딱 두 가지로 이 집만의 전통 먹거리다.

단팥을 넣은 찹살떡인 모찌와 볼(ball) 카스텔라가 그것. 현재 빵집 주인장 선친이 일제 때부터 만들던 빵이었다. 화월당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 현재의 자리에 일본인이 문을 열었다. 1928년부터 점원으로 일하던 선친이 광복 때 인수했고 이후 현재까지 3대째 이어지고 있다.

▲ 품질 좋고 맛있는 빵의 비결은 바로 사람의 '손맛'이 아닐까. ⓒ 화월당내 전시사진 촬영


순천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노포(老鋪) 빵집

유년시절 많은 어깨동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 장래 희망은 빵 공장 직원이었다. 빵집도 아니고 빵 공장인건, 그때 우리 동네엔 '빵집' 같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시내에나 나가야 OO제과 같은 가게들이 있었고 파운드 케이크, 카스텔라 같은 고급 빵들은 언감생심 유리를 통해 바라만 봐야 했다. 다행히 삼립크림빵, 소라빵, 도나쓰, 소보루, 슈크림빵 등 비교적 비싸지 않은 빵들이 있어 가끔씩이나마 '빵욕'을 채울 수 있었다.

이렇게 귀한 빵이었지만 다행히도 학교에서 급식 빵을 먹을 수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에선 미국식 영양학을 따라 학생들에게 매일 우유와 빵을 먹였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우유와 빵을 먹는 아이들은 매달 급식비를 낼 수 있는 중산층 가정 이상이었다.

6.25 전쟁 때 피난민으로 어린 나이에 굶주림을 톡톡히 겪은 아버지를 둔 덕에 나도 학교에서나마 급식으로 나온 빵을 먹을 수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육성회비(育成會費 : 학교의 재정으로 미치지 못하는 교육시설·학교운영 등의 비용을 학부모들이 부담했던 납입금)는 제때 못내도 3남매 자식들의 급식비만큼은 아끼지 않았던 것 같다.

2층 양옥집에 사는 친구네 놀러갔을 때 친구 어머니가 내어준 제과점 빵은 급식빵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때까지 어른들 질문 응답용 판사·의사 말곤 별 꿈이 없던 내게 나중에 빵 공장에 취직해서 제과점 빵만 골라 마음껏 먹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됐다. 그땐 제과점 빵의 역사가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진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기차여행, 간이역 여행을 종종 할 적마다 우리 근대에 일제의 영향이 참 크구나 느끼곤 했는데 빵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빵'이란 말 또한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18세기 포르투갈과 교역을 하면서 빵을 수입하게 된 일본인들은 빵의 포르투갈어 '팡데로(Pao-de-lo)'를 '팡'이라 불렀다. 19세기 서양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가져온 빵은 처음엔 '서양떡'이라 불렸으나, 후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빵'이 되었다.

▲ 순천가는 여정을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던 남도해양열차(S-train). ⓒ 김종성


순천을 품고 흐르는 동천(東川)을 따라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구경을 하러 갔다가, 내게 처음 꿈을 꾸게 했던 그런 빵이 있는 빵집을 찾아갔다. 서울에서 4시간 반이 걸리는 꽤 먼 여행이지만 재미있는 남도해양열차 (S-train) 덕분에 덜 지루하게 갔다. KTX 특실에나 있는 좌석 내 충전 콘센트가 있는가 하면, 자전거 여행자를 위해 자전거 거치대 전용칸이 있는 열차다.

더 놀라운 건 기차 카페 칸에 있는 만화방. 창가에 앉아 만화책을 넘기며 가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순천역까지 갔다. 만화책은 주전부리를 먹으며 책장을 넘기는 맛이 제일이지만, 최고의 화월당 빵맛을 즐기기 위해 꾹 참았다. 일부 여성 승무원들은 옛날 교복 같은 무채색 유니폼을 입고 근무하고 있어 한결 친근했다. 자꾸만 여행을 떠나고 싶게 하는 기차다.

순천역 앞에 있는 관광안내센터에 들어가 '화월당'을 물어보니 담박에 알려주었다. 순천의 중앙에 있는 중앙시장만 찾아가면 된단다. 정말 시장통 입구에 작은 빵집이 딱 붙어있었다. 화월당이다. 요즘 유행을 따라 간판에 'since 1928'이라고 써있다. 중간에 이전도 안하고 한자리에서 이렇게 오래 자리한 가게라니 더욱 놀랍다. 작지만 터줏대감 같은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혹자는 이런 가게를 노포(늙을老, 가게 鋪)라 칭한다. 오래된 고목 느티나무처럼 세월과 정겨움이 묻어나니 사람처럼 늙었다는 표현을 해도 되겠다.

▲ 빵집의 인정이 느껴지는 가게 앞 좌판. ⓒ 김종성


'화월당'을 살린 두 가지 빵

빵집 유리창 앞에 나물을 파는 좌판 상인 아낙들이 앉아 장사를 하고 있었다. 왠지 그 모습에서 빵집의 따스한 인정이 느껴져 더욱 맘에 들었다. 가게 안을 한 바퀴 둘러보며 카운터에 앉아 있는 일흔이 넘은 사장(조병연)님에게 말을 붙여 보려 했지만, 교장 선생님 같은 근엄한 표정에 눌려 빵 구경만 했다. 벽에 걸려있는 빵 빚는 사진 속 사장님은 활짝 웃고 있어 마음이 놓였다. 노포의 공통적인 점 가운데 하나가 주인장들 대부분이 무뚝뚝하고 우직한 인상이라는 점이다. 다행히 3대째 가업을 이어받고 있다는 홀에 아들이 나타나 한결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내 유년시절 그랬던 것처럼, 화월당 빵도 제과점 축에 끼는 빵이라 옛날엔 아무나 못 먹었단다. 순천의 유지나 공무원, 교사 등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먹는 간식이었다고. 화월당이란 빵집 이름도 주인장이 붙인 이름이 아니고 원래 있었던 이름이란다. 1920년 일본 시마네 현의 고바야시란 사람이 가족을 이끌고 순천에 이주하여 문을 연 것이 화월당이다. 특이하게 그는 빵 기술자가 아니라 건축 기술자였단다. 일제 때 우리 근대 건축물은 거의 일본인과 중국인의 손에 의해 설계됐다.

그 빵집에서 현 사장님의 선친이 일하게 되었다. 전남 승주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난 선친 조천석씨는 1928년 열다섯의 나이로 이 가게에 취직한다. 그 무렵의 흑백사진이 가게 벽에 붙어 있어 빵집 이야기가 더 생생했다. 근면하고 일 잘하는 천석씨, 근로자의 날에 신사에서 받은 상장도 가게에 남아 있다. 해방이 되자 고바야시 가문은 귀국 보따리를 쌌고 이후 선친 조씨는 화월당에 새옷을 입히고 새로이 문을 열었다.

▲ 화월당 빵집을 살린 볼 카스텔라, 찹쌀떡 모찌. ⓒ 김종성


화월당은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기술을 그대로 사용하여 빵을 구웠다. 메뉴가 단출한 지금과 달리 빙수며, 셰이크와 도넛에다가 야채 사라다빵과 샌드위치 등 품목이 다양했다. 오래된 제과점들이 그랬던 것처럼, 화월당은 단순한 빵집이 아니라 젊은 남녀의 미팅이나 맞선 장소로, 지역에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고급 음식점이기도 했다. 1960~1970대까지 화월당은 그렇게 번성하며 순천의 명소가 되었다.

1970년대를 지나고 1980년대를 보낼 즈음 경제 활황에 힘입어 온갖 서구 음식들이 순천에도 밀려들었고, 더불어 생겨난 프랜차이즈 빵집의 공세에 전통적인 지역 빵집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맛과 세련된 인테리어, 마케팅 기술을 앞세운 프랜차이즈 빵집에 사람들이 몰려갔다. 이즈음 순천만이 아니라 서울은 물론 큰 도시의 고급 빵집들도 하나둘 사라져갔다. 군산의 이성당, 대전의 성심당 등도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화월당도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당시 선친이 살아 계셔서 차마 그리 못했다고 한다.

휘청거리던 동네 빵집에 더 큰 타격을 가한 1997년 터진 IMF 사태 이후 근근이 이어가던 화월당을 살린 것이 바로 이 집만의 옛 메뉴였다. 푸짐한 단팥을 넣은 찹살떡인 모찌와 볼(ball) 카스텔라로 불리는 둥그런 빵이 그 주인공. 예전에 선친에 일제 때부터 만들던 그 빵이었다. 유행은 정말 돌고 도는 것인지, 2000년 대 들어 사람들은 다양하고 새로운 빵들에 슬슬 식상해했고,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전통 빵맛에 다시 눈떴다. 이때부터 화월당은 옛 명성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거기엔 오랜시간 지역에서 가지고 있는 좋은 평판도 한몫했다.

정말 가게 안에 들어서면 딱 두 가지 빵만이 손님을 맞고 있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갖춘 여느 빵집과는 판이하게 다른 풍경이다. 이런 저런 빵을 다 만들어 내놓아봐야 중앙에서 다 만들어 공급하는 프랜차이즈와 도저히 경쟁이 안됐단다. 고심하다 소량으로 빵을 제한하고 품질을 높이는 쪽을 택한 것이다.

▲ 전국에서 몰려오는 택배 주문이 매출의 8할이라고. ⓒ 김종성


▲ 더 크게 만들고 옛날식 맛을 유지하는게 화월당 빵의 비결. ⓒ 김종성


찹쌀떡 모찌를 먼저 먹어 보았다. 떡살 피가 얇고 하얀 떡살이 물렁하면서 씹히는 데 입안에서 녹는 것처럼 부드럽다. 팥소의 양이 무척 많다. 볼 카스텔라는 직육면체의 다른 카스텔라와 달리 동그랗고 연한 노란색이다. 크기도 모양도 테니스 볼 처럼 생겼다. 반죽을 얇게 펴 구워 카스텔라를 만든 뒤 팥소를 넣고 말아 공 모양으로 빚는다.

품질은 물론 건강에도 좋은 고급 빵을 만들기 위해 찹쌀 자체를 좋은 것만 골라 쓰고 팥소는 너무 달지 않게 쑤며, 방부제는 물론 떡이 딱딱해지는 걸 막기 위한 첨가제도 일절 넣지 않는 단다. 한입한입 먹어볼수록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선지 집에 와서 빵을 냉동 보관해 놓았다가 먹기 20여 분 전에 꺼내 자연 해동시켜 먹어도 냉동 전의 맛과 별 차이가 없다. 식구들은 팥이 너무 달지 않고 팥소 양이 많아 좋단다. '순천의 명물 빵집'이라 할만 했다. 나처럼 찾아오는 외지 손님도 있지만 요새는 매출의 8할이 전국에서 들어오는 택배 주문이란다. 가게 한쪽에 빵을 담은 택배상자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이렇게 인기를 끄는 화월당 빵맛의 비결은 다른 게 없단다. 그저 더 크게 빵을 만들고 옛날식 맛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화월당은 이제 두 아들 형제에 의해 3대째로 넘어가고 있다. 새로운 세대답게 이들은 외국에서 제과 유학을 하고 귀국, 화월당의 영화를 재현해 가고 있다.

일본이 받아들인 서양식 제과 빵이 식민지 조선과 해방 후 한국에 그대로 남아 그것조차 하나의 전통이 되고 있는 것을 보자니 '전통'의 의미에 대해, 조씨 가족의 빵집 화월당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화월당의 성공을 보면서 국수 하나로 십 몇 대를 잇는 일본 식당의 한 후계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는 어떻게 하면 선대와 '똑같은' 음식을 지속할 수 있을까에 온 힘을 쏟겠습니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덧붙이는 글 ㅇ 지난 9월 1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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